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무시(Rimush, BC.?~c.2270) : 아카드 제국의 격변기를 이끈 비운의 왕(BC.c.2279~c.2270)
- 이름 : Rimush [Rimuš, 𒌷𒈬𒍑 Ri-mu-uš]
- 출생 : 미상
- 사망 : 기원전 2270년경
- 부친 : 사르곤
- 재위 : 기원전 2279년경 ~ 2270년경
리무시(Rimush)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드 제국 제2대 왕이었다. 그는 전설적인 아카드 제국의 창시자 사르곤(Sargon of Akkad)의 아들이자 후계자로, 짧지만 격렬했던 재위 기간(BC.c.2279~c.2270) 동안 아버지의 제국을 공고히 하려 노력했다. 특히 그의 통치는 피비린내 나는 반란 진압과 대규모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암살이라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으며, 그의 이름은 아카드 제국의 초기 혼란기를 상징하는 존재로 남아있다.
1. 리무시의 가계와 아카드 왕실
리무시는 아카드 제국의 창시자 사르곤 왕의 아들이었다.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는 또 다른 아들인 마니슈투슈(Manishtushu)였다. 그는 또한 나람-신(Naram-Sin) 황제의 삼촌이었고, 세계사 최초로 이름이 알려진 작가로 꼽히는 엔헤두안나(Enheduanna)는 그의 누이였다. 슈-엔릴(Shu-Enlil), 즉 이바룸(Ibarum)이라 불리는 또 다른 형제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두르-리무시(Dur-Rimuš)’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이는 텔 이쉬찰리(Tell Ishchali)와 카파자(Khafajah) 근처에 위치했으며, 폭풍의 신 아다드(Adad)의 숭배 중심지였다. 이러한 배경은 리무시가 아카드 왕실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2. 수메르 도시 국가들의 반란 진압과 무자비한 통치
사르곤이 통합한 아카드 제국은 그의 사후에도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하려 했으나, 오랜 자치를 누렸던 수메르 도시 국가들은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키며 아카드 왕조에 도전했다. 리무시의 재위 기간 동안 가장 큰 과제는 바로 이러한 반란들을 잔혹하게 진압하고 제국의 권위를 재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는 움마(Umma)와 키.안(KI.AN)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후 승리 석비 파편(Victory Stele)을 세웠다. 이 비문은 리무시의 통치 방식이 얼마나 무자비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리무시, 세계의 왕이 우마와 키.안을 상대로 전투에서 승리하여 8,900명을 격파하고 3,540명의 포로를 잡았다. 또한 그는 우마의 총독 엔-X와 키.안의 총독 루갈-KA를 사로잡았다. 또한 그는 그들의 두 도시를 정복하고 둘 다의 성벽을 파괴했다. 또한 그는 그들의 두 도시에서 3,600명을 추방하고 전멸시켰다. 이 비문을 제거하는 자는 엔릴과 사마시 신이 그의 기반을 뽑아내고 그의 자손을 파괴할지어다.”
리무시는 수메르 도시 국가들에 대한 대량 학살과 대규모 파괴를 단행했으며, 자신의 파괴 행위를 꼼꼼하게 기록했다. 주요 수메르 도시들은 대부분 파괴되었고, 수메르인의 인명 피해는 엄청났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슈루파크(Shuruppak)만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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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풀 같은 장식을 덧댄 의복을 입은 아카드 궁수(고위 관료임을 나타냄) - 리무시의 승리 비석에서 |
다음 표는 리무시의 군사 작전으로 인한 수메르인들의 피해를 나타낸다 .
3. 엘람과 마르하시 원정
리무시의 군사 활동은 수메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엘람(Elam)과 마르하시(Marhashi, 아카드어로 ‘파라프슘, Parahshum’)를 상대로도 승리한 원정 기록을 남겼다. 이 원정에는 멜루하(Meluhha) 출신의 병사들도 참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기록은 비문에서 리무시를 “키시의 왕”으로 칭하기도 한다.
리무시의 후계자인 마니슈투슈(Manishtushu) 시대에 이르러 엘람은 아카드 군정관의 통치를 받게 되었는데, 이는 리무시의 엘람 원정이 비잔티움에 대한 확고한 영향력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원정들은 아카드 제국의 영향력이 메소포타미아 주변 지역으로 확장되었음을 시사한다.
4. 재위 기간과 암살
리무시는 기원전 2279년부터 기원전 2270년까지 약 9년 동안 아카드 제국을 통치했다. 그의 재위 기간은 아버지 사르곤의 뒤를 이어 제국의 초기 혼란을 수습하고 정복을 통해 안정화를 꾀한 시기였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갑작스러운 암살로 막을 내렸다. 리무시는 그의 관리들에게 암살당했으며, 심지어 재임 중에 인장이 박힌 비문에 “만약 누군가 그것을 잡는다면, 그는 살아있는 족장이 아니다”라고 위협적인 메시지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년은 비극적이었다. 그의 암살은 주로 ‘투구’로 묘사되는 봉신들의 도장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아카드 시대 초기에 기록되었으며, 후에 바빌로니아 역사가인 베로수스(Berossus)의 기록에 반영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형 마니슈투슈가 왕위에 올랐다. 리무시의 조카인 나람-신은 사후에 사르곤과 마니슈투슈를 신격화했지만, 삼촌 리무시를 신격화하지는 않았다.
5. 유물과 역사적 평가
리무시의 이름이 새겨진 석기 유물들이 몇 점 발견되었다. 대표적으로 영국 박물관(British Museum)에 소장된 석제 항아리 파편(BM 127340)에는 “리무시 / 루갈 / 키시(Rimush / LUGAL / KISH)”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유물은 기원전 2278년에서 227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며, 텔 브라크(Tell Brak)에서 발굴되었다.
리무시의 통치는 아카드 제국의 초창기 권력 다툼과 통합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아버지 사르곤이 이룩한 거대한 제국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매우 잔혹한 방법을 사용했지만, 이는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에서 제국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비록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지만, 그의 군사적 업적은 아카드 제국의 기틀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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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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