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4일 목요일

막센티우스(Maxentius, AD.c.283~312) : 로마 제국 제44대 공동황제(AD.306~312)

막센티우스(Maxentius, AD.c.283~312) : 로마 제국 제44대 공동황제(AD.306~312)

 

로마 제국의 운명을 가른 전투의 주인공, 막센티우스 황제

  • 이름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센티우스(Marcus Aurelius Valerius Maxentius)
  • 출생 : 기원후 283년경
  • 사망 : 기원후 3121028
  • 재위 : 기원후 3061028~ 3121028
  • 황제 막시미아누스(Maximian)의 아들

막센티우스(Maxentius, AD.c.283~312) : 로마 제국 제44대 공동황제(AD.306~312)
막센티우스(Maxentius, AD.c.283~312) : 로마 제국 제44대 공동황제(AD.306~312)
 

1. 혼돈의 로마 제국, 한 남자의 등장

 
기원후 3세기는 로마 제국에게 ‘3세기의 위기’'라 불리는 격동의 시기였다. 끊임없는 내전과 빈번한 황제 교체, 그리고 제국 안팎의 위협은 로마를 심각한 불안정 속으로 몰아넣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 황제가 사두정치(Tetrarchy) 체제를 도입하여 안정을 도모했지만, 그의 퇴위 이후 이 체제는 다시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이 혼란 속에서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로마 제국의 서방 패권을 놓고 콘스탄티누스 1(Constantine I)와 마지막 결전을 벌였던 인물이 바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센티우스(Marcus Aurelius Valerius Maxentius, 283년경~312). 그는 로마 본토와 아프리카를 통치하며 한때 제국의 유력한 통치자였으나,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2. 권력으로의 도약 : 황제 즉위와 막시미아누스의 복귀

 
막센티우스는 283년경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황제 막시미아누스(Maximian)였고, 어머니는 에우트로피아(Eutropia)였다. 그는 황제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05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퇴위하고 사두정치 체제가 재편될 때, 새로운 카이사르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막센티우스의 군사적 자질을 의심했고, 갈레리우스(Galerius) 또한 그를 싫어하여 그의 승진을 방해했다고 전해진다. 이에 막센티우스는 로마 외곽의 개인 별장에서 한동안 은둔하며 때를 기다렸다.
 
30610, 로마 시민들이 자신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고 병사로 징집하려는 갈레리우스와 세베루스 2(Severus II)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봉기했을 때, 막센티우스는 이 혼란을 기회 삼아 로마의 프라이토리아니(Praetorian Guard)와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 황제에 오르며 권력을 장악했다. 로마 제국의 오랜 수도인 로마와 이탈리아, 그리고 아프리카 지역은 그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은퇴했던 아버지 막시미아누스에게 복귀를 요청했고, 막시미아누스는 아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다시 아우구스투스(Augustus) 칭호를 사용하며 공동 통치자로 나섰다.
 

3. 내전의 소용돌이 : 세베루스 2세와 갈레리우스와의 대립

 
막센티우스의 황제 선포는 사두정치 체제의 다른 황제들을 격분시켰다. 갈레리우스의 지시를 받은 서방 아우구스투스 세베루스 2세는 307년 초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막센티우스를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막센티우스와 막시미아누스는 뛰어난 전략을 사용하여 세베루스 2세의 군대를 분열시켰다. 세베루스 2세 휘하의 많은 병사들은 과거 막시미아누스의 부하들이었고, 이들은 충성심을 바꿔 막시미아누스에게 합류했다. 결국 세베루스 2세는 라벤나(Ravenna)로 퇴각하여 포위되었고, 약속을 받고 항복했으나 얼마 후 막센티우스의 명령에 따라 처형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세베루스 2세의 실패를 본 갈레리우스는 307년 가을 직접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막센티우스를 공격했다. 그는 압도적인 병력으로 로마를 포위했지만, 막센티우스는 로마의 강력한 방어 시설과 시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끈질기게 저항했다. 갈레리우스는 세베루스 2세의 전철을 밟아 병사들이 막센티우스 편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진퇴양난에 빠졌고,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로마를 포기하고 철수해야 했다. 이 승리들은 막센티우스의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4. 서방 제국의 통치자 : 행정 및 군사적 업적

 
막센티우스는 비록 다른 황제들로부터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의 지배하에 있던 로마, 이탈리아,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실제적인 황제로서 통치했다. 그는 대규모 공공사업을 추진하여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얻으려 노력했다. 로마 포룸(Roman Forum)에 바실리카 막센티아나(Basilica Maxentiana) 건설을 시작했으며(훗날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완성되었다), 막센티우스 원형경기장(Circus of Maxentius)과 그의 아들 발레리우스 로물루스(Valerius Romulus, ?~309)의 영묘를 건설하기도 했다. 308년에는 자신의 아들과 함께 유일하게 콘술(consul) 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또한, 아프리카 지역의 반란 진압은 그의 통치에 있어 중요한 군사적 업적이었다. 308년 후반, 카르타고(Carthage)에서 도미티우스 알렉산데르(Domitius Alexander)라는 인물이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아프리카는 로마의 곡창지대였으므로, 이곳을 상실하는 것은 로마 시의 식량 공급에 치명적이었다. 막센티우스는 이 반란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310년 또는 311년에 자신의 프라이토리아니 파견대장인 루피우스 볼루시아누스(Rufius Volusianus)를 파견하여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도미티우스 알렉산데르를 처형했다. 이로써 아프리카의 곡물 공급이 다시 로마로 재개되었다.
 

5. 권력 다툼의 정점 : 아버지와의 갈등, 그리고 사두정치의 붕괴

 
막센티우스의 통치 초기에 협력했던 아버지 막시미아누스는 308년경 자신의 아들을 폐위시키려 시도했다. 막시미아누스는 로마에 있는 군인들을 모아 막센티우스를 비난했지만, 군인들은 막센티우스에게 충성을 유지했다. 결국 막시미아누스는 실패를 인정하고 아들의 사위이자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로 도피해야 했다. 이 사건은 막센티우스가 아버지의 권위를 능가하는 독립적인 권력 기반을 구축했음을 보여주었다.
 
막시미아누스는 310년에 사망했고, 이로써 막센티우스는 서방에서 자신에게 도전할 만한 가장 큰 내부 세력 하나를 제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두정치 체제는 계속해서 붕괴하고 있었고, 서방에는 콘스탄티누스 1, 동방에는 갈레리우스와 막시미누스 다이아(Maximinus Daza), 그리고 새롭게 아우구스투스가 된 리키니우스(Licinius) 등 여러 황제들이 각자의 패권을 주장하며 긴장이 고조되었다. 막센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의 동맹에 맞서기 위해 동방의 막시미누스 다이아와 동맹을 모색하는 등 복잡한 외교전을 펼치기도 했다.
 

6. 콘스탄티누스와의 최후 대결 : 밀비우스 다리 전투와 비극적인 종말

 
아버지 막시미아누스의 죽음 이후, 막센티우스와 콘스탄티누스 1세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312, 콘스탄티누스 1세는 막센티우스가 이탈리아의 민심을 잃고 폭정(나중에 콘스탄티누스 측이 선전한 내용)을 펼친다는 명분을 내세워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막센티우스는 로마의 강력한 성벽 뒤에 숨어 콘스탄티누스의 병력이 보급 문제에 시달리게 하는 전략을 선호했다. 이는 과거 갈레리우스의 침공을 막았던 성공적인 전략이기도 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는 3121028일 로마 성벽 밖, 밀비우스 다리(Milvian Bridge) 근처에서 콘스탄티누스와 정면으로 맞붙는 결정을 내렸다. 이날은 그의 황제 즉위 6주년 기념일(dies imperii)이기도 했다.
 
밀비우스 다리 전투는 로마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된다. 이 전투에서 막센티우스의 군대는 콘스탄티누스에게 처참하게 패배했다. 도주하던 막센티우스는 티베르 강(Tiber River)에 빠져 익사했다. 그의 시신은 다음 날 발견되어 머리가 잘린 채 로마 시내에 전시되었고, 이후 아프리카로 보내져 그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이 승리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서방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고,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주류 종교로 발돋움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마련되었다.
 

7. 막센티우스의 유산과 재평가 : 논란의 황제

 
막센티우스는 오랜 세월 동안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폭군이자 독재자로 폄하되고 역사적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러나 최근의 역사 연구들은 그에 대한 일방적인 평가를 재고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로마에 대규모 공공사업을 추진하여 시민들의 환심을 사려 했으며, 아프리카의 곡물 공급을 재개하여 로마 시민들의 식량난을 해결하기도 했다. 특히 기독교 박해 문제에 있어서는, 갈레리우스나 막시미누스 다이아와 달리 자신의 통치 영역 내에서 기독교인들에게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 그는 교황 에우세비우스(Pope Eusebius)의 선출을 허용하는 등 기독교에 대한 직접적인 탄압보다는 포용적인 태도를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로마의 전통 종교적 권력은 큰 타격을 입었으며, 밀비우스 다리 전투는 콘스탄티누스 1세와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중심으로 나아가게 된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막센티우스는 결국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했거나, 운이 따르지 못하여 몰락한 비운의 황제였지만, 그가 로마의 마지막 이교도 황제로서 제국의 전환기에 남긴 발자취는 재조명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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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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