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5일 금요일

아비투스(Avitus, AD.c.380~457) : 서로마 제국 제55대 황제(AD.455~456)

아비투스(Avitus, AD.c.380~457) : 서로마 제국 제55대 황제(AD.455~456)

 
  • 마르쿠스 메킬리우스 플라비우스 에파르키우스 아비투스(Marcus Maecilius Flavius Eparchius Avitus)
  • 출생 : 기원후 380년경 / 아르베르니스(Arvernis)
  • 사망 : 기원후 456/457/ 아르베르니스(Arvernis)
  • 부친 : 아그리콜라(Agricola)
  • 자녀 : 아그리콜라(Agricola), 에크디키우스(Ecdicius), 파피아닐라(Papianilla)
  • 재위 : 기원후 45579~ 4561017

아비투스(Avitus, AD.c.380~457) : 서로마 제국 제55대 황제(AD.455~456)
아비투스(Avitus, AD.c.380~457) : 서로마 제국 제55대 황제(AD.455~456)
 
로마 제국은 5세기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멸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내부의 정치적 혼란과 외부의 게르만족 침입은 제국을 끊임없이 위협했다.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서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올랐지만, 2년도 되지 않는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온갖 비극을 겪으며 물러나야 했던 인물이 있다. 바로 갈리아 귀족 출신의 아비투스(Avitus)이다. 그는 제국의 수도 로마의 지지가 아닌 서고트족이라는 외부 세력의 도움으로 황제가 되었고, 결국 로마 귀족과 군부의 반발에 부딪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의 삶은 5세기 서로마 제국이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그리고 황제의 권력이 얼마나 외부의 힘에 좌우되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아비투스의 생애, 권력 장악 과정, 그리고 그의 비극적인 최후와 역사적 의미를 자세히 살펴본다.
 

1. 갈리아 귀족의 성장 : 명문가와 교육

 
마르쿠스 메킬리우스 플라비우스 에파르키우스 아비투스(Marcus Maecilius Flavius Eparchius Avitus)는 서기 380년경 갈리아 지방 아르베르니아(Arvernia)의 유명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막강한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외조부도 높은 관직에 있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특히 법학을 전공했으며,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그의 스승에게서 로마 문학과 법률에 대한 깊은 지식을 습득했다. 이러한 배경은 그에게 폭넓은 교양과 뛰어난 웅변 능력을 부여했다.
 
아비투스는 청년 시절 군대에 입대하여 갈리아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그는 421년에 트리부누스 엣 노타리우스(tribunus et notarius)라는 고위 군직을 역임했고, 424년에는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Flavius Aetius) 장군 휘하에서 복무했다. 아에티우스는 훗날 아비투스의 중요한 후원자가 된다. 그의 군사적 재능과 뛰어난 외교술은 갈리아 지역의 게르만 부족들과의 관계에서 빛을 발했다. 그는 여러 차례 외교 사절로 활동하며 평화 협상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고, 특히 서고트족 왕 테오도리크 1(Theodoric I)와도 친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이러한 배경은 훗날 그가 황제 자리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2. 고위 관료의 삶 : 갈리아의 평화와 안정

 
군사적 경력을 쌓은 후 아비투스는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437, 그는 고향 아르베르니아에서 집정관(consul)을 지내며 갈리아 지방의 고위 행정가로서 활동했다. 이후 그는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의 지지 아래 439년에는 이탈리아 군의 마기스테르 밀리툼(magister militum)으로 임명되어 사실상 서로마 제국의 군사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 시기 아비투스는 갈리아에 주둔하며 서고트족과의 복잡한 관계를 관리했다. 그는 이들을 로마의 동맹으로 묶어두고, 다른 게르만 부족들의 침입을 막는 데 주력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갈리아 지방은 다른 로마 속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454, 서로마 제국의 운명을 뒤흔들 두 사건이 발생했다. 훈족의 위협으로부터 제국을 지켜냈던 영웅 아에티우스가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Valentinian III)에 의해 암살당했고, 이어서 발렌티니아누스 3세 자신도 455년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Petronius Maximus)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 사건들로 서로마 제국은 리더십 공백과 함께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3. 황제로서의 등극 : 서고트족의 지지 (455)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황제 자리를 찬탈한 직후, 반달족(Vandals)의 겐세리크(Genseric) 왕은 로마를 약탈하는 대사건을 일으켰다. 이 약탈로 로마는 초토화되었고, 서방 로마 제국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상황에서 갈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아비투스는 서고트족의 왕 테오도리크 2(Theodoric II, 테오도리크 1세의 아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황제 후보로 떠올랐다.
 
45579, 아비투스는 서고트족과 갈리아 로마 귀족들의 지지 아래 아를(Arles)에서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그의 황제 등극은 제국의 수도 로마나 동로마 제국의 황제 마르키아누스(Marcian)의 공식적인 승인 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정통성에 큰 문제가 있었다. 아비투스는 테오도리크 2세의 강력한 군사력을 등에 업고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로마로 입성했다. 그는 제국의 수도 로마에 자신의 황제 궁정을 열었지만,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은 그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가 야만족의 힘으로 황제가 되었다고 비난하며 경멸적인 시선을 보냈다.
 

4. 짧은 통치와 실책 (455~456)

 
아비투스의 통치는 여러 면에서 난관에 봉착했다. 그는 로마를 약탈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재건하려 노력했지만, 재정적 어려움이 컸다. 또한, 야만족 동맹인 서고트족의 힘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은 로마 시민들의 반발을 더욱 심화시켰다.
 
  • 재정적 위기 : 로마를 복구하고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자금이 부족했다. 아비투스는 결국 로마의 공공 기념물에서 청동 조각상을 벗겨내어 동전으로 주조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그가 로마의 문화유산을 훼손한다는 비난을 불러왔다.
  • 리키메르(Ricimer)의 부상 : 아비투스의 가장 큰 실책 중 하나는 게르만족 장군 리키메르(Ricimer)의 영향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것이었다. 리키메르는 로마군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능력은 아비투스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비투스는 리키메르에게 서고트족을 이끌고 시칠리아(Sicily)를 침공한 반달족과 싸우도록 명령했다. 리키메르는 456년 두 번의 중요한 해상 전투에서 반달족을 격파하며 명성을 쌓았다. 이 승리는 아비투스에게 잠깐의 지지를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리키메르의 권력을 더욱 키워주었고, 이는 훗날 아비투스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5. 로마 귀족과 군부의 반발, 그리고 비참한 최후

 
리키메르는 서고트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비투스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던 로마 귀족 및 군부 세력과 결탁하여 아비투스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아비투스가 서고트족이라는 외부 세력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로마 재정을 낭비한다는 비난을 퍼부었다. 리키메르는 아비투스가 로마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에 불복하고 로마와 서고트족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자, 군사 행동에 나섰다.
 
4561017, 리키메르와 서방 로마 제국의 다른 군 사령관 마요리아누스(Majorian)는 피아첸차(Piacenza) 근처에서 아비투스의 군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아비투스는 참패했고, 결국 붙잡혔다.
 
아비투스는 리키메르에 의해 황제 자리에서 강제로 끌어내려졌다. 그의 목숨은 보존되었으나, 피아첸차 주교로 서임되는 치욕을 겪었다. 그러나 이는 리키메르의 술책에 불과했다. 로마 원로원은 그의 죽음을 요구했으며, 아비투스는 로마 귀족들로부터 살해 위협을 느끼자 알프스 산맥을 넘어 갈리아로 도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도피 중 457년에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굶주림, , 또는 리키메르가 보낸 자객에 의한 살해 등 여러 설이 있지만, 명확한 기록은 없다.
 

6. 역사적 의미와 유산

 
아비투스는 서로마 제국 멸망 직전, 제국의 취약성과 외세 의존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황제이다. 그의 등극은 로마 내부의 정치적 역학 관계가 얼마나 혼란스러웠으며, 황제의 자리가 강력한 군부 세력의 입김에 좌우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는 로마 본토의 지지 기반이 약했던 한계 때문에 제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없었다.
 
아비투스는 로마 귀족들이 로마 황실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갈리아 귀족들의 입지가 강해지던 시대를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죽음 이후, 서로마 제국은 리키메르와 같은 게르만 장군들에 의해 실질적으로 통제되는 허수아비 황제들이 연이어 등장하게 된다. 아비투스의 짧고 비운의 통치는 서로마 제국이 서서히 종말을 향해 가고 있음을 알리는 또 하나의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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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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