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5일 금요일

바실리스쿠스(Basiliscus, AD.?~476/477) : 동로마 제국 제58대 황제(AD.475~476)

바실리스쿠스(Basiliscus, AD.?~476/477) : 동로마 제국 제58대 황제(AD.475~476)

 
  • 바실리스쿠스(Basiliscus)
  • Ancient Greek : Βασιλίσκος, Basilískos
  • 출생 : 미상
  • 사망 : 기원후 476/477 / 림나이(Limnae)
  • 배우자 : 제노이스(Zenonis)
  • 자녀 : 마르쿠스(Marcus)
  • 재위 : 기원후 47519~ 4768
  • 즉위식 ; 기원후 475112
 
바실리스쿠스(Basiliscus, AD.?~476/477) : 동로마 제국 제58대 황제(AD.475~476)
바실리스쿠스(Basiliscus, AD.?~476/477) : 동로마 제국 제58대 황제(AD.475~476)

5세기 로마의 폭풍 속 황제 : 바실리스쿠스의 파란만장한 치세 (475-476)

 
5세기 후반의 로마 제국은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배와 같았다. 끊임없는 내부 권력 투쟁과 외부 게르만족의 압력은 제국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이처럼 격동의 시기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올라 불과 20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통치했던 인물이 바로 바실리스쿠스(Basiliscus, 425476)이다. 그의 치세는 제논(Zeno, 425491)의 황위 상실과 복귀, 그리고 5세기 로마 제국의 복잡한 정치, 군사, 종교적 갈등이 얽히고설킨 혼돈의 축소판이었다. 한때 제국을 뒤흔든 대규모 원정을 이끌었던 그는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1. 바실리스쿠스의 배경 : 황실과의 긴밀한 연결고리

 
바실리스쿠스는 5세기 중반, 발칸반도 지역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가문은 비록 명문 귀족은 아니었으나, 동로마 제국 황실과의 긴밀한 연결고리를 통해 권력의 중심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는 당시 동로마 제국의 실권자이자 강력한 황후였던 베리나(Verina, ?484)의 친동생이었다. 베리나는 레오 1(Leo I, 401474) 황제의 아내였으므로, 바실리스쿠스는 황제의 처남이자 제국의 유력 인사였다.
 
그는 제노니스(Zenonis)와 결혼하여 아들 마르쿠스(Marcus)를 두었다. 제노니스의 출신 배경은 불분명하나, 일부 사료에서는 그녀를 단성론(Miaphysite) 지지자로 묘사하며, 훗날 바실리스쿠스의 종교 정책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한 바실리스쿠스는 레오 1세의 뒤를 이은 황제 제논의 사위 안테미우스(Anthemius, 420472)와도 혈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심지어 일부 역사가들은 그의 조카가 서로마를 무너뜨린 오도아케르(Odoacer, 433493)와 관련이 있다는 가설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이는 단편적인 사료에 기반한 주장이라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처럼 바실리스쿠스는 당시 동로마 제국 황실과 주요 정치 세력에 깊숙이 연루된 인물이었다.
 

2. 군사적 경력 : 대실패로 기록된 반달족 원정 (468)

 
바실리스쿠스의 초기 경력은 주로 군사 부문에서 쌓아졌다. 그는 트라키아와 아프리카에서 군사 지휘관을 역임하며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로마 역사에 가장 크게 각인시킨 사건은 468, 레오 1세가 주도한 북아프리카 반달족(Vandals) 정벌 대규모 원정이었다.
 
반달족은 게이세리쿠스(Gaiseric, 389477) 왕의 지도 아래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고 455년 로마를 약탈하며 지중해 무역로를 위협하던 강력한 해상 강국이었다. 레오 1세는 이들을 뿌리 뽑기 위해 동로마와 서로마 제국의 전력을 총동원한 대규모 해군 원정을 계획했고, 그 지휘권을 바실리스쿠스에게 맡겼다. 당시 이 원정에는 약 1,113척의 선박과 10만 명 이상의 병력이 동원되었으며, 막대한 재정(64,000kg의 금)이 투입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원정은 바실리스쿠스의 무능하거나 혹은 의도적인 실수로 인해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그는 카르타고(Carthage) 근처에서 반달족의 기습 공격을 받았고, 적절한 대응에 실패하여 함대의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이 참패로 인해 로마 제국은 엄청난 인명과 물적 손실을 입었으며, 반달족의 위협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이 원정 실패는 바실리스쿠스의 군사적 명성을 크게 실추시켰고, 그는 황후 베리나의 도움 없이는 레오 1세의 분노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치명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황실 내에서의 그의 위상은 완전히 흔들리지 않았다. 이는 그가 황후의 동생이라는 강력한 배경과 여전히 영향력을 가진 군사적 실력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3. 제논의 폐위와 황위 찬탈 (475)

 
바실리스쿠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은 매우 복잡한 정치적 역학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474, 레오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외손자이자 제논의 어린 아들인 레오 2(Leo II, 467474)가 황제가 되었다. 곧이어 레오 2세는 자신의 아버지 제논을 공동 황제로 임명했으나, 그 해 말 레오 2세마저 요절하면서 제논이 동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었다.
 
제논은 이사우리아(Isauria) 출신이라는 점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원로원, 귀족, 그리고 도시 민중들에게 반감을 사고 있었다. 이들은 이사우리아인들을 야만인으로 경멸했고, 제논의 등장을 불편하게 여겼다. 이 불만을 파고든 것이 바로 바실리스쿠스와 그의 누나 베리나였다. 베리나는 사위인 제논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자신의 동생 바실리스쿠스를 황제로 옹립하고자 했다.
 
47519, 베리나의 지원을 받은 바실리스쿠스는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군부 내의 이사우리아인에 대한 반감, 그리고 백성들의 제논에 대한 불만을 등에 업고, 반란은 순식간에 성공했다. 제논은 자신의 고향인 이사우리아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고, 바실리스쿠스는 손쉽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악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아들 마르쿠스는 공동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선포되었다.
 

4. 바실리스쿠스의 불안한 치세 (475-476)

 
황제 자리에 오른 바실리스쿠스의 통치는 그러나 파란만장하고 불안정했다. 겉으로는 강력해 보였던 그의 권력은 내부적으로 많은 균열을 안고 있었다.
 

1) 종교 정책과 논쟁 : 단성론 옹호와 칼케돈 교도의 반발

 
바실리스쿠스의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그의 종교 정책이었다. 그는 당시 동로마 제국의 대다수 인구와 교회가 지지하던 정통 칼케돈 기독교(Chalcedonian Christianity) 교리에 반하는 단성론(Miaphysitism)’을 공개적으로 옹호했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divine)과 인성(human)이라는 두 가지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확립했는데, 단성론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었다고 주장하며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부정했다.
 
바실리스쿠스는 단성론을 국교로 선포하는 칙령인 회람서(Encyclical)’를 발표하며 알렉산드리아의 단성론 주교 티모테우스 아이루루스(Timothy Aelurus)를 지지했다. 그는 모든 주교들에게 이 칙령을 수용할 것을 명령했고, 칼케돈 공의회의 교리를 거부할 것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카키우스(Acacius, 사망 489)와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칼케돈 교리가 강한 곳이었고, 이 칙령은 시민들 사이에서 큰 혼란과 불만을 야기했다. 바실리스쿠스는 이러한 반발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으나, 이는 그를 더욱 고립시켰다.
 

2) 재정난과 측근들의 불만

 
반달족 원정의 막대한 재정 손실과 그의 무능한 행정 능력은 제국의 재정난을 더욱 심화시켰다. 바실리스쿠스는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고, 이는 민심을 잃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누나이자 권력의 원천이었던 베리나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베리나는 자신의 사위였던 제논의 지지자인 이사우리아 출신의 고위 장군 일루스(Illus)와 아르마투스(Armatus)를 숙청하려 했는데, 바실리스쿠스가 이를 주저하면서 베리나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더 나아가 바실리스쿠스는 일루스와 아르마투스 장군을 암살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이로 인해 군부 내 그의 지지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두 장군은 제논이 피신해 있던 이사우리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배신은 바실리스쿠스에게 치명타가 된다.
 

3) 아스파르 일족의 영향력

 
바실리스쿠스는 자신의 지지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레오 1세 시절 군부의 실세였던 아스파르(Aspar)의 일족을 회유하려 했다. 그러나 아스파르의 아들이자 당시 동고트족 용병대장이었던 테오도리쿠스 스트라본(Theodoric Strabo, ?481)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테오도리쿠스 스트라본은 레오 1세와 제논에게서 얻었던 특권을 바실리스쿠스로부터 보장받지 못했고, 이는 그의 반감을 샀다. 결과적으로 바실리스쿠스는 종교적으로, 그리고 군사적으로 자신을 지지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잃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5. 제논의 복귀와 바실리스쿠스의 비극적 최후 (476)

 
바실리스쿠스의 실책들은 제논에게 다시 황위를 되찾을 기회를 제공했다. 제논은 자신의 고향 이사우리아에서 힘을 기르고 있었고, 바실리스쿠스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이사우리아인 장군 일루스와 아르마투스를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일루스는 바실리스쿠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아 군대를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논과의 비밀스러운 협상 끝에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4768, 제논은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민중과 수도는 바실리스쿠스의 단성론 지지 정책과 가혹한 세금 정책에 지쳐 그에게서 등을 돌린 상태였다. 제논이 도시에 당도했을 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문은 저항 없이 열렸다. 바실리스쿠스는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했고, 신성한 성역인 하기아 소피아 성당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구걸했다.
 
제논은 바실리스쿠스와 그의 가족에게 피를 흘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그는 약속의 문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바실리스쿠스, 그의 아내 제노니스, 그리고 아들 마르쿠스를 갑파도키아(Cappadocia) 지방의 외딴 요새로 추방했다. 그곳에서 이들을 물도 식량도 없는 마른 우물 속에 가두어 결국 굶어 죽게 만들었다. 이로써 바실리스쿠스의 파란만장했던 황제로서의 삶은 막을 내렸다.
 

6. 바실리스쿠스의 유산과 로마 제국사에 미친 영향

 
바실리스쿠스의 치세는 불과 20개월에 불과했지만, 5세기 로마 제국의 혼란과 권력의 속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 정통성 없는 권력의 한계 : 그는 황실 혈통이 아닌 무력을 통해 황제 자리를 얻었고, 그의 통치는 지속적인 재정난과 종교적 갈등, 그리고 군부 내에서의 지지 상실로 점철되었다. 이는 황제 자리가 단순히 힘으로만 유지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예시가 되었다.
  • 종교적 분열의 심화 : 그의 단성론 옹호는 동로마 제국 내 칼케돈 교도들과의 갈등을 심화시켰고, 이는 이후 제국의 종교적 통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 서방 로마 제국의 운명 : 그의 재위 기간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476년을 포함한다. 그는 로마를 재건할 기회가 있었던 레오 1세의 원정을 실패로 이끌어 서방 제국의 운명을 사실상 결정지었고, 결과적으로 로마는 게르만족에게 정복되었다.
  • 교훈 : 바실리스쿠스의 사례는 혼란스러운 시대에 황제로서 필요한 강력한 리더십과 안정적인 지지 기반, 그리고 현실적인 정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바실리스쿠스는 로마 제국이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던 수많은 인물 중 한 명으로, 그의 실패는 동로마 제국이 이후 제논의 통치를 통해 이사우리아 왕조의 기반을 다지고 비잔티움 제국으로 나아가는 배경이 되었다.
 
=-=-=-=-=-=-=-=-=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미카엘 2세(Michael II, AD.770~829) : 동로마 제국 제86대 황제(820~829)

미카엘 2 세 (Michael II, AD.770~829) : 동로마 제국 제 86 대 황제 (820~829)   미카엘 2 세 (Michael II) [Greek : Μιχα ὴ λ / Mikhaḗl] 아모리아인 [the Amorian, ὁ ἐ ξ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