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73~63]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 동방의 거인을 쓰러뜨린 로마의 대전략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은 기원전 73년부터 63년까지 10년간 로마 공화국(Roman Republic)과 폰투스 왕국(Kingdom of Pontus)의 미트리다테스 6세 에우파토르(Mithridates VI Eupator, 기원전 135년-기원전 63년) 사이에 벌어진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규모 군사적 충돌이다. '미트리다테스 전쟁(Mithridatic Wars)'으로 불리는 이 세 차례의 대결 중 가장 길고 격렬했던 이 전쟁은 소아시아(Asia Minor), 아르메니아(Armenia), 그리고 중동 지역을 무대로 로마의 동방 패권을 확고히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이 전쟁은 로마 공화정 말기,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키운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Lucius Licinius Lucullus)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Pompey Magnus)라는 두 명의 걸출한 로마 장군들의 활약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무대이기도 했다. 이 전쟁은 동방의 마지막 헬레니즘 강자이자 로마에 대한 끈질긴 저항의 상징이었던 미트리다테스의 몰락과 함께, 로마가 명실상부한 지중해 전체의 유일한 지배자로 자리매김하는 대전환점이었다.
![]() |
폰투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 왕의 주화 |
1. 전쟁의 배경 : 불완전한 평화와 미트리다테스의 야망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은 이전의 두 전쟁이 남긴 불완전한 평화의 결과였다.
1) 미트리다테스의 재기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기원전 89-85년)에서 로마는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기원전 138년-기원전 78년)의 지휘 아래 미트리다테스 6세(Mithridates VI Eupator)의 군대를 격파하고 소아시아와 그리스에서 그를 몰아냈다. 그러나 당시 로마 본토의 급박한 내전 상황 때문에 술라는 미트리다테스와 다르다노스 조약(Treaty of Dardanos)이라는 비교적 관대한 평화 조약을 맺어야 했다. 이 조약은 미트리다테스의 왕위를 유지시키고, 그에게 군사력을 재건할 기회를 주었다. 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기원전 83-81년)은 로마 장군 무레나(Lucius Licinius Murena)의 독단적인 도발로 발생했으나, 이 역시 미트리다테스의 승리로 끝났고, 이는 미트리다테스의 군사적 역량과 끈질긴 저항 의지를 다시 한번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두 전쟁을 겪으면서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VI Eupator)는 로마의 동방 착취와 그로 인한 지역 주민들의 반로마 감정을 이용하며 세력을 더욱 키웠다. 그는 폰투스 왕국을 중심으로 아나톨리아(Anatolia) 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강력한 헬레니즘 제국을 건설하고, 이를 통해 동방의 강자로서 로마에 대항하려는 야망을 버리지 않았다.
2) 로마의 비티니아 계승과 즉각적인 전쟁의 도발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직접적인 발단은 기원전 74년, 로마의 오랜 동맹국이었던 비티니아 왕국의 니코메데스 4세(Nicomedes IV of Bithynia)가 자식이 없이 사망하면서 자신의 왕국을 로마 공화국에 유증한 사건이었다. 로마는 이 유증을 받아들여 비티니아를 속주로 편입하려 했다. 이는 미트리다테스의 폰투스와 국경을 맞닿게 되었으며, 그의 확장 정책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다. 미트리다테스는 로마의 이러한 행동을 로마의 패권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자 동방에서의 자신의 영향력에 대한 직접적인 침해로 간주하고 즉각적으로 비티니아를 침공했다. 이로써 세 번째이자 마지막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시작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서부 지중해에서는 로마의 오랜 숙적이었던 술라의 동료 세르토리우스(Quintus Sertorius)가 히스파니아(Hispania)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로마에 대항하고 있었다. 미트리다테스는 세르토리우스와 동맹을 맺고 로마를 동서로 압박하려는 대규모 전략을 구사했다.
2. 루쿨루스의 지휘 : 천재적인 전략가의 고독한 분투
미트리다테스의 비티니아 침공에 로마는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당시 로마 원로원은 당시 최고의 장군 폼페이우스 마그누스(Pompey Magnus)가 히스파니아에서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을 진압 중이었기 때문에, 두 명의 집정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Lucius Licinius Lucullus, 기원전 118년-기원전 57년)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Marcus Aurelius Cotta, 기원전 74년 집정관)를 파견했다.
1) 초기 로마군의 좌절
로마군의 초기 계획은 코타가 미트리다테스의 함대를 견제하는 동안, 루쿨루스가 육군을 이끌고 폰투스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트리다테스는 로마군의 예상을 뛰어넘는 과감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는 신속한 기동으로 비티니아를 침공하여 킬케돈 전투(Battle of Chalcedon)에서 코타(Marcus Aurelius Cotta)의 로마군을 격파하고 64척의 로마 함선을 나포하거나 파괴하는 등 큰 피해를 입혔다. 코타는 킬케돈 성안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미트리다테스는 여세를 몰아 비티니아의 주요 도시인 니카이아(Nicaea), 람프사쿠스(Lampsacus), 니코메디아(Nicomedia) 등을 연이어 점령했고, 로마의 동맹 도시 키지쿠스(Cyzicus)를 포위했다.
2) 키지쿠스 공방전과 루쿨루스의 반격(기원전 73년)
키지쿠스는 로마에 대한 충성심을 잃지 않고 끈질기게 버텼다. 미트리다테스는 이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공성전을 펼쳤다. 이때 루쿨루스(Lucius Licinius Lucullus)가 그의 군대를 이끌고 키지쿠스로 진격했다. 루쿨루스는 놀라운 기동력과 지략으로 미트리다테스의 대규모 공성군을 역으로 포위했다. 그는 미트리다테스 군대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끊임없이 게릴라식 공격을 감행하여 폰투스군을 지치게 만들었다. 결국 미트리다테스 군대는 식량 부족과 질병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많은 병력을 잃은 채 키지쿠스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키지쿠스 공방전은 미트리다테스의 가장 큰 군사적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된다.
3) 폰투스 침공과 결정적인 승리(기원전 72-71년)
키지쿠스에서의 승리 이후, 루쿨루스(Lucullus)는 주도권을 잡고 미트리다테스를 맹렬히 추격했다. 그는 미트리다테스의 본거지인 폰투스로 진격했다. 루쿨루스는 폰투스 해안에서 미트리다테스의 해군을 격파하며 해상 주도권을 장악했다. 육상에서도 그는 미트리다테스의 군대를 연이어 격파했다.
카비라 전투(Battle of Cabira, 기원전 72년) : 루쿨루스(Lucullus)는 카비라(Cabira)에서 미트리다테스의 남은 군대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미트리다테스는 전투에서 패배한 후 그의 모든 소지품을 버리고 동맹이자 사위인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Tigranes II of Armenia, 기원전 140년경-기원전 55년)에게로 도피했다. 이로써 폰투스 왕국은 사실상 로마의 수중에 들어왔다.
3. 아르메니아 원정과 루쿨루스의 좌절
폰투스를 정복한 후, 루쿨루스(Lucullus)는 미트리다테스를 최종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그의 사위인 티그라네스 2세(Tigranes II of Armenia)가 통치하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1) 티그라네스 대왕과의 대결
티그라네스 2세(Tigranes II of Armenia)는 당시 동방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대왕(the Great)'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있었다. 티그라네스는 미트리다테스를 숨겨주면서 로마의 요구를 거부했다.
- 티그라노케르타 전투(Battle of Tigranocerta, 기원전 69년) : 루쿨루스(Lucullus)는 티그라네스에게 미트리다테스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지만 거부당하자, 과감하게 아르메니아를 침공했다. 티그라네스는 자신의 새로운 수도 티그라노케르타(Tigranocerta) 근처에서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가진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로마군과 맞섰다. 그러나 루쿨루스는 자신의 정예 로마군단과 탁월한 지략으로 티그라네스의 군대를 대파했다. 티그라노케르타는 함락되고 로마군에 의해 약탈당했다. 이 승리는 루쿨루스의 군사적 천재성을 다시 한번 입증한 사건이었다.
- 아르탁사타 전투와 병사들의 불만(기원전 68년) : 티그라네스(Tigranes II of Armenia)는 병력을 재규합하여 아르탁사타(Artaxata)에서 루쿨루스(Lucullus)와 다시 맞붙었다. 루쿨루스는 이 전투에서도 승리했지만, 그의 병사들은 아르메니아의 추운 날씨와 길고 힘든 원정, 그리고 약탈물의 부족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그들은 루쿨루스의 지휘에 불복종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루쿨루스는 지휘권을 잃고 로마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2) 미트리다테스의 재도전
루쿨루스(Lucullus)의 철수와 로마군의 불복종을 틈타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VI Eupator)는 다시 세력을 재건했다. 그는 폰투스로 돌아와 로마의 약화된 병력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잃었던 영토의 상당 부분을 수복했다. 루쿨루스의 거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4. 폼페이우스의 등장 : 동방의 최종 정리
루쿨루스(Lucullus)가 병사들의 반란으로 지휘권을 잃고 로마로 돌아가자, 로마는 동방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인물을 필요로 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당대 로마의 가장 인기 있는 장군이었던 폼페이우스 마그누스(Pompey Magnus)였다.
1) 폼페이우스의 권한 확대
폼페이우스(Pompey Magnus)는 이미 히스파니아에서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지중해 전역에서 해적 소탕 작전(Lex Gabinia)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대중과 원로원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기원전 66년, 트리부누스 플레비스(tribunus plebis) 마니우스 마닐리우스(Manius Manilius)는 이른바 '렉스 마닐리아(Lex Manilia)'라는 법안을 통해 폼페이우스(Pompey Magnus)에게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총지휘권을 포함한 동방의 모든 군사적, 정치적 권한을 부여했다. 이는 공화정 역사상 전례 없는 대규모 권한 이양이었다.
2) 리쿠스 전투와 미트리다테스의 도주(기원전 66년)
폼페이우스(Pompey Magnus)는 루쿨루스(Lucullus)로부터 지휘권을 인계받은 후, 즉시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VI Eupator)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폼페이우스는 미트리다테스를 폰투스의 리쿠스 강(Lycus River) 근처로 몰아넣었다. 리쿠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는 미트리다테스의 군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미트리다테스는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번에는 코키스(Colchis)를 거쳐 흑해 북안의 보스포로스 왕국(Bosporan Kingdom)으로 도주했다. 그는 그곳에서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여 이탈리아를 침공하려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3) 폼페이우스의 동방 정리
폼페이우스(Pompey Magnus)는 미트리다테스를 추격하는 대신, 동방 지역에 대한 로마의 지배력을 확고히 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아르메니아로 진격하여 티그라네스 2세(Tigranes II of Armenia)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그를 로마의 종속왕으로 만들었다. 또한 알바니아(Albania)와 이베리아(Iberia)의 왕들을 격파하여 로마에 복종시켰다. 폼페이우스는 광대한 시리아(Syria)를 로마의 새로운 속주로 편입시키고,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등 유대 지역을 로마의 클라이언트 국가로 만들었다. 그의 동방 정리는 로마의 지배를 아나톨리아, 레반트(Levant),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북부까지 확장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5. 미트리다테스의 최후와 전쟁의 종결
보스포로스 왕국으로 도주한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VI Eupator)는 폼페이우스(Pompey Magnus)의 로마군에 맞서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조직하려 했다. 그는 다뉴브 강을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으나, 오랜 전쟁에 지친 그의 병사들은 계속되는 전쟁에 염증을 느꼈다.
미트리다테스의 자살 : 결국 그의 아들 파르나케스 2세(Pharnaces II of Pontus)가 주도하는 병사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파르나케스(Pharnaces II of Pontus)는 폼페이우스와 평화 협상을 원했다. 궁지에 몰린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VI Eupator)는 기원전 63년, 스스로 독을 마시고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는 독약에 면역이 되어 죽지 않자, 갈리아 용병에게 자신을 칼로 찔러 죽이라고 명령하며 폰투스의 위대한 왕이자 로마의 끈질긴 적이었던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6. 전쟁의 여파와 역사적 의의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은 고대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인 충돌이었다.
- 로마의 동방 패권 완성 : 미트리다테스의 죽음과 폼페이우스의 동방 정리는 로마가 명실상부한 지중해 전체의 유일한 지배자로 확고히 자리매김했음을 의미한다. 폰투스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고, 시리아는 셀레우코스 제국을 대체하여 로마 속주로 편입되었다. 아르메니아는 로마의 중요한 클라이언트 국가가 되었다.
- 로마 공화정 말기의 격동 : 이 전쟁은 루쿨루스(Lucullus)와 폼페이우스(Pompey)라는 두 명의 걸출한 장군을 로마 정치의 중심에 세웠다. 그들의 성공은 로마 군사 지도자들의 개인적 권력이 증대되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 군대가 동원되는 새로운 경향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훗날 로마 공화정의 붕괴를 가속화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특히 폼페이우스는 이 전쟁을 통해 로마 역사상 가장 강력한 개인 권력을 손에 넣게 되었다.
- 지중해 세계의 재편 : 이 전쟁은 헬레니즘 시대의 마지막 남은 독립 왕국인 폰투스의 종말을 가져왔으며, 동방 세계가 로마의 직접적인 통치와 영향력 아래로 들어오는 전환점이 되었다.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은 로마의 강력한 군사적 우위, 탁월한 지략, 그리고 때로는 무자비한 정책이 어우러져 로마 제국의 기틀을 다진 역사적인 사건으로 남아있다. 이 전쟁은 미트리다테스라는 위대한 적의 몰락과 함께,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을 완전하게 장악하고 제국의 시대로 나아가는 대장정을 마무리 지었다.
=-=-=-=-=-=-=-=-=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