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근동] 카시트 왕조(Kassite dynasty) : 기원전 1595년 ~ 1155년
1. 카시트 왕조 : 수수께끼의 시작과 바빌론의 새로운 지배자들
카시트 왕조(Kassite dynasty)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들은 약 4세기 이상 바빌론을 통치하며 중기 바빌로니아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주로 자그로스 산맥(Zagros Mountains) 지역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며, 바빌론의 제1 바빌론 왕조(First Babylonian Dynasty)가 히타이트족(Hittites)의 약탈과 함께 몰락한 혼란의 시기에 등장했다. 기원전 1595년 히타이트족이 바빌론을 약탈하고 물러나자, 카시트족은 남부 메소포타미아로 진출하여 빠르게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바빌론 서남쪽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고, 점차 바빌론 자체의 통치권을 확보하게 된다. 특히 울람부리아쉬(Ulam-Buriash) 왕 때 이르러 남쪽의 해양 왕국(Sealand Dynasty)을 정복하며 바빌로니아 전역에 걸쳐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들의 통치 기간은 혼란스러웠던 이전 시대와 달리 상대적으로 안정과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2. 안정과 재건의 시대 : 카시트 왕조의 바빌론 통치
카시트 왕조는 이전 아카드 제국(Akkadian Empire)이나 우르 제3 왕조(Ur III Dynasty)처럼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지는 못했지만, 바빌로니아 내부의 질서를 재건하고 장기간의 안정화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은 바빌론의 기존 종교 및 행정 체계를 존중하고 통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메소포타미아 문화에 동화되면서 스스로를 '바빌론의 왕'으로 칭하며 정통성을 강조했고, 이는 바빌론 시민들에게도 받아들여졌다.
이 시기에는 특히 '쿠두루(kudurru)'라고 불리는 경계석이 중요한 역사적 유물로 남아있다. 쿠두루는 토지 소유권이나 면세 특권을 기록한 돌기둥으로, 신성한 상징과 왕의 저주 문구가 새겨져 있어 왕실과 신전, 그리고 개인 사이의 복잡한 사회경제적 관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카시트 왕들은 메소포타미아 전통에 따라 신전을 재건하고 새로운 신전을 세우는 등 종교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3. 주요 군주들과 카시트 왕조의 황금기
카시트 왕조의 통치 기간은 여러 중요한 군주들에 의해 그 특징이 나타난다.
- 아굼 2세(Agum II, 기원전 16세기 말) : 그는 카시트 왕조의 실질적인 창시자로 여겨지며, 히타이트족에게 약탈당했던 마르둑(Marduk) 신상을 바빌론으로 되찾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종교적 정통성을 확보하고 바빌론의 상징성을 회복하는 데 큰 의미가 있었다. 그의 통치 아래 카시트족은 바빌론의 완전한 주권을 확립했다.
- 쿠리갈주 1세(Kurigalzu I, 기원전 1400년경) : 그의 통치 기간은 카시트 왕조의 전성기로 평가된다. 그는 수도를 바빌론에서 페르시아만(Persian Gulf) 근처의 두르-쿠리갈주(Dur-Kurigalzu)로 옮겨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다. 이곳에는 거대한 지구라트(ziggurat)와 궁전이 세워졌고, 이 유적들은 카시트 예술과 건축의 정수를 보여준다. 쿠리갈주 1세는 엘람(Elam)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고, 이집트(Egypt)와의 서신 교환을 통해 국제적 위상을 높이기도 했다.
- 카다쉬만-엔릴 1세(Kadashman-Enlil I, 기원전 1374년경~1360년경) : 아르마나 서신(Amarna letters)에 따르면, 그는 이집트의 아멘호텝 3세(Amenhotep III, BC 1402/1390-1353/1352)와 활발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상업 교류와 선물 교환을 통해 평화로운 공존을 추구했다.
- 부르나-부리아쉬 2세(Burna-Buriash II, 기원전 1359년경~1333년경) : 이집트의 아멘호텝 4세(Amenhotep IV/Akhenaten, BC 1353/1351-1336/1334)와도 활발하게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강대국으로서의 바빌론의 위상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아시리아(Assyria)의 부상에 대한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4. 카시트 왕조의 역대 군주들 목록
5. 카시트 문화와 행정 : 바빌로니아의 재탄생
카시트족은 자신들의 언어(Kassite language)를 사용했지만, 바빌로니아에 정착한 후에는 아카드어(Akkadian language)를 주로 사용하고 바빌로니아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들은 이전 바빌로니아의 행정 및 법률 체계를 유지하고 발전시켰다. 토지 분배 시스템을 정비하고, 세금 징수 방식도 개선하여 경제적 안정을 도모했다.
건축 분야에서는 두르-쿠리갈주와 같은 새로운 도시 건설뿐만 아니라 기존 신전의 보수에도 힘썼다. 예술적으로는 원통형 인장(cylinder seal) 제작에서 독특한 양식을 선보였다. 이 시기의 인장들은 신들과 영웅, 동물 문양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그들의 종교적 신념과 일상생활의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또한, 문학적으로도 길가메시 서사시(Epic of Gilgamesh)와 같은 기존의 서사시들을 정리하고 보존하는 데 기여했다.
6. 국제 관계와 쇠퇴의 그림자
카시트 왕조는 전성기 동안 이집트, 히타이트, 아시리아, 엘람 등 주변 강대국들과 활발한 외교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아르마나 서신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집트와의 결혼 동맹 및 선물 외교는 당시 근동 지역 국제 관계의 주요 특징이었다. 그러나 북쪽에서 아시리아가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고 동쪽의 엘람 또한 호시탐탐 바빌로니아를 노리면서 카시트 왕조의 안보 환경은 점차 불안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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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3세기경 카시트 왕조 아래의 바빌로니아 제국 |
기원전 13세기에는 아시리아의 왕 투쿨티-닌우르타 1세(Tukulti-Ninurta I, BC 1243-1207)가 바빌론을 침공하여 카시트 왕 카쉬틸리아쉬 4세(Kashtiliash IV, 생몰년 미상)를 폐위시키고 한동안 바빌론을 지배하기도 했다. 비록 아시리아의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이는 카시트 왕조의 약화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결정적인 몰락은 기원전 12세기 중반 엘람에 의해 찾아왔다. 엘람의 왕 슈트룩-나훈테(Shutruk-Nahhunte, BC 1185–1155)는 바빌론을 침공하여 카시트 왕조의 마지막 왕인 엔릴-나딘-아헤(Enlil-nadin-ahhe, BC. 1157~1155)를 무너뜨렸다. 엘람족은 수메르와 아카드 시대부터 이어져 온 수많은 보물과 예술품, 역사적 기록들을 약탈하여 엘람의 수도인 수사(Susa)로 가져갔다. 여기에는 함무라비 법전(Code of Hammurabi)이 새겨진 석비도 포함되어 있었다.
7. 카시트 왕조의 유산과 역사적 의미
카시트 왕조의 종말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역사의 한 시대를 마감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들의 통치가 다른 위대한 제국들처럼 광범위한 정복 활동으로 특징지어지지는 않았지만, 바빌론의 멸망 이후 4세기 이상이라는 장기간 동안 바빌로니아 지역의 정치적, 문화적 안정과 연속성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들은 바빌로니아의 기존 질서를 존중하고 그들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립했다. 새로운 수도 두르-쿠리갈주의 건설, 쿠두루와 같은 독특한 예술 형식의 발전, 그리고 주변 강대국들과의 복잡한 외교 관계 유지는 카시트 왕조의 독자적인 특징을 잘 보여준다. 비록 엘람의 침략으로 그들의 유물 중 많은 부분이 약탈되었지만, 이들의 통치 없이는 이후의 신바빌로니아 제국(Neo-Babylonian Empire)과 같은 바빌론 문명의 부흥도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카시트 왕조는 바빌로니아 문명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질 수 있도록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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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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