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틸루스(Quintillus, AD.?~270) : 로마 제국 제36대 황제(AD.270)
퀸틸루스(Quintillus, ?~270), ‘짧지만 분명한’ 과도기의 황제
퀸틸루스는 270년에 즉위하여 수 주에서 길어야 몇 달 남짓 재위한 로마 황제이다. 선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Claudius Gothicus, 214~270)의 사후에 권좌에 올랐고, 곧 다뉴브 방면 군단의 추대로 떠오른 아우렐리아누스(Aurelian, 214~275)와 권력 경쟁을 벌였다. 재위 기간의 길이와 최후의 정황이 사료마다 엇갈리지만, 270년 이탈리아 아퀼레이아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점과 선임K후임 배열(선임 클라우디우스, 후임 아우렐리아누스)은 일치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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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틸루스(Quintillus, AD.?~270) : 로마 제국 제36대 황제(AD.270) |
일리리쿰계 출신과 형제의 음영 속 부상
사료는 퀸틸루스가 일리리쿰계로, 대체로 파노니아 인페리오르의 시르미움 출생으로 전한다. 본래 낮은 신분으로 출발했으나, 형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268년에 즉위하면서 중앙 무대에 부상하였다. 클라우디우스 치세에 사르데니아 재무관(Procurator)으로 임명되었을 가능성이 거론되며, 황실 주변의 행정 경험이 즉위 전 경력의 큰 줄기를 이룬다.
즉위의 경위와 ‘두 개의 추대’가 만든 충돌
270년 클라우디우스가 사망하자, 누가 퀸틸루스를 추대한 것인지에 대해 사료가 갈린다. 에우트로피우스는 황제의 죽음 직후 병사들이 그를 추대했고 원로원이 이를 승인했다고 전하는 반면, 조나라스는 애초 원로원 자체가 그를 선출했다고 기록한다. 다만 클라우디우스와 함께 다뉴브 전선을 누비던 군단은 이 결정에 반대하거나 그 소식을 접하지 못했고, 그들의 사령관 아우렐리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하였다. 결과적으로 로마와 다뉴브 전선에서 ‘동시적 추대’가 발생하며 권력 충돌이 구조화되었다.
재위 기간의 길이를 둘러싼 상이한 기록
재위 길이에 관하여 고대 사료는 17일(에우트로피우스ㆍ제롬ㆍ조나라스), 77일(필로칼루스), 혹은 ‘수개월’(조시무스) 등으로 서로 다르게 전한다. 현대 연구는 그가 상당량의 동전을 주조할 시간을 확보했다는 점에 주목하여, ‘17’이라는 수치가 더 큰 숫자를 오독한 결과일 가능성을 높게 본다. 따라서 퀸틸루스의 통치는 ‘아주 짧았으나 극단적으로 짧지는 않았다’는 합리적 추정으로 수렴한다.
동전이 말해주는 통치의 흔적
그의 재위 기록은 빈약하지만, 동전 주조의 양과 범례는 즉위명이 정식으로 선포되고 통치의 외피가 작동했음을 말해 준다. 동전 전설(IMP C M AVR QVINTILLVS AVG)은 황제 칭호의 정합성을 보여주고, 주화의 상대적 풍부함은 최소한 몇 주 이상 행정과 재정 명령이 통했던 정황을 뒷받침한다. 이는 재위 길이에 관한 오독설을 보정하는 물질적 증거로 기능한다 .
엄격한 군기와 최후의 정황, 서로 다른 전승의 배열
최후에 관하여도 사료는 통일적이지 않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엄격한 군기에 반발한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고 전하며, 제롬은 아퀼레이아에서 살해되었다고만 기록한다. 조나라스와 안티오키아의 요한은 그가 스스로 혈관을 열어 자결했으며, 의사가 이를 도왔다는 전승을 전한다. 원인과 경위는 엇갈리지만, ‘장소가 아퀼레이아’였다는 점만은 공통적으로 합치한다.
아퀼레이아에서의 종말과 ‘단절의 정치’
아퀼레이아는 북이탈리아 방위의 관문이자 내전기의 상징적 도시였다. 퀸틸루스가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그가 중앙 정통성과 라인ㆍ다뉴브 전선 군심 사이의 단절을 끝내 봉합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즉위가 원로원과 일부 병력의 승인에 기대었으나, 다뉴브 군단이 추대한 아우렐리아누스의 현장 카리스마를 넘어서기는 어려웠다.
가족과 잔존 흔적, ‘두 아들’의 전승
전기류는 퀸틸루스가 두 아들을 두었다고 간략히 전한다. 그 외 가계의 세부나 후손의 행적은 거의 전하지 않으며, 그의 죽음과 함께 혈연 기반의 정치적 자산도 빠르게 소멸하였다. 짧은 재위는 가계 서사조차 본격화할 틈을 주지 않았다.
사료와 연구, 무엇을 믿고 어떻게 읽을 것인가
퀸틸루스를 다루는 고대 텍스트(에우트로피우스ㆍ제롬ㆍ조나라스ㆍ조시무스ㆍ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서로 다른 맥락에서 작성되었고, 정권 정당화나 도덕적 교훈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현대 연구는 동전ㆍ비문ㆍ연표를 통해 틈을 메우며, 재위 길이와 죽음의 원인 문제에서 ‘오독 가능성’과 ‘전승의 다원성’을 전제하는 접근을 권한다. 표준 참고로는 De Imperatoribus Romanis의 항목과 PLRE가 유용하다.
270년의 정국에서 본 퀸틸루스의 좌표
선임이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후임이 아우렐리아누스라는 간결한 배열은, 그의 재위가 ‘결정적 반격의 전주’와 ‘통합의 서막’ 사이에 낀 과도기의 순간이었음을 가리킨다. 클라우디우스가 고트와 알레만니를 꺾어 낸 바로 그 여세를, 아우렐리아누스가 갈리아ㆍ팔미라 수습으로 이어 간 가운데, 퀸틸루스는 짧은 그림자로만 남았다. 그가 남긴 메시지는 승패의 세부가 아니라, 합법성과 군심의 속도가 어긋날 때 제국 권력이 얼마나 취약해지는가에 대한 경고이다.
간단 연표
- 270년 :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사망 직후 퀸틸루스가 황제로 선포되다.
- 270년 : 다뉴브 전선의 군단이 아우렐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다.
- 270년 : 퀸틸루스의 재위가 수주~수개월로 기록되다(사료 상이).
- 270년 : 아퀼레이아에서 사망하다(살해ㆍ자결 등 전승 상이).
사료 길잡이와 읽을거리
퀸틸루스 재위와 최후의 핵심 정보는 요약 전기와 동전학 연구에서 교차 확인할 수 있다. 맨더스(Manders)의 주화 연구, 반키크(Banchich)의 DER 항목, PLRE는 재위 길이ㆍ추대 경로ㆍ사망 전승의 차이를 맥락 속에서 정리하는 데 유용하다. 단일 전승에 의존하기보다 다층 자료의 합집합을 통해 ‘짧지만 분명한’ 사실 골격을 재구성하는 태도가 권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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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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