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67] 폼페이우스의 해적 토벌 작전 : 로마 지중해 패권의 재확립
기원전 67년, 로마 공화국(Roman Republic)은 지중해를 휩쓴 해적들의 위협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이 해적들은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 거대한 함대를 조직하고 자신들만의 지휘관을 두며 로마의 동방 속주를 유린하고 지중해 무역을 마비시키는 대규모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당대 최고의 군사 지휘관으로 손꼽히던 폼페이우스(Pompey, 기원전 106년-기원전 48년)가 전례 없는 권한을 부여받고 해적 소탕 작전을 수행했다. '폼페이우스의 해적 토벌 작전'은 로마의 지중해 패권을 재확립하고 로마 공화정 말기 폼페이우스의 정치적 위상을 절정으로 끌어올린 결정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
![]() |
폼페이우스의 흉상 기원전 70~60년경 원본의 복제품, 베네치아 국립 고고학 박물관 소장 |
1. 지중해 해적의 준동과 로마의 위기
폼페이우스의 해적 토벌 작전은 수세기 동안 이어져 온 지중해 해적 문제의 최종 단계였다 . 특히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First Mithridatic War) 이후, 로마가 동방 문제에 개입하면서 이 지역에 공백이 생겼고, 킬리키아(Cilicia) 출신의 해적들은 이를 이용해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했다.
1) 해적 문제의 심각성
고대 지중해의 해적들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카시우스 디오(Cassius Dio, 서기 155년경-서기 235년 이후)의 기록에 따르면, 해적들은 더 이상 소규모 무리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대규모 함대를 이루고 자신들만의 지휘관을 두었다. 그들은 항해하는 상선들을 약탈하는 것을 넘어, 겨울에도 활동하며 항구에 정박한 선박까지 노렸다. 만약 개방된 바다에서 그들과 맞서 싸우는 자가 있다면 대부분 패배하거나 파괴되었고, 설령 그들을 격파하더라도 해적선의 빠른 속도 때문에 그들을 붙잡기란 쉽지 않았다.
해적들은 이제 마을과 농장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를 약탈하고 불태웠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그들이 동맹국을 얻어 겨울을 나거나 새로운 작전을 위한 기지를 세우기도 했다. 이러한 해적 활동은 로마에 엄청난 경제적, 전략적 타격을 입혔다. 특히 로마 시의 식량 공급에 필수적인 곡물선들이 끊임없이 해적들에게 나포되면서, 로마는 심각한 기근 위기에 직면했다. 지중해 동부의 로마 속주들은 해적들의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려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심지어 해적들은 기원전 69년에서 68년 사이에 로마 근교의 중요한 항구인 오스티아(Ostia)까지 습격하며 로마 본토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을 가했다. 그들은 고위 로마 관리의 딸을 납치하는 등 로마의 자존심을 짓밟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2) 로마의 이전 노력과 한계
로마는 해적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여러 차례 진압 작전을 시도했다. 기원전 102년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기원전 143년-기원전 87년)는 킬리키아 지역에서 해적을 상대로 작전을 수행했고, 이를 통해 킬리키아 속주가 설치되기도 했다. 기원전 78년부터 74년까지는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바티아 이사우리쿠스(Publius Servilius Vatia Isauricus, 기원전 78년 집정관)가 킬리키아에서 해적들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며 '이사우리쿠스'라는 칭호를 얻었지만,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중해 전체의 해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해적들의 세력은 더욱 강력해지고 조직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2. 렉스 가비니아 : 폼페이우스에게 전례 없는 권한을 부여하다
기원전 67년, 지중해 전역이 해적들에게 장악되자 로마인들은 위기감을 느꼈다. 로마는 해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강력한 인물을 필요로 했다. 이때 호민관(tribune of the plebs) 아울루스 가비니우스(Aulus Gabinius, 생몰년 미상)가 폼페이우스에게 전례 없는 권한을 부여하는 법안인 '렉스 가비니아(Lex Gabinia)'를 제안했다 .
법안의 내용과 논란 : 이 법안은 폼페이우스에게 3년 동안 지중해 전체와 해안으로부터 400 스타디아(약 70km) 내륙 지역에 대한 절대적인 군사 지휘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 권한은 당시 동방 속주에 주둔한 모든 로마 군사 지도자들보다 상위의 것이었다. 또한 폼페이우스는 15명의 레가투스(legates)를 임명하고, 재정 자원을 자유롭게 사용하며, 200척의 완전 무장한 함선과 120,000명의 병력을 지휘할 수 있었다.
이 법안은 로마 원로원 내 보수파(Optimates)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들은 폼페이우스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우려했으며, 이는 공화정 체제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로마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와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기원전 100년-기원전 44년)의 지지 속에 렉스 가비니아는 통과되었다. 이로써 폼페이우스는 해적 문제를 해결할 막강한 권한을 손에 넣었다.
3. 폼페이우스의 혁신적인 전략과 신속한 작전
폼페이우스는 과거의 실패 사례를 분석하고, 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혁신적인 전략을 수립했다. 그의 핵심 전략은 분산된 병력을 이용한 동시다발적인 소탕 작전이었다.
1) 지중해의 분할과 동시다발적 공격
폼페이우스는 지중해 전체를 13개의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마다 자신의 레가투스(legates) 한 명을 배정했다. 이 레가투스들은 각자의 구역을 담당하여 동시에 해적 소탕 작전을 개시했다. 그는 단일 전선에서의 전투를 지양하고, 지중해 전역에서 해적들이 도망치거나 숨을 곳이 없도록 일망타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2) 서부에서 동부로의 순차적 소탕
폼페이우스는 해적의 주력이 동부 지중해에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서부 지중해를 먼저 청소하는 것으로 작전을 시작했다. 그의 전략은 병력을 서쪽으로 밀어 넣은 다음 동쪽으로 이동하는 방식으로, 마치 그물을 좁혀가듯이 해적들을 자신의 본거지인 킬리키아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그는 서부 지중해를 단 40일 만에 완벽하게 정화하는 데 성공했다.
3) 육상-해상 합동 작전
폼페이우스는 해상에서의 해적 토벌뿐만 아니라, 육상에서의 해적 기지 파괴에도 주력했다. 해적들은 해안가에 숨겨진 기지나 내륙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통해 도피하곤 했는데, 폼페이우스는 내륙 70km까지 추격하여 그들의 거점을 완전히 파괴하며 재기를 막았다. 이처럼 육상과 해상에서의 유기적인 합동 작전은 해적들에게 도피할 공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4. 작전의 성공과 해적들의 종말
폼페이우스의 전략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지휘 아래 로마군은 단기간에 지중해의 해적 위협을 거의 완벽하게 제거했다.
1) 놀라운 속도와 효율성
전체 작전은 불과 40일 만에 지중해를 정화하는 등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진행되었다. 서부 지중해를 정리한 폼페이우스는 여세를 몰아 해적의 마지막 보루인 킬리키아로 진격했다.
2) 코라케시온 전투와 최종 승리
킬리키아에 도달한 폼페이우스(Pompey)는 해적들과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코라케시온(Korakesion)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로마군은 해적선들을 격파하고 해적의 주요 거점들을 함락시켰다. 해적들은 로마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압도당하여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다. 이 작전으로 377척에서 800척에 이르는 해적선이 나포되었고, 약 10,000명의 해적이 사망했으며, 20,000명이 포로로 잡혔고, 120개의 해적 도시가 함락되었다.
3) 폼페이우스의 관대한 정책
폼페이우스는 해적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대신, 독특하고 관대한 정책을 펼쳤다. 그는 항복한 해적들에게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를 주었다. 그는 그들을 킬리키아의 솔리(Soli), 팜필리아(Pamphylia)의 디메(Dyme) 등 비옥한 지역에 정착시켜 농업이나 다른 직업에 종사하게 했다. 이 정책은 과거 해적들이 마지못해 해적 행위를 했거나, 살아남기 위해 다른 길이 없었던 경우가 많았음을 고려한 현명한 조치였다. 이러한 관대한 정책은 해적들이 다시 해적 행위로 돌아가는 것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과의 평화로운 공존을 유도하여 해적 문제의 재발을 효과적으로 방지했다.
5. 작전의 여파와 역사적 의의
폼페이우스의 해적 토벌 작전은 단순히 해적을 소탕한 것을 넘어, 로마 공화국과 폼페이우스 자신의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지중해의 안전과 로마 무역의 활성화 : 지중해 전역이 해적의 위협에서 벗어나면서 로마의 무역로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곡물 수송이 원활해지면서 로마 시의 식량 문제도 해결되었고, 이는 로마 경제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로마는 이제 명실상부한 '마레 노스트룸(Mare Nostrum, 우리의 바다)'을 완벽하게 통제하게 되었다.
- 폼페이우스의 위상 강화 : 해적 토벌 작전의 성공은 폼페이우스에게 엄청난 군사적 명성과 정치적 영향력을 안겨주었다. 그는 로마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며, 그의 권위는 원로원 내 보수파의 우려를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성공을 바탕으로 폼페이우스는 곧이어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총사령관직을 맡아 동방 전체를 로마의 영향력 아래에 두는 대규모 원정을 수행하게 된다.
- 로마 군사 시스템의 효율성 증명 : 이 작전은 로마 군사 시스템의 효율성과 유연성을 보여주었다. 육상과 해상에서의 유기적인 협동, 전략적 계획, 그리고 병참의 중요성이 성공의 핵심 요소였다. 이는 이후 로마의 정복 활동에 중요한 교훈이 되었다.
- 공화정 말기 권력 집중의 선례 : 렉스 가비니아를 통해 폼페이우스에게 부여된 전례 없는 권한은 로마 공화정 말기,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개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의 중요한 선례가 되었다. 이는 훗날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로마 공화정이 황제정으로 전환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결론적으로 폼페이우스의 해적 토벌 작전은 로마 공화정의 위기를 해소하고 지중해 패권을 재확립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는 폼페이우스라는 걸출한 인물이 로마 역사의 전환점에 서 있었음을 보여주며, 그의 지략과 로마의 힘이 결합되어 이룩한 위대한 업적으로 길이 남았다.
=-=-=-=-=-=-=-=-=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