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60~53] 제1차 삼두정치 : 로마 공화정의 숨겨진 권력 동맹
1. 서론 : 공화정 말기의 비공식적 권력 협정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 불안정한 정치 상황 속에서 권력을 장악하려던 세 거물이 있었다. 기원전 60년경 형성되어 기원전 53년까지 이어진 이들의 동맹은 흔히 제1차 삼두정치(First Triumvirate)로 불린다. 이 동맹은 당시 로마 공화정에서 가장 강력한 세 명의 정치인이었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Gnaeus Pompeius Magnus),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 그리고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사이에 맺어진 비공식적인 정치적 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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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삼두정치’ 시기의 로마 |
로마 공화정의 헌정 체제는 많은 거부권을 허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헌정적 장애물을 우회하고 세 남자의 정치적 목표를 관철시키기 위해 그들은 서로의 영향력을 이용해 지지할 것을 약속하는 비밀 동맹을 맺었다. ‘삼두정치(triumvirate)'는 공식적인 직책이 아니었으며, 국가 사무에 대한 지속적인 지배를 달성하지도 못했다. 이 동맹은 당시 로마 상원 내의 반대를 극복하기 위한 상호 필요성 때문에 형성되었고, 처음에는 비밀리에 진행되었지만 기원전 59년 카이사르의 첫 집정관 임기 동안 공개적으로 드러나 세 동맹자의 법안 통과를 강행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퇴역병들을 정착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농지법,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이후 폼페이우스의 정착을 승인하는 법, 그리고 지방 행정과 세금 징수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켰다. 또한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역의 장기 총독직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 동맹의 초기 성공은 상당한 정치적 반발을 불러왔고, 로마의 정치 동맹들은 향후 세 사람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재편되었다.
2. 명칭의 논란 : '삼두정치'는 현대의 조어인가?
'제1차 삼두정치'라는 용어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으로 현대 공화정 말기 역사가들은 이 용어의 사용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 '데켐비리(decemviri)'와 같이 일정 수의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는 로마 행정의 특징이었지만, 이 동맹은 그 중 어느 것도 아니었다. 이 용어는 고대 자료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어떤 공식적인 직책도 의미하지 않는 "완전히, 그리고 명백히 잘못된" 표현이다. 고대 시대에 이 세 명의 동맹은 다양한 용어로 언급되었다. 키케로(Cicero)는 당대에 이 동맹을 '세 남자(tres homines)'가 '레그눔(regnum)'을 행사한다고 묘사했으며,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Marcus Terentius Varro)는 이를 '세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이라고 불렀다. 수에토니우스(Suetonius)나 리비우스(Livy)와 같은 후대 역사가들은 이 셋을 '소키에타스(societas)' 또는 '콘스피라티오(conspiratio)'로 지칭했다. 동맹자들 스스로는 아마도 단순히 '아미키티아(amicitia)', 즉 '우정'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삼두정치'라는 용어가 이 정치 동맹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것은 르네상스(Renaissance) 시대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1681년에 처음 기록되었으며, 18세기에서야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한동안 이 용어가 현대의 조어라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다가 1807년에야 '밝혀졌다'. 19세기에는 주로 영어와 프랑스어 문헌에서 비교적 규칙적으로 사용되었지만, 독일어 문헌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이때에도 이 용어가 공식적인 직책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설명이 일반적으로 덧붙여졌다.
최근 학자들은 출판물에서 '제1차 삼두정치'라는 용어 자체를 피하기 시작했다. 해리엇 플라워(Harriet Flower)는 저서 《로마 공화정(Roman Republics)》에서 "제1차 삼두정치"가 "기원전 50년대의 지위를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옥타비아누스의 공식적인 삼두정치와 동일시하여 오해를 불러일으킨다"고 썼으며, 대신 '동맹(alliance)' 이나 '빅 쓰리(Big Three)' 를 선호한다. 앤드루 린토트(Andrew Lintott)와 리처드 빌로우즈(Richard Billows)의 저서 또한 '제1차 삼두정치' 언급을 피하고 있다. 로버트 모스테인-마르크스(Robert Morstein-Marx)는 2021년 저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로마 민중(Julius Caesar and the Roman People)》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공화정에 대한 일종의 음모였다는 견해를 채택하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하다. 명명법은 중요하며, 나는 전통적인 '제1차 삼두정치'를 완전히 피한다"고 덧붙였다 .
매리 비어드(Mary Beard)와 같은 대중 역사학자들조차 '갱 오브 쓰리(Gang of Three)'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에이드리언 골즈워디(Adrian Goldsworthy)와 같은 일부 학자들은 전통적인 명칭을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부정확하다는 점을 설명한다. 《옥스포드 고전 사전(Oxford Classical Dictionary)》 4판에서도 "기원전 60년에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사이에 형성된 연합은 전적으로 비공식적이었고 당시에는 삼두정치로 묘사되지 않았다. '제1차'와 '제2차 삼두정치'는 현대적이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용어이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3. 동맹의 형성 : 교착 상태를 뚫기 위한 필연적 선택
폼페이우스(Pompey), 크라수스(Crassus), 카이사르(Caesar) 세 사람 간의 동맹은 기원전 60년 이전 몇 년 동안 로마 정치의 교착 상태에서 각자의 목표를 통과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형성되었다. 세 사람 모두 무언가를 원했지만, 상원과 민회의 경쟁자들에 의해 저지당하고 있었다.
1) 폼페이우스의 불만과 목표
동방에서의 위대한 승리 이후 로마로 귀환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Gnaeus Pompeius Magnus)는 자신의 승리를 공식적으로 승인받고, 자신의 퇴역병들에게 약속된 토지를 제공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상원은 그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며 이를 번번이 거부했다. 폼페이우스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강력한 동맹이 필요했다.
2) 크라수스의 재정적 영향력과 정치적 야망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는 로마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 중 한 명으로,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기사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고자 했고, 특히 아시아 지방의 세금 계약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입지는 상원 내 보수파에 의해 제약을 받고 있었다. 크라수스는 자신의 사업적 이익과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지지가 필요했다.
3) 카이사르의 부상과 집정관 임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는 당시 부채가 많았지만,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정치적 수완으로 빠르게 부상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경력을 위해 집정관직에 오르기를 원했고, 강력한 지지 기반을 필요로 했다. 기원전 59년, 그가 집정관으로 선출된 후, 삼두정치는 그들의 영향력을 활용하여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박차를 가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퇴역병을 위한 농지법을 통과시키고, 폼페이우스의 동방 정착지를 승인하며, 지방 행정 및 세금 징수에 관한 법안을 처리했다. 또한, 그는 갈리아에서 장기적인 지휘권을 얻어 자신의 군사적 야망을 펼칠 기회를 확보했다 .
4. 동맹의 균열과 파국
기원전 55년경, 삼두정치 동맹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 사람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다시 뭉쳤다. 그들은 무력과 정치적 혼란을 이용하여 기원전 55년 집정관 선거를 연기하고, 투표인단을 위협하여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다시 집정관으로 선출시켰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지휘권은 5년 더 연장되었고,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Hispania) 지방을, 크라수스는 시리아(Syria) 지방을 총독으로 맡는 요직을 차지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노골적인 무력과 혼란을 사용한 것에 대한 반발이 더욱 거세졌다.
기원전 53년, 크라수스(Crassus)는 파르티아(Parthia) 침공이 실패로 끝나면서 사망했다. 이로써 삼두정치의 한 축이 사라졌고,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두 명의 동맹만 남게 되었다.
크라수스의 죽음 이후에도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몇 년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폼페이우스가 기원전 52년에 단독 집정관직을 맡은 후에도, 그리고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였던 율리아(Julia)의 죽음 이후에도 그들은 동맹 관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크라수스의 죽음 이후 카이사르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새로운 동맹들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행동은 점차 그를 카이사르와의 대결 정책으로 이끌었다. 기원전 50년까지 지속된 신뢰 악화, 그리고 카토(Catonian)의 반(反) 카이사르 강경파가 폼페이우스에게 미친 영향은 결국 기원전 49년 1월 카이사르를 내전(Caesar's civil war)으로 이끌었다.
5. 결론 : 비공식적 권력 동맹의 유산
제1차 삼두정치는 로마 공화정 말기, 세 명의 강력한 인물들이 각자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맺었던 비공식적인 권력 동맹이었다. 이 동맹은 당시 상원의 견고한 보수적 태도를 극복하고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로마 정치에 전례 없는 혼란과 무력 사용의 선례를 남겼다. 크라수스의 사망과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간의 관계 악화는 결국 내전으로 이어져 로마 공화정의 멸망을 앞당기는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비록 '제1차 삼두정치'라는 용어 자체는 현대에 와서야 사용된 명칭이지만, 이 시기 로마 역사는 권력에 대한 야망, 복잡한 정치적 동맹, 그리고 개인적 관계가 어떻게 국가의 운명을 뒤바꿀 수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로마 역사를 연구하는 현대 학자들은 이 동맹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명칭이 지닌 역사적 정확성 부족에 대해 끊임없이 논의하며 더 적절한 용어를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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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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