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우리아 왕조(Isaurian dynasty, AD.717~802) 치하의 비잔틴 제국 : 위기 속의 수호자와 개혁가들
1. 제국의 혼돈을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열다
717년부터 802년까지 이어진 이사우리아 왕조(Isaurian dynasty)는 비잔틴 제국 역사상 가장 격동적이고 중요한 시기 중 하나를 상징한다. 이 왕조는 제국이 ‘20년 무정부기’(Twenty Years' Anarchy)라고 불리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내분으로 신음하던 시기에 등장하여 제국의 멸망을 막고 안정화를 이끌었다. 외부적으로는 아랍 칼리프국(Caliphates)의 맹렬한 공격에 맞서 제국의 생존을 지켜냈고, 내부적으로는 성상 파괴 운동(Byzantine iconoclasm)이라는 거대한 종교-사회적 변혁을 주도하며 비잔틴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사우리아 황제들은 동방에서 밀려오는 이슬람 세력의 거센 파도 앞에서 제국의 영토를 수호하고 방어 태세를 강화하는 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의 통치 덕분에 비잔틴 제국은 동방에서 점령되지 않고 버텨낼 수 있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불가리아 제국(First Bulgarian Empire)과의 지속적인 갈등, 이탈리아에서의 라벤나 총독부(Exarchate of Ravenna) 상실, 그리고 교황권(Papacy) 및 프랑크족(Franks)의 성장으로 인한 영향력 약화 등 여러 난관에 부딪혔다.
2. 제7세기 비잔틴의 배경 : 헤라클리우스 왕조와 20년의 무정부기
이사우리아 왕조의 등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 시기의 비잔틴 제국의 상황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7세기 비잔틴 제국은 헤라클리우스 왕조(Heraclian dynasty, 610-695년, 그리고 705-711년)의 통치 아래 극심한 도전에 직면했다. 602년부터 628년까지 사산 왕조 페르시아(Sassanid Persia)와의 길고 소모적인 전쟁을 간신히 이겨낸 직후, 제국은 아라비아에서 시작된 이슬람 세력의 급격한 팽창(Muslim expansion)이라는 또 다른 위협에 직면했다. 이슬람 군대는 순식간에 레반트(Levant), 이집트, 북아프리카 등 제국의 핵심 영토를 장악하며 비잔틴 제국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외부 위협 속에서 제국 내부는 정치적 혼란에 휩싸였다. 695년 헤라클리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Justinian II, 669-711)가 폐위된 이후, 717년 이사우리아 왕조가 들어설 때까지 불과 22년 동안 일곱 명의 황제가 즉위하고 폐위되는 혼란스러운 시기가 이어졌다. 이 시기를 역사가들은 ‘20년 무정부기’(Twenty Years' Anarchy)라고 부른다. 권력은 군부와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파벌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동했으며, 황제의 자리와 수명은 매우 위태로웠다. 이러한 상황은 제국의 행정력을 마비시키고 군사력을 약화시켰으며, 아랍군이 콘스탄티노플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사우리아 왕조의 창시자 레오 3세(Leo III)가 등장했을 때, 비잔틴 제국은 말 그대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수도는 내부 분열과 황제의 빈번한 교체로 무력화되었고, 동방에서는 강력한 아랍 칼리프국의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3. 레오 3세, 이사우리아 왕조의 시작과 콘스탄티노플 방어(717-741)
1) 권력 장악과 무정부기의 종식
이사우리아 왕조의 창시자이자 첫 황제인 레오 3세(Leo III, 685경-741)는 소아시아 이사우리아 지역 출신의 유능한 군 지휘관이었다. 그는 이른바 ‘시리아 왕조’(Syrian dynasty)로도 불리는데, 이는 그의 고향이 시리아계 민족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717년, 그는 아나톨리콘 테마(Anatolikon Theme)의 스트라테고스(군사령관)로서 테오도시우스 3세(Theodosius III, ?-754)의 무능함에 반기를 들고 군사적 반란을 일으켰다. 레오의 군대는 빠르게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했고, 테오도시우스 3세는 큰 저항 없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로써 20년 간 이어진 제국의 무정부 상태는 종식되고 새로운 황제 레오 3세가 즉위하며 이사우리아 왕조의 시대가 열렸다.
2)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 제국의 생존을 지키다
레오 3세가 권력을 잡자마자 직면한 가장 큰 위협은 옴미아드 칼리프국(Umayyad Caliphate)의 육군과 해군이 이끄는 콘스탄티노플 대공방전(Siege of Constantinople, 717-718)이었다. 옴미아드 칼리프국의 마슬라마 이븐 압드 알-말리크(Maslama ibn Abd al-Malik, 680-738)가 이끄는 거대한 아랍군과 해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한 이 사건은 비잔틴 제국의 존망이 달린 최후의 결전이었다. 아랍군은 수십만 명의 병력과 대규모 함대를 동원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육상과 해상에서 완전히 봉쇄했다.
레오 3세는 그의 군사적 역량과 전략적 지혜를 발휘하여 이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다. 그는 수도의 방어 시설을 굳건히 하고, 시민들의 사기를 독려하며 장기적인 농성전을 준비했다. 특히 ‘그리스의 불’(Greek fire)이라는 강력한 비잔틴의 비밀 무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아랍 해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또한, 혹독한 겨울 날씨와 보급선 차단, 그리고 불가리아의 테르벨 칸(Tervel, ?-721)과의 동맹을 통해 아랍군을 후방에서 공격하는 전략은 아랍군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켰다. 1년여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아랍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의 승리는 비잔틴 제국의 생존을 보장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으로의 이슬람 확장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승리는 레오 3세의 황제로서의 권위와 정당성을 확고히 해주었으며, 제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3) 성상 파괴 운동의 시작(726년)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이후, 레오 3세는 제국의 종교 정책에 큰 변화를 시도했다. 726년부터 그는 이른바 ‘성상 파괴 운동’(Iconoclasm)을 시작했다. 이는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이미지를 묘사한 성상(Icon)을 숭배하는 것이 우상 숭배에 해당한다는 주장으로, 성상 사용을 금지하거나 파괴하는 운동이었다.
성상 파괴 운동의 배경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다. 일부에서는 연이은 재앙(화산 폭발, 지진 등)과 군사적 실패가 성상 숭배로 인한 신의 노여움 때문이라는 믿음이 퍼져 있었다. 또한, 이슬람교의 우상 숭배 금지 교리와 아랍인들에 대한 비잔틴 제국의 열세는 성상 숭배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낳았다. 레오 3세는 이러한 사회적, 종교적 분위기를 이용하여 제국 내 종교적 순수성을 회복하고, 교회의 권력을 황제의 통제 아래 두려는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황제는 성상 숭배를 단순한 미신으로 보고, 이를 금지함으로써 국가의 통합과 권위 강화를 꾀했다.
레오 3세는 성상 파괴 운동을 점진적으로 추진했다. 처음에는 성상을 숭배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하고, 이어서 성상을 파괴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제국 전역, 특히 서방의 이탈리아와 로마 교황으로부터 강한 저항을 받았다. 교황 그레고리 2세(Pope Gregory II, 669-731)와 후임 교황 그레고리 3세(Pope Gregory III, ?-741)는 성상 파괴 운동에 반대하며 교황의 권위를 강조했고, 이는 비잔틴 제국과 서유럽 교황권 간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4) 개혁과 제국 안정화
레오 3세는 군사적 성공과 종교적 개혁 외에도 제국의 행정과 법률 시스템을 개혁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에클로가’(Ecloga)라는 새로운 법전을 발표하여, 이전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의 복잡한 조항들을 간략화하고 현대적인 사법 체계를 마련하려 노력했다. 이 법전은 비록 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 제국의 법률 시스템을 실제적이고 접근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테마 제도(Thematic system)를 강화하고, 제국의 국경을 안정화하며 재정 시스템을 재건하는 등 제국의 전반적인 안정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레오 3세의 통치는 이사우리아 왕조의 기반을 다졌을 뿐만 아니라, 이후 비잔틴 제국의 회복과 발전을 위한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
4. 콘스탄티누스 5세, 성상 파괴 운동의 심화와 군사적 역량 강화(741-775)
1) 아르타바스도스의 찬탈 시도와 진압
레오 3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Constantine V, 718-775)가 741년에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그의 즉위 직후, 사촌이자 아나톨리콘 테마의 스트라테고스였던 아르타바스도스(Artabasdos, ?-743)가 반란을 일으켜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하고 황제를 참칭했다. 아르타바스도스는 자신을 성상 숭배자들의 옹호자로 자처하며 광범위한 지지를 얻으려 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5세는 소아시아에서 군대를 재편하고 2년간의 내전을 거쳐 743년에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아르타바스도스의 반란 진압은 콘스탄티누스 5세의 강력한 통치력을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2) 성상 파괴 운동의 심화와 논쟁
아르타바스도스의 반란을 진압한 후, 콘스탄티누스 5세는 아버지 레오 3세가 시작한 성상 파괴 운동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는 754년에 히에리아 공의회(Council of Hieria)를 소집하여 성상 숭배를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규정하고, 성상 숭배자들을 박해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 공의회에는 동방 총대주교들의 대표는 불참했지만, 황제는 이를 통해 성상 파괴 교리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콘스탄티누스 5세는 성상 숭배를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잘못된 교리로 간주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적인 형태로 묘사한 성상이 그분의 신성까지 포함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신학적 오류를 범한다고 주장했다. 황제는 수도원들이 성상 숭배의 온상이라고 보고 수도원들에 대한 압력을 가하고 성상 파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수도사들을 처벌했다. 그의 이러한 정책은 제국 내에 깊은 분열과 갈등을 야기했으며, 후대에 ‘콘스탄티누스 코프로니모스’(Constantine Copronymus, “똥 이름”)라는 비하적인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3) 아랍과 불가리아에 대한 군사적 승리
콘스탄티누스 5세는 종교 정책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었지만, 군사적 역량 면에서는 매우 뛰어난 황제였다. 그는 아랍 칼리프국과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제국의 동부 국경을 안정화했다. 그는 특히 아나톨리아 반도에 대한 아랍군의 약탈을 저지하고, 역으로 아랍 영토를 공격하여 비잔틴 제국의 군사적 우위를 재확립했다. 콘스탄티누스 5세는 그의 군사적 개혁과 훈련을 통해 강력한 군대를 양성했으며, 이는 그의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콘스탄티누스 5세는 서쪽에서 부상하는 불가리아 제국에 대한 위협에도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그는 불가리아와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승리하여 불가리아의 확장을 저지하고 비잔틴 제국의 영향력을 공고히 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비잔틴 제국은 군사적으로 최강의 면모를 보여주었으며, 이는 황제의 강력한 지도력과 뛰어난 군사적 재능 덕분이었다. 콘스탄티누스 5세의 통치 기간 동안 이사우리아 왕조는 군사적으로 최고 전성기를 맞았다.
5. 레오 4세와 이레네의 섭정(775-797)
1) 레오 4세의 짧은 통치(775-780)
콘스탄티누스 5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레오 4세(Leo IV, 750-780)가 775년에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아버지의 성상 파괴 정책을 기본적으로 유지했지만, 아버지보다는 다소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레오 4세는 ‘하자르인’(the Khazar)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그의 어머니가 하자르 공주였기 때문이다.
그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제국은 비교적 안정되었고, 아랍과의 전쟁에서 몇 차례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레오 4세는 성상 숭배자들에 대한 박해를 완화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일부 수도사들을 궁정으로 복귀시키기도 했다. 이는 그의 아내 이레네(Irene)가 비밀리에 성상 숭배자였던 사실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레오 4세는 780년 갑작스럽게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은 다시 한번 제국에 새로운 혼란의 씨앗을 뿌렸다.
2) 이레네의 섭정과 성상 숭배의 부활(780-790)
레오 4세가 사망하자 그의 어린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Constantine VI, 771-797)가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어린 황제의 어머니이자 섭정인 이레네(Irene of Athens, 752-803)에게 있었다. 아테네 출신인 이레네는 독실한 성상 숭배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섭정 기간 동안 성상 파괴 정책을 뒤집고 성상 숭배를 복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레네는 이를 위해 강력한 성상 파괴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던 군부를 약화시키려 노력했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직에 타라시우스(Tarasius)를 임명하여 자신의 계획을 도왔다. 787년, 이레네는 제2차 니카이아 공의회(Second Council of Nicaea)를 소집하여 성상 숭배를 공식적으로 재확인하고, 754년 히에리아 공의회에서 결의된 성상 파괴주의자들의 주장을 이단으로 선언했다. 이로써 성상 파괴 운동은 일시적으로 종식되고, 비잔틴 제국은 다시 성상 숭배를 허용하게 되었다. 이는 제국과 로마 교황청 간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기여했지만, 여전히 제국 내부에는 성상 파괴에 대한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존재했다.
3) 콘스탄티누스 6세의 통치와 이레네의 권력 장악(790-797)
어린 황제 콘스탄티누스 6세는 성인이 되면서 어머니 이레네의 섭정 통치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어머니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신의 권력을 확립하려 했다. 790년, 콘스탄티누스 6세는 군부의 지지를 얻어 이레네를 섭정 자리에서 축출하고 실질적인 통치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경험이 부족했고, 통치자로서의 역량은 어머니 이레네에 미치지 못했다. 그의 군사적 실패와 무분별한 개인 생활은 점차 대중과 군부의 신임을 잃게 만들었다.
이레네는 자신의 아들이 약점을 보이자 권력을 되찾을 기회를 엿보았다. 그녀는 충성파 세력을 결집시키고 아들을 상대로 정치적 음모를 꾸몄다. 797년, 이레네는 쿠데타를 일으켜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를 체포하고 잔인하게 눈을 멀게 했다. 이 충격적인 사건으로 콘스탄티누스 6세는 사망했으며, 이레네는 비잔틴 제국 역사상 최초로 단독으로 황위에 오른 여제가 되었다. 이 사건은 비잔틴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어머니가 아들을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했다는 점에서 정통성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6. 이레네의 단독 통치와 왕조의 종식(797-802)
1) 첫 여성 단독 황제 이레네
797년, 이레네는 비잔틴 제국 역사상 최초로 남편이나 아들의 섭정이 아닌 ‘단독 여제’(basilissa)로 즉위했다. 그녀는 황제에 해당하는 칭호를 사용하고, 심지어 동전에도 자신의 초상화를 새겨 넣으며 자신의 통치권을 공고히 하려 했다. 그녀의 통치는 성상 숭배를 복원하고 교황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점과 아들을 잔인하게 제거한 사실은 그녀의 정통성을 끊임없이 문제 삼는 요인이 되었다.
2) 서방의 샤를마뉴 대관식과 비잔틴의 권위 하락
이레네의 통치 기간 중 가장 큰 대외적 사건은 800년 크리스마스에 교황 레오 3세(Pope Leo III, ?-816)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Charlemagne, 747?-814)를 로마 황제(emperor of the Romans)로 대관식을 거행한 일이었다. 교황은 동방에 합법적인 남성 황제가 없다는 구실을 들어 샤를마뉴에게 제국 황제의 칭호를 부여했다. 이는 서로마 제국(Roman Empire)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샤를마뉴의 프랑크 왕국(Carolingian state)과 진정한 로마 제국의 계승자인 비잔틴 제국 사이의 정통성 논쟁을 촉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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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800년 샤를마뉴가 서로마 황제로 대관식을 거행했을 때의 동로마 제국 |
비잔틴 제국은 스스로를 로마 제국의 유일한 합법적인 후계자로 여겼으며, 콘스탄티노플의 황제만이 로마의 황제라고 믿었다. 따라서 샤를마뉴의 대관식은 비잔틴 제국의 권위와 위신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이 사건은 서유럽과 비잔틴 제국 간의 정치적, 문화적 분열을 심화시켰고, 서유럽이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독립적인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음을 알리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3) 이레네의 몰락(802년)
이레네의 통치는 그녀의 친여 세력의 부상과 불만을 가진 귀족들의 음모로 점철되었다. 그녀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지만, 여성 통치자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과 아들을 폐위시킨 잔혹성은 끊임없이 그녀를 따라다녔다. 재정 문제와 그녀를 둘러싼 음모는 더욱 심화되었다.
802년 10월, 재무 장관이었던 니케포로스(Nikephoros, ?-811)가 이끄는 궁정 쿠데타가 일어났다. 니케포로스는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이레네를 황위에서 끌어내리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이레네는 레스보스 섬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이듬해 803년에 사망했다. 이레네의 폐위로 이사우리아 왕조는 85년간의 통치를 끝마치고 니키포로스 왕조(Nikephorian dynasty)의 시대가 열렸다.
7. 위기 속의 수호와 양분된 유산
이사우리아 왕조는 비잔틴 제국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를 담당했다. 이들은 제국이 ‘20년의 무정부기’라는 내부적 혼란과 아랍 칼리프국이라는 외부적 위협으로 멸망 직전에 처했을 때 등장하여 제국의 생존을 보장했다. 레오 3세와 콘스탄티누스 5세는 탁월한 군사적 지휘력과 행정적 개혁을 통해 제국의 방어 체계를 강화하고 군사적 역량을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콘스탄티노플 대공방전의 승리는 이슬람 세력의 유럽 확장을 저지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사우리아 왕조는 성상 파괴 운동이라는 종교적 정책으로 인해 제국 내부에 깊은 분열을 초래했다. 이 운동은 비잔틴 사회에 수십 년간 지속되는 종교적, 사회적 갈등을 야기했으며, 제국과 로마 교황청 간의 관계를 악화시켜 결국 동서 교회의 분열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또한, 유럽에서는 불가리아와의 전쟁, 이탈리아 영토의 상실, 그리고 샤를마뉴의 로마 황제 대관식과 같은 사건들로 인해 비잔틴 제국의 영향력과 위신이 하락하는 시기를 겪었다.
이사우리아 왕조는 강력한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제국의 행정 및 군사 시스템을 재편함으로써 비잔틴 제국이 이후 마케도니아 왕조 시대의 황금기를 맞이하는 데 필요한 기반을 다졌다. 그들의 유산은 제국을 수호한 영웅적인 면모와 동시에 종교적 박해와 내부 분열을 일으킨 양면성을 지닌다. 이들은 위기 속에서 제국의 생존을 위한 투쟁과 개혁을 감행하며 비잔틴 역사의 흐름을 바꾼 중요한 통치자들이었다. 이사우리아 왕조는 비록 논란의 여지가 많은 시기였지만, 제국의 강인한 회복력과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하는 정신을 보여준 중요한 장(章)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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