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29일 금요일

[고대 근동] 이신 제2왕조의 바빌론 통치 : 기원전 1153년~ 1022년

[고대 근동] 이신 제2왕조의 바빌론 통치 : 기원전 1153~ 1022

 

1. 폐허 속에서 피어난 희망 : 이신 제2왕조의 탄생 배경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론은 한때 강력했던 카시트 왕조(Kassite dynasty)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12세기 중반, 동쪽의 강력한 엘람(Elam)이 들이닥치면서 그들의 오랜 통치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엘람의 왕 슈트룩-나훈테(Shutruk-Nahhunte, 재위 기원전 11851155)는 바빌론을 침공하여 도시를 약탈하고, 카시트 왕조의 마지막 왕 엔릴-나딘-아헤(Enlil-nadin-ahhe, 재위 기원전 1157-1155)를 무너뜨렸다. 수메르-아카드 문명의 상징과도 같았던 함무라비 법전(Code of Hammurabi) 석비마저 약탈당해 엘람의 수도 수사(Susa)로 끌려가는 등, 바빌론은 최악의 암흑기를 맞이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바빌론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폐허 속에서 새로운 희망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으니, 바로 이신 제2왕조였다. 이 왕조는 약탈당하고 쇠락한 바빌론을 재건하고, 엘람의 압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빌로니아인들의 열망 속에서 태어났다. 이름이 '이신 제2왕조'인 것은 고대 수메르 시대의 도시 이신(Isin)과 관련이 있지만, 실제로는 직접적인 혈통적, 지리적 연관성보다는 재건과 재활의 상징적 의미가 강했다. 고대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의지가 담긴 이름이라고 할 수 있지.
 

2. 마르둑-카비트-아헤슈(Marduk-kabit-ahheshu) : 새로운 시대의 개척자

 
2 이신 왕조의 창건자는 마르둑-카비트-아헤슈(Marduk-kabit-ahheshu, 재위 기원전 11531136)였다. 그는 엘람의 지배를 받는 혼란스러운 바빌로니아 상황에서 왕권을 잡았다. 그의 통치 초기에는 아직 엘람의 군사적 압력이 강했기 때문에, 그는 신중하게 세력을 확장하고 내부 질서를 다지는 데 집중했다.
 
마르둑-카비트-아헤슈는 바빌론의 주요 신인 마르둑(Marduk) 신앙을 강화하고, 파괴된 신전들을 복구하며 종교적, 정신적 안정을 꾀했다. 이는 카시트 왕조 말기에 잠시 약화되었던 마르둑 신의 위상을 다시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 왕조는 처음부터 마르둑 신의 가호를 받는다는 정통성을 내세웠고, 이는 이후 바빌로니아 재건의 핵심 동력이 되었다. 그는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바빌로니아의 독립성을 유지하려는 기반을 마련했으며, 아시리아(Assyria)와 엘람 사이의 세력 균형을 이용해 자국의 안정화를 꾀하기도 했다. 비록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엘람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했지만, 바빌론을 다시 한번 자주적인 국가의 면모로 되돌리는 초석을 놓았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다.
 

3. 네부카드네자르 1(Nebuchadrezzar I) : 바빌론의 영광을 되찾다

 
이신 제2왕조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단연 네부카드네자르 1(Nebuchadrezzar I, 재위 기원전 1119년경1098년경)의 통치기였다. 그는 바빌론을 엘람의 압제에서 완전히 해방시킨 영웅이자, 바빌로니아의 군사적, 문화적 부흥을 이끈 위대한 군주로 기억된다.
 
네부카드네자르 1세의 가장 큰 업적은 엘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바빌론의 수호신 마르둑의 신상을 되찾아온 것이다. 이 신상은 약 30여 년 전 엘람의 침략 때 약탈당했던 바빌론의 정신적 상징이었다. 그는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엘람을 공격했고,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하여 마침내 마르둑 신상을 바빌론으로 다시 모셔왔다. 이 사건은 바빌로니아인들에게 엄청난 자부심과 민족적 결속력을 안겨주었다. 마르둑 신상 환수는 단순히 종교적 의미를 넘어, 바빌론이 다시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회복했음을 전 세계에 알리는 선언과도 같았다.
 
그는 또한 아시리아와도 갈등을 겪었다. 당시 아시리아는 티글라트-필레세르 1(Tiglath-Pileser I, 재위 기원전 11141076)의 통치 아래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강력한 패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네부카드네자르 1세는 북쪽의 위협에 맞서 바빌론의 국경을 수호하며 견제했다.
 
군사적 업적 외에도, 네부카드네자르 1세는 바빌로니아 문화와 종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마르둑 신의 지위를 최고 신으로 격상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는 바빌로니아의 국가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바빌로니아 창조 신화인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가 그의 통치기에 최종적으로 집대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서사시는 마르둑이 다른 신들을 물리치고 천지를 창조하며 바빌론과 인간을 만든 과정을 장엄하게 묘사하고 있어, 마르둑 신앙의 중요성을 드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신년 축제(아키투 축제, Akitu festival)를 성대하게 부활시켜 바빌론의 종교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더욱 공고히 했다.
 

4. 이신 제2왕조의 통치자들


이름재위비고
마르둑-카빗-아헤슈
Marduk-kabit-ahheshu
c.1153~c.1136 BC불분명한 계승
이띠-마르둑-발라투
Itti-Marduk-balatu
c.1135~c.1128 BC마르둑-카빗-아헤슈(Marduk-kabit-ahheshu)의 아들
니누르타-나딘-슈미
Ninurta-nadin-shumi
c.1127~c.1122 BC이띠-마르둑-발라투(Itti-Marduk-balatu)의 친척(?)
네부카드네자르 1세
Nebuchadnezzar I
c.1121~c.1100 BC니누르타-나딘-슈미(Ninurta-nadin-shumi)의 아들
엔릴-나딘-아플리
Enlil-nadin-apli
c.1099~c.1096 BC네부카드네자르 1세(Nebuchadnezzar I)의 아들
마르둑-나딘-아헤
Marduk-nadin-ahhe
c.1095~c.1078 BC니누르다-나딘-슈미(Ninurta-nadin-shumi)의 아들, 엔릴-나딘-아플리(Enlil-nadin-apli)로부터 왕위를 찬탈함
마르둑-샤픽-제리
Marduk-shapik-zeri
c.1077~c.1065 BC마르둑-나딘-아헤(Marduk-nadin-ahhe)의 아들(?)
아다드-아플라-이딘나
Adad-apla-iddina
c.1064~c.1043 BC왕위를 찬탈한 자, 이전 왕들과는 무관함
마르둑-아헤-에리바
Marduk-ahhe-eriba
c.1042~c.1042 BC불분명한 계승
마르둑-제르-X
Marduk-zer-X
c.1041~c.1030 BC불분명한 계승
나부-슘-리부르
Nabu-shum-libur
c.1029~c.1022 BC불분명한 계승
 

5. 행정과 문화의 연속성 : 바빌론의 재생

 
이신 제2왕조의 왕들은 카시트 왕조 시대에 확립된 행정 시스템을 대부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쿠두루(kudurru)와 같은 토지 소유권 문서 발행은 여전히 활발했고, 이를 통해 경제 활동과 사회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왕들은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농업 생산성을 증진시키기 위해 관개 시설을 보수하는 등 내치에도 힘썼다.
 
문화적으로도 바빌로니아의 전통을 이어받아 문학, 예술, 종교 활동이 활발했다. 아카드어가 공식 언어로 사용되었고, 기존의 길가메시 서사시(Epic of Gilgamesh)와 같은 문학 작품들이 필사되고 보존되었다. 마르둑 신전인 에-사가일라(Esagila)와 바벨탑의 모델이 된 에테멘앙키(Etemenanki) 지구라트 등 바빌론의 주요 건축물들이 이 시기에 재건되거나 확장되었다. 이는 바빌론이 단순히 정치적 중심지를 넘어, 고대 근동의 중요한 문화적, 종교적 허브로서의 명성을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이 시기에는 바빌론을 중심으로 한 마르둑 신의 절대적 지위가 더욱 확고해졌다. 이는 기존의 수메르-아카드 신들 체계에서 마르둑이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으로, 바빌로니아 문명이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신학적 체계를 확립해나가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6. 아람족과 수투족의 압박 : 쇠퇴의 시작

 
네부카드네자르 1세 이후, 이신 제2왕조는 잠시 안정을 누리는 듯 보였으나, 점차 외부 세력의 압박과 내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가장 큰 위협 중 하나는 북쪽과 서쪽에서 끊임없이 유입되는 아람족(Arameans)과 수투족(Sutu)과 같은 유목민 집단이었다. 이들은 비옥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정착하고자 했고, 이는 바빌로니아의 국경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특히 기원전 11세기 후반부터 아람족의 침투가 심화되면서, 바빌로니아 영토 내에 아람족 집단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통치자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공동체를 형성했고, 이는 중앙 정부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아람족의 압력은 교역로를 위협하고 농업 생산량을 감소시켰으며, 전반적인 사회 혼란을 가중시켰다.
 
아시리아 또한 다시금 강력한 힘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바빌론에 대한 위협이 커졌다. 약해진 이신 제2왕조는 이러한 동시다발적인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군사력이 점차 약해지고 내부의 정치적 불안정이 심화되면서 왕조의 힘은 서서히 기울어갔다.
 

7. 침묵 속으로 : 이신 제2왕조의 종말과 바빌론 암흑기

 
결국 이신 제2왕조는 기원전 1022년을 끝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명확한 종말의 기록은 부족하지만, 지속적인 유목민의 침투와 아시리아의 위협, 그리고 내부의 약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왕조는 소멸한 것으로 추정된다. 왕조가 무너진 후 바빌론은 다시 한번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이 시기를 '바빌론 암흑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약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메소포타미아의 역사 기록이 현저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중앙집권적이고 강력한 왕조의 부재로 인해 기록이 제대로 보존되지 못했거나, 아예 혼란으로 인해 작성 자체가 어려웠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암흑기는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덮쳤고, 이는 고대 근동 역사에서 매우 불안정하고 격동적인 시기였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이신 제2왕조가 남긴 유산은 결코 작지 않다. 그들은 엘람에 의해 약탈당한 바빌론의 영광을 되찾았고, 특히 네부카드네자르 1세와 같은 강력한 왕을 통해 바빌로니아의 정체성을 재확립했다. 마르둑 신앙의 확립과 에누마 엘리쉬의 집대성 등은 이후 바빌로니아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이 바빌론의 불씨를 지켜냈기에, 훗날 신아시리아 제국(Neo-Assyrian Empire)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바빌론은 독립적인 문화적, 종교적 중심지로서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고, 궁극적으로 신바빌로니아 제국(Neo-Babylonian Empire)이라는 최후의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이신 제2왕조는 암흑 속에서 바빌론을 지탱한 중요한 디딤돌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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