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리우스(Olybrius, AD.?~472) : 서로마 제국 제59대 황제(AD.472)
- 아니키우스 올리브리우스(Anicius Olybrius)
- 출생 : 미상 / 로마
- 사망 : 기원후 472년 11월 2일
- 배우자 : 플라키디아(Placidia)
- 자녀 : 아니키아 줄리아나(Anicia Juliana)
- 재위 : 기원후 472년 7월 11일 ~ 11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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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리우스(Olybrius, AD.?~472) : 서로마 제국 제59대 황제(AD.472) |
로마 제국, 특히 서방 로마 제국은 5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멸망의 마지막 길을 걷고 있었다. 끊임없이 교체되는 황제들, 그리고 제국의 실권을 쥐고 흔드는 강력한 게르만족 장군들의 존재는 더 이상 로마 제국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없음을 암시했다. 올리브리우스(Olybrius)는 바로 이 시기, 약 4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서로마 제국을 통치했던 비운의 황제이다. 그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황제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제국의 실권자 리키메르(Ricimer)의 꼭두각시 황제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실권은 없었지만, 깊은 종교심을 가지고 황제로서의 역할에 임하려 했던 독특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올리브리우스의 복잡한 배경, 황제 등극의 과정, 그리고 그의 짧고 쓸쓸했던 치세와 죽음, 그리고 그가 남긴 미미하지만 흥미로운 흔적들을 자세히 살펴본다.
1. 로마 명문가 출신, 황실과의 연결
올리브리우스는 로마 시대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귀족 가문 중 하나인 아니키우스 가문(Anicia gens) 출신이다.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 수 없지만, 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Rome)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제국의 고위 관직을 여러 차례 역임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배경은 그에게 로마 정치 무대에서 중요한 위치를 보장해 주었다.
올리브리우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연결 고리는 바로 그의 결혼이었다. 그는 455년 반달족(Vandals)의 로마 약탈 이전에 발렌티니아누스 3세(Valentinian III, 재위 425~455) 황제의 딸 플라키디아(Placidia)와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올리브리우스는 발렌티니아누스 왕조(Valentinianic dynasty)와 테오도시우스 왕조(Theodosian dynasty)라는 당대 가장 유력한 두 황실 가문과 혼인으로 맺어지게 되었다. 이는 그가 로마의 원로원 귀족과 황실을 모두 아우르는 인물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훗날 그가 황제 후보로 거론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2. 두 차례의 황제 후보, 그리고 혼란 속의 망명
올리브리우스의 인생은 제위를 둘러싼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얽혀 있었다. 455년 반달족의 겐세리크(Gaiseric) 왕은 로마를 약탈하며 플라키디아 황후와 그녀의 두 딸(올리브리우스의 아내 플라키디아 포함)을 포로로 끌고 갔다. 겐세리크는 로마 황실과의 연결 고리가 있는 올리브리우스를 서방 로마 제국의 황제로 옹립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이는 그의 아들 후네리크(Huneric)가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다른 딸과 결혼하여 올리브리우스와 인척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겐세리크는 이듬해 플라키디아를 풀어주었지만, 그의 올리브리우스 황제 옹립 시도는 당시 서방 로마 제국의 실권자였던 리키메르에 의해 저지되었다. 리키메르는 461년 리비우스 세베루스(Libius Severus)를 황제로 옹립했다.
하지만 올리브리우스의 입지는 여전히 견고했다. 그는 464년 로마 최고의 명예직인 집정관(consul)을 지내는 등 황실의 중요한 일원으로 계속 활동했다.
3. 리키메르의 꼭두각시 황제 등극 (472년)
472년, 서방 로마 제국은 또다시 황제를 둘러싼 격렬한 권력 다툼에 휩싸였다. 당시 황제 안테미우스(Anthemius, 재위 467~472)와 실권자 리키메르 사이의 갈등은 내전으로 번졌다. 리키메르는 안테미우스를 제거하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려 했다. 이때 그의 눈에 들어온 인물이 바로 올리브리우스였다. 올리브리우스는 황실과의 혈연적 연결과 오랜 로마 귀족 가문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에, 리키메르는 그를 자신의 꼭두각시 황제로 삼기에 이상적인 인물로 보았다.
472년 7월 11일, 리키메르는 안테미우스를 처형하고 올리브리우스를 서로마 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옹립했다. 그러나 올리브리우스의 등극은 동로마 제국 황제 레오 1세(Leo I, 재위 457~474)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레오 1세는 올리브리우스를 겐세리크와 리키메르의 꼭두각시 황제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올리브리우스의 황제위가 서방 제국 내에서도 제한적인 정통성만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실질적인 권력은 리키메르의 손에 있었고, 올리브리우스는 이름뿐인 황제였다.
4. 짧고 특이한 통치 : 종교적 경건함과 새로운 화폐
올리브리우스의 통치 기간은 472년 7월 11일부터 그의 사망일인 11월 2일까지 불과 4개월 남짓이었다. 그의 치세는 매우 짧고 특별한 사건 없이 흘러갔다. 그가 황제가 된 직후인 8월 9일 또는 19일, 리키메르가 사망하면서 그의 조카 군도바드(Gundobad)가 리키메르의 뒤를 이어 서방 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군사 지도자가 되었다. 올리브리우스는 군도바드의 그림자 아래에서 제국의 명목상의 수장으로 남았다.
그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그의 깊은 종교심이었다. 올리브리우스는 동방 기독교의 칼케돈 신경(Chalcedonian Christianity)을 신봉하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의 재위 기간에 발행된 동전들은 이러한 그의 종교적 성향을 잘 보여준다. 그는 전통적인 로마 황제 동전 문구인 “SALVS REIPVBLICAE”(국가의 안녕) 대신 “SALVS MVNDI”(세계의 안녕)라는 문구를 새겨 넣었다. 이는 그의 관심사가 제국의 세속적인 번영보다는 영적인 구원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또한 그의 동전에는 전임 황제들의 동전에 흔히 보이던 투구와 창 같은 군사적 상징들이 사라져 있었다. 이는 그가 군사 문제에는 관심이 적었음을 시사한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자신의 궁전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로마 제국의 황후 풀케리아(Pulcheria)가 451년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의 장소로 선택했던 성 에우페미아(Saint Euphemia) 교회를 복원하는 데도 기여했다. 이는 그가 로마의 세속 권력보다 종교적 경건함을 중요하게 여겼고, 동로마 제국의 종교적 흐름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5. 병사(病死)와 역사적 유산
올리브리우스는 472년 11월 2일, 수종(dropsy)으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서로마 제국은 또다시 황제 없는 공백기에 빠졌다. 그의 재위는 비록 짧고 실권 없는 기간이었지만, 그 후임으로 황제가 된 글리케리우스(Glycerius)는 제국의 동부와 서부 황실을 연결하는 명문가 출신도 아니었기에, 올리브리우스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직전 나타난 마지막 황실 혈통 출신 황제로 볼 수 있다.
올리브리우스는 로마 역사에서 미미한 존재로 기록되지만, 그의 독특한 종교적 경건함과 실권 없는 황제의 비애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1707년 아포스톨로 제노(Apostolo Zeno)와 피에트로 파리아티(Pietro Pariati)가 올리브리우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오페라 『플라비우스 아니키우스 올리브리우스(Flavio Anicio Olibrio)』를 작곡했지만, 이는 실제 역사와는 거리가 먼 허구적인 내용이었다.
그의 통치는 서로마 제국이 권력의 통제권을 완전히 잃고, 명목상의 황제가 게르만 군벌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시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올리브리우스는 멸망 직전의 서로마 제국이 얼마나 깊은 혼란과 무기력함에 빠져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그림자 황제'의 전형이자, 제국 최후의 비극적인 순간들을 목격한 증인으로 역사에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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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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