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카스(Phocas, AD.547~610) : 동로마 제국 제65대 황제(AD.602~610)
- Latin : Focas / Ancient Greek : Φωκάς / romanized : Phōkás
- 출생 : 547년 / 트라키아(Thracia) 혹은 카파도키아(Cappadocia)
- 사망 : 610년 10월 5일 / 콘스탄티노플
- 모친 : 도멘치아(Domentzia)
- 배우자 : 레온티아(Leontia)
- 자녀 : 도멘치아(Domentzia)
- 재위 : 602년 11월 23일 ~ 610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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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카스(Phocas, AD.547~610) : 동로마 제국 제65대 황제(AD.602~610) |
폭풍 속에서 황위에 오른 백부장 : 동로마 포카스 황제의 비극적 치세 (602-610)
7세기 초, 동로마 제국은 격동의 시기를 맞이했다. 마우리키우스(Maurice, 539–602) 황제의 20년에 걸친 안정적인 통치도 끝내 군사적 불만과 재정적 압박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이 혼란 속에서 평범한 백부장(centurion) 신분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약 8년간(602–610) 동로마 제국을 통치한 인물이 바로 포카스(Phocas, 사망 610)이다. 그의 등극은 하층 군인의 반란으로 시작된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며, 그의 통치는 제국을 혼란과 외침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고 결국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는 비운의 시기였다.
1. 평범한 병사에서 반란의 지도자로 : 포카스의 황위 등극 배경
포카스의 정확한 출생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트라키아(Thracia) 또는 카파도키아(Cappadocia) 출신으로 추정되며, 서기 547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평범한 군인이었으며, 백부장(centurion)이라는 하급 장교 신분으로 다뉴브 국경 지역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로마 군인들 사이에서 크게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마우리키우스 황제에 대한 군인들의 불만과 반란이었다. 마우리키우스는 유능한 군사 전략가이자 행정가였지만, 장기간의 전쟁으로 인한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군인들의 급여를 삭감하고 무리한 명령을 내리면서 군부의 불만을 샀다. 특히 602년 겨울, 마우리키우스 황제가 다뉴브 국경 지대의 병사들에게 겨울 숙영지(winter quarters)로 돌아가지 않고 다뉴브 강 북쪽의 이민족 지역에서 야영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병사들의 불만은 폭발하여 대규모 폭동으로 이어졌다.
이때 병사들은 포카스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추대하고 황제로 선포했다. 포카스가 어떻게 하급 장교의 신분으로 이러한 반란을 이끌게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그의 거친 성격과 강한 의지가 병사들의 지지를 얻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반란군은 파울리누스(Paulinus)와 스투디움(Studium) 수도원에 합류하며 병력을 늘렸고, 빠른 속도로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수도의 시민들 역시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재정 정책에 대한 불만이 컸기에, 반란군에 저항하지 않았다. 마우리키우스 황제는 가족들과 함께 도망쳤으나, 결국 포카스의 병사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602년 11월 23일, 포카스는 정식으로 황제에 즉위했다. 이로써 그는 로마 제국 역사상 거의 유일하게 순전히 병사들의 반란에 의해 황제에 오른 인물이 되었다. 그의 즉위는 황실의 전통이나 원로원의 지지가 아닌, 군사적 쿠데타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2. 포카스의 통치 : 피로 물든 권력과 상반된 평가 (602-610)
포카스의 치세는 내부적으로는 폭압적인 통치와 피비린내 나는 숙청으로 점철되었고, 외부적으로는 제국의 국력이 급격히 약화되는 시기였다.
1) 잔혹한 숙청과 폭압 정치
포카스는 권력을 잡자마자 자신의 황위를 위협할 수 있는 모든 잠재적 경쟁자들을 제거했다. 그는 전임 황제 마우리키우스를 비롯하여 그의 다섯 아들을 자신의 눈앞에서 차례로 처형하는 잔혹한 모습을 보였다. 요한네스 니키우(John of Nikiu)의 기록에 따르면, 포카스는 마우리키우스의 시신에서 성기까지 제거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그는 공포 정치를 통해 황권을 확립하려 했다. 그의 통치는 이후 동로마 역사가들에 의해 잔인하고 무능하며 폭압적인 시기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헤라클리우스(Heraclius) 황제 시대에 작성된 것이 많아, 포카스를 의도적으로 악마화하여 헤라클리우스의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경향이 반영되었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실제로 일부 초기 문헌에서는 그를 ‘자유의 회복자’로 묘사하기도 했다.
2)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
흥미롭게도 포카스는 로마 교황청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세(Gregory the Great, 540–604)는 포카스를 ‘경건하고 자비로운 군주’로 칭송하며 그를 ‘자유의 회복자’라고 불렀다. 이는 동로마 황제가 로마 교황에 대해 특권을 부여하고 지원하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607년 2월 19일, 포카스는 로마 교황 보니파시오 3세(Boniface III, 사망 607)를 ‘모든 교회의 수장(Head of all Churches)’이자 ‘보편 주교(Universal Bishop)’로 인정하는 황제 칙령을 발표했다 .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키리아쿠스(Cyriacus)가 ‘보편 주교’ 칭호를 사용하려는 시도를 막고, 로마 교황의 우위를 공고히 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또한 그는 로마 포룸(Roman Forum)에 자신의 청동 기마상을 세우고, 이탈리아에 남은 제국의 속주들에 대한 권위를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포카스의 원통(Column of Phocas)은 로마에 남아있는 마지막 로마 황제 기념물이다.
3) 황제들의 수염 문화의 시작
포카스의 재위는 로마 황제들의 상징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e the Great, 306–337) 이래 로마 황제들은 대체로 수염을 깎은 모습으로 주화에 새겨졌다. 그러나 포카스는 자신의 주화에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의 이후 거의 모든 동로마 황제들도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묘사되어, 이는 비잔티움 황제들의 새로운 관례가 되었다.
3. 제국의 위기 심화 : 사산조 페르시아의 대대적 침공
포카스의 가장 치명적인 실패는 대외 정책, 특히 동방의 숙적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관계에서 드러났다. 마우리키우스 황제는 페르시아 내전에 개입하여 호스로 2세(Khosrow II)를 도운 대가로 평화 조약과 영토 할양을 이끌어냈었다. 그러나 포카스가 마우리키우스를 살해하자, 호스로 2세는 이를 구실 삼아 로마 제국을 ‘선량한 황제 마우리키우스의 복수’라는 명분으로 침공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는 로마 제국의 동부 국경을 전면적으로 침공하여 아르메니아(Armenia), 시리아(Syria), 메조포타미아(Mesopotamia) 등 광대한 영토를 빠른 속도로 점령했다. 포카스의 군대는 페르시아의 침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포카스의 잔혹한 통치와 이로 인한 군부 및 귀족층의 불만은 제국의 방어력을 약화시켰고, 페르시아는 607년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소아시아를 약탈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608년에는 동로마 제국의 핵심 곡창 지대인 시리아 지역의 카파도키아까지 침공했다. 이는 제국에 엄청난 위협과 파괴를 안겼다. 포카스는 군사적 무능함을 보였고, 전임 마우리키우스가 다져놓았던 제국의 안정은 삽시간에 무너져 내렸다.
4. 헤라클리우스의 반란과 포카스의 비참한 몰락 (610)
포카스의 폭정, 페르시아의 위협, 그리고 제국 재정의 고갈은 내부 불만을 극대화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란의 불씨는 북아프리카 카르타고(Carthage)의 총독(Exarch) 헤라클리우스(Heraclius, 575–641)에게서 시작되었다. 헤라클리우스는 막대한 병력과 함대를 조직하고 곡물 공급을 중단함으로써 포카스 체제를 압박했다. 608년부터 그는 아들 헤라클리우스와 조카 니케타스(Nicetas)를 보내 동서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게 했다.
헤라클리우스의 아들 헤라클리우스는 해군을 이끌고 610년 10월 3일 콘스탄티노폴리스 외곽에 도착했다. 포카스에 대한 민심은 완전히 돌아선 상태였고, 수도의 귀족과 시민들은 포카스를 버리고 헤라클리우스에게 협력했다. 심지어 황실 경비대(Excubitors) 사령관인 프리시쿠스(Priscus)마저 포카스에게 등을 돌리고 헤라클리우스에게 가담했다. 포카스는 결국 610년 10월 5일, 헤라클리우스에 의해 체포되었다.
헤라클리우스는 포카스를 붙잡아 “천벌을 받을 자, 그렇게 통치했느냐?”라고 질책했다. 이에 포카스는 “네가 더 잘 다스릴 수 있겠느냐?”라고 비아냥거렸다. 포카스의 이 대답은 헤라클리우스를 격분시켰고, 그는 그 자리에서 포카스의 목을 베어 처형했다. 요한네스 니키우의 기록에 따르면, 헤라클리우스는 포카스가 포티우스(Photius)의 아내를 강간했다는 혐의 때문에 그의 시신에서 성기까지 제거했다고 덧붙인다.
포카스의 시신은 끔찍하게 훼손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히포드롬에서 공개적으로 조리돌림 당했다. 이로써 폭정으로 점철되었던 포카스의 짧고 격렬했던 치세는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다.
5. 포카스의 유산과 로마 역사에 미친 영향
포카스의 통치기는 로마 제국사에서 가장 어둡고 비극적인 시기 중 하나로 기록된다.
- 동로마 제국의 심각한 약화 : 그의 무능한 대외 정책과 내부적 분열은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제국 영토를 광범위하게 상실하게 만들었고, 이는 제국의 근간을 흔들었다.
- 헤라클리우스 왕조의 서막 : 포카스의 죽음은 헤라클리우스 왕조의 시작을 알렸고, 헤라클리우스는 제국의 대대적인 개혁과 페르시아와의 대규모 전쟁을 통해 제국의 명운을 걸어야 했다.
- 정치적 불안정성의 상징 : 포카스의 등극과 몰락은 5세기 후반부터 이어져 온 로마 제국의 정치적 불안정성과 황위 계승의 혼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는 로마 황제들이 더 이상 혈통이나 귀족의 지지가 아닌, 군사적 무력에 의해 결정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 교권과의 관계 : 로마 교황과의 긴밀한 관계는 그의 치세에 드문 긍정적인 평가를 가져왔지만, 제국 전반에 걸친 혼란을 상쇄할 수는 없었다.
- 후대의 악평 : 비록 그에 대한 기록이 편향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포카스를 제국의 위기를 심화시킨 폭군으로 평가하며, 그의 시대를 7세기 로마 제국 쇠퇴의 결정적인 계기로 보고 있다.
포카스는 군사적 성공이 반드시 유능한 통치로 이어지지 않음을 보여준 황제였다. 그의 통치는 로마 제국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이후 제국은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시작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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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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