세베루스 2세(Severus II, AD.?~307) : 로마 제국 제44대 공동황제(AD.305~307)
비극적인 운명의 서방 황제, 세베루스 2세
- 이름 :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세베루스(Flavius Valerius Severus)
- 출생 : 미상
- 사망 : 기원후 307년 9월
- 재위 :
Caesar : 기원후 305년 5월 1일 ~ 306년 7월 25일
Augustus : 기원후 306년 7월 25일 ~ 3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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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베루스 2세(Severus II, AD.?~307) : 로마 제국 제44대 공동황제(AD.305~307) |
1. 혼돈의 로마, 한 인물의 그림자
기원후 3세기는 로마 제국에 ‘3세기의 위기’라는 불리는 극심한 혼란의 시기였다. 끊임없는 내전과 빈번한 황제 교체, 그리고 제국 안팎의 위협은 로마를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 황제가 사두정치(Tetrarchy)라는 혁신적인 통치 체제를 도입하여 안정을 도모했지만, 그의 퇴위 이후 이 체제는 곧 다시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이 격동의 시기에 서방 제국의 일원으로 짧은 기간 동안 황제 자리에 올랐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 바로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세베루스(Flavius Valerius Severus), 즉 세베루스 2세(Severus II, ?~307)다.
2. 미천한 출신에서 카이사르의 지위까지
세베루스 2세는 3세기 중반 북부 일리리아(Illyria) 지방에서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났다. 그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갈레리우스(Galerius) 황제의 친밀한 친구였다. 군대에서 경력을 쌓아 고위 장교의 지위에 올랐으며, 탁월한 능력과 갈레리우스의 지지를 바탕으로 권력의 핵심에 다가섰다.
305년 5월 1일,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의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구축한 사두정치 체제를 재정비하며 스스로 퇴위했다. 동시에 동료 황제 막시미아누스(Maximian)에게도 동반 퇴위를 강요했다. 이로써 콘스탄티우스 1세(Constantius I)가 서방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갈레리우스가 동방의 아우구스투스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부황제, 즉 카이사르(Caesar)로는 세베루스 2세와 막시미누스 다이아(Maximinus Daza)가 임명되었다. 세베루스 2세는 서방 제국의 카이사르로서 콘스탄티우스 1세의 부관이 되었다. 당시 락탄티우스(Lactantius)의 기록에 따르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세베루스 2세의 능력을 의심하며 그의 카이사르 임명에 반대했지만, 갈레리우스의 끈질긴 설득으로 결국 동의했다고 한다. 이처럼 세베루스 2세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치 체제 속에서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3. 아우구스투스로의 승격과 불안정한 권력
306년 7월, 브리타니아에서 원정 중이던 콘스탄티우스 1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콘스탄티우스의 군대는 곧바로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e I)를 황제로 추대했다. 이는 사두정치의 계승 원칙인 ‘양자 상속’이 아닌 ‘세습’에 의한 것이었기에 갈레리우스를 비롯한 다른 황제들을 격노하게 했다.
이에 갈레리우스는 세베루스 2세를 서방의 새로운 아우구스투스로 승격시키며, 콘스탄티누스를 카이사르의 지위로만 인정했다. 이는 콘스탄티누스에게 좌천과 같은 의미였다. 세베루스 2세는 비록 최고위직인 아우구스투스에 올랐지만, 그의 권력은 매우 불안정했다. 명목상 그는 서방 제국 전체의 통치자였으나, 실제로 콘스탄티누스는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 지역을 강력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세베루스 2세에게 남겨진 실질적인 통치 영역은 이탈리아와 서아프리카에 불과했다. 그의 짧은 재위 기간 대부분은 사실상 권력을 둘러싼 갈등과 내전으로 점철되었다.
4. 막센티우스와의 내전과 결정적인 패배
306년 10월, 로마에서는 은퇴한 황제 막시미아누스(Maximian)의 아들 막센티우스(Maxentius)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했다. 이는 사두정치 체제에 또 다른 큰 균열을 가져왔다. 막센티우스의 등장은 제국의 안정에 큰 위협이 되었고, 이에 갈레리우스는 세베루스 2세에게 이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령했다.
세베루스 2세는 그의 수도 메디올라눔(Mediolanum, 오늘날 밀라노)에서 로마를 향해 진군했다. 그가 이끌던 군대는 이전에 막시미아누스 휘하에 있던 병력들이었다. 막센티우스는 세베루스 2세의 군대가 로마에 접근하자, 자신의 아버지 막시미아누스에게 공동 통치를 제안했고, 막시미아누스는 이를 받아들여 다시 황제 자리에 복귀했다. 세베루스 2세는 로마 성벽 앞에서 도시를 포위했지만, 과거 막시미아누스 휘하에 있던 그의 병사들 다수가 막센티우스에게 합류하며 배신했다. 전력이 약화된 세베루스 2세는 더 이상 로마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포위를 풀 수밖에 없었다.
궁지에 몰린 세베루스 2세는 당시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요새 도시 라벤나(Ravenna)로 퇴각했다. 막시미아누스는 세베루스 2세에게 평화적으로 항복하면 목숨을 살려주고 인간적으로 대우하겠다고 제안했다. 307년 4월경, 세베루스 2세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항복했다.
5. 비극적인 최후와 그의 죽음
항복 후 세베루스 2세는 약속과 달리 죄수처럼 로마에 전시되었고, 이후 로마 근처 트레스 타베르나이(Tres Tabernae)에 투옥되었다. 그의 정확한 죽음은 여러 설이 있다. 한 가지 설에 따르면, 갈레리우스가 막센티우스와 막시미아누스를 진압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막센티우스가 세베루스 2세의 죽음을 명령했다는 것이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락탄티우스는 세베루스 2세가 스스로 동맥을 잘라 자살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고 전한다. 또 다른 설은 그가 라벤나에서 살해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의 죽음은 307년 9월 또는 10월경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9월까지 그의 이름으로 된 문서가 발급되었고, 12월까지는 그의 사망 소식이 이집트에까지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은 당시 로마의 복잡한 정치적 혼란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6. 사두정치 체제의 불안정한 징표
세베루스 2세의 비극적인 최후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설계했던 사두정치 체제가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의 죽음 이후 서방의 아우구스투스 자리는 308년 11월 카르눈툼 회의(Conference of Carnuntum)에서 리키니우스(Licinius)가 새로운 황제로 임명되기 전까지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 세베루스 2세에게는 플라비우스 세베리아누스(Flavius Severianus)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그는 훗날 리키니우스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되는 비극을 겪었다.
세베루스 2세는 로마의 안정화를 위해 고안된 사두정치 체제 속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의 짧은 통치와 비극적인 죽음은 이 체제가 안고 있던 본질적인 한계, 즉 황제들 간의 권력 다툼과 통치 방식의 불안정성을 드러냈다. 그는 3세기 말부터 4세기 초 로마 제국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던 전환기를 대변하는 비운의 황제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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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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