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49~45] 카이사르 내전 : 로마 공화정을 뒤흔든 대격변
1. 서론 : 공화정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다
기원전 49년부터 45년까지 4년간 로마 공화정을 피로 물들였던 ‘카이사르 내전’(Caesar's Civil War)은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 100~BC 44)와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 BC 106~BC 48)가 이끄는 두 세력 간에 벌어진 대규모 갈등이었다. 이 전쟁은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적 긴장과 권력 다툼이 폭발적으로 분출된 결과였다. 특히 갈리아(Gaul) 지역에서 거의 10년간 군사를 지휘하며 막대한 부와 권력을 축적한 카이사르가 로마 정치 체제로 어떻게 재통합될 것인가가 전쟁의 주요 쟁점이었다.
내전은 단순한 권력 다툼을 넘어 로마 공화정의 헌정 체제를 무너뜨리고 제정 시대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부 학자들은 이 전쟁을 공화정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기도 하며, 다른 학자들은 공화정 자체의 쇠퇴를 반영하는 증상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2. 전쟁의 배경과 원인 : 피할 수 없는 파국으로
카이사르 내전은 기원전 50년 후반부터 축적된 긴장이 폭발한 결과였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양측 모두 물러서기를 거부하면서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재앙으로 치달았다.
상원은 기원전 49년 초 카이사르에게 그의 지방 통치권과 군대를 포기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폼페이우스(BC 106~BC 48)와 그의 동맹자들이 주도한 요구였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를 거부하고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Rubicon River)을 건너 로마로 진격했다. 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다'라는 유명한 비유의 기원이 되었다.
당시 상원 전체는 상대적으로 평화로웠고, 카이사르의 동맹인 호민관(tribune of the plebs)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Gaius Scribonius Curio, BC 90~BC 49)가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모두에게 군대와 지휘권을 포기할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기원전 50년 12월 1일 상원에서 찬성 370표 대 반대 22표로 통과되었다. 하지만 이 제안은 폼페이우스와 당시 집정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Gaius Claudius Marcellus, BC 88~BC 46)에 의해 거부되었다. 마르켈루스는 카이사르가 이탈리아를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을 빌미로 폼페이우스에게 로마 시와 공화정을 방어할 것을 명령했다.
카이사르가 내전을 결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일각에서는 그가 기원전 59년 집정관 임기 동안 저지른 법적 불규칙성과 50년대 후반 폼페이우스가 통과시킨 법률 위반으로 인해 고발될 수 있었으며, 그 결과는 불명예스러운 망명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에토니우스(Suetonius)와 폴리오(Pollio)의 이러한 기소 이론은 "매우 의심스러운 영역"에 있으며 "극도로 의심스럽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원전 50-49년 기간에 누군가가 카이사르를 재판에 회부할 진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카이사르의 내전 결정은 두 번째 집정관직과 개선식(triumph)을 달성하려는 노력이 좌절될 경우 그의 정치적 미래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또한 기원전 49년의 전쟁은 카이사르에게 유리했는데, 그는 계속 군사 준비를 해왔지만 폼페이우스와 공화파는 준비를 시작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대에도 이 전쟁의 원인은 "명확한 동기를 찾을 수 없는" 미스터리였다. 카이사르가 호민관들의 권리를 옹호한다는 주장은 "너무나도 명백한 위장"에 불과했다. 카이사르 본인은 자신의 개인적인 '디그니타스(dignitas, 명예)'를 보호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그루엔(Gruen)의 표현처럼 카이사르는 "보수파의 허풍이나 폼페이우스의 협박에 고분고분 굴복하는 것을 거부"했고, 폼페이우스 또한 카이사르의 제안을 지시처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다. 기원전 50년 마지막 몇 주까지는 전쟁에 대한 의식적인 욕구가 거의 없었지만, 보수파(boni)는 "스스로를 딜레마에 빠뜨려 명예롭게 벗어날 수 없게" 되었고, 카이사르 또한 "복종을 통해 [자신의 지위와 명성]이 무너지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다."
3. 내전의 전개 : 로마 세계를 휩쓴 혼란
내전은 이탈리아, 일리리아(Illyria), 그리스, 이집트, 아프리카, 히스파니아(Hispania) 등 로마 공화정의 광범위한 영역에서 펼쳐졌다.
1) 초기 진격과 폼페이우스의 동방 후퇴(기원전 49년)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너 이탈리아로 진격하자, 폼페이우스는 즉시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서 병력을 후퇴시켰다.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에서 카이사르와 맞서기보다는 동방에서 병력을 재편성하고 지원을 얻어 장기적인 전쟁을 준비하는 전략을 택했다. 카이사르는 이탈리아를 빠르게 장악한 후, 폼페이우스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히스파니아로 진격하여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2) 그리스 전역 : 뒤르하키움과 파르살루스(기원전 48년)
내전의 결정적인 전장은 기원전 48년 그리스에서 펼쳐졌다.
- 뒤르하키움 전투(Battle of Dyrrhachium, BC 48) : 폼페이우스는 뒤르하키움에서 카이사르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카이사르의 군대가 처음으로 큰 패배를 겪은 전투였다.
- 파르살루스 전투(Battle of Pharsalus, BC 48) : 뒤르하키움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는 군대를 재정비하여 파르살루스에서 폼페이우스와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카이사르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폼페이우스의 군대는 완전히 와해되었다.
파르살루스 전투 후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 BC 85~BC 42)와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BC 43) 등 많은 폼페이우스 지지자들이 항복했다. 그러나 소 카토(Cato the Younger, BC 95~BC 46)와 메텔루스 스키피오(Quintus Caecilius Metellus Pius Scipio, BC 100?~BC 46) 등 일부는 계속 저항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망쳤지만, 도착하자마자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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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우스가 이집트에서 암살당하는 장면, 1880년 그림의 상상에 따른 것 |
3) 아프리카와 히스파니아 잔당 소탕(기원전 46-45년)
폼페이우스의 죽음 이후에도 그의 잔당들은 북아프리카와 히스파니아에서 계속 저항했다.
- 타프수스 전투(Battle of Thapsus, BC 46) : 카이사르는 북아프리카로 진격하여 기원전 46년 타프수스 전투에서 메텔루스 스키피오가 이끄는 세력을 격파했다. 이 승리 직후 소 카토와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자결했다.
- 문다 전투(Battle of Munda, BC 45) : 다음 해인 기원전 45년,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에서 그의 옛 부하였던 티투스 라비에누스(Titus Labienus, BC 99~BC 45)가 이끄는 마지막 폼페이우스 세력을 문다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물리쳤다. 이로써 내전은 막을 내렸다.
4. 전쟁의 결과와 공화정의 몰락
내전이 종식된 후,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 상원에 의해 '종신 독재관(dictator perpetuo)'으로 임명되며 로마의 절대 권력자가 되었다. 이는 공화정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공화정 체제를 유지하려 했지만, 그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해지자 그를 반대하는 세력의 견제를 받았다. 카이사르는 동방의 다키아(Dacia)와 파르티아(Parthia) 원정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기원전 44년 3월 15일(이두스)에 브루투스(BC 85~BC 42)를 포함한 상원 의원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카이사르 내전은 로마 공화정의 종점으로 흔히 인식된다. 일부 학자들은 이 전쟁이 로마 공화정의 기능적인 정부 체계를 파괴하여 공화정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본다. 다른 학자들은 이 내전을 공화정 붕괴의 증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
카이사르의 완벽한 승리와 그 직후의 암살은 권력 공백을 초래했다. 이후 몇 년 동안 그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Octavian, BC 63~AD 14)가 최종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서 로마 제국을 건립하게 된다. 이로써 수백 년간 이어져 온 로마 공화정 시대는 막을 내리고 제정 시대로의 문이 열렸다. 카이사르 내전은 로마 역사의 거대한 전환점이었으며, 권력과 야망, 그리고 공화정이라는 이상이 어떻게 충돌하고 파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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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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