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5일 금요일

글리케리우스(Glycerius, AD.?~c.480) : 서로마 제국 제60대 황제(AD.473~474)

글리케리우스(Glycerius, AD.?~c.480) : 서로마 제국 제60대 황제(AD.473~474)

 
  • 글리케리우스(Glycerius)
  • 출생 : 미상 / 달마티아
  • 사망 : 기원후 480년경 / 달마티아
  • 재위 : 기원후 47333/5~ 474624

글리케리우스(Glycerius, AD.?~c.480) : 서로마 제국 제60대 황제(AD.473~474)
글리케리우스(Glycerius, AD.?~c.480) : 서로마 제국 제60대 황제(AD.473~474)


 
로마 제국의 역사는 장대하지만, 그 마지막 시기는 비극으로 점철되어 있다. 특히 서로마 제국은 5세기 중반에 이르러 멸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고, 황제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유능한 게르만족 장군들의 손에 좌지우지되었다. 글리케리우스(Glycerius)는 바로 이 시기, 서기 473년부터 474년까지 불과 13개월 남짓 서로마 제국을 통치했던 비운의 황제이다. 그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으며, 결국 무력한 상태에서 제위에서 물러나 수도사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짧은 재위는 서로마 제국이 얼마나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는지, 그리고 황제 권력이 얼마나 무력해졌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다. 이 글에서는 글리케리우스의 생애와 등극, 그의 미약했던 통치, 그리고 비극적인 몰락 과정을 자세히 살펴본다.
 

1. 배경 : 서로마 제국 멸망 직전의 혼란 (5세기 후반)

 
글리케리우스가 황제가 되었던 5세기 후반은 서로마 제국에 있어 존망의 위기가 코앞으로 다가온 절박한 시기였다. 472, 서로마 제국의 실권자 리키메르(Ricimer)가 사망한 후 제국은 리더십 공백과 함께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명목상의 황제들은 게르만 장군들의 꼭두각시로 전락했고, 영토는 줄어들고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다. 야만족 부족들은 제국 영토를 자유롭게 침입하며 로마인들을 약탈하고 괴롭혔다. 중앙 정부는 각 속주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황제의 명령은 제국의 수도 로마 근교에서조차 제대로 먹히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로마 제국의 마기스테르 밀리툼(magister militum)이자 리키메르의 조카였던 군도바드(Gundobad)가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했다. 군도바드는 그의 삼촌처럼 스스로 황제에 오르기보다는, 꼭두각시 황제를 옹립하여 자신의 실권을 유지하려 했다.
 

2. 초기 경력과 군도바드의 선택

 
글리케리우스의 초기 생애와 경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그는 올리브리우스(Olybrius) 황제(재위 472) 재위 기간 동안 황제의 직속 경호대인 코메스 도메스티코룸(comes domesticorum)을 역임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그가 로마 궁정 내에서 어느 정도 고위직에 있었으며, 황제와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고위 관리였지만, 군사적 재능이나 정치적 수완이 특별히 뛰어나다는 기록은 없다.
 
47211월 올리브리우스 황제가 사망한 후, 서로마 제국은 황제 없는 공백기가 지속되었다. 이때 군도바드는 자신의 꼭두각시가 되어줄 새로운 황제를 찾고 있었다. 당시 군도바드에게는 섭정을 맡을 다른 대안들이 많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글리케리우스를 선택했다. 47333일 또는 5, 글리케리우스는 군도바드의 추대로 라벤나(Ravenna)에서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이는 황제의 권력이 군부 실세에 의해 완전히 좌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였다.
 

3. 황제로서의 재위(473~474) : 동방의 외면 속 미약한 통치

 
글리케리우스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지만, 그의 통치는 동방 로마 제국으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동로마 황제 레오 1(Leo I, 재위 457~474)는 글리케리우스를 군도바드가 옹립한 찬탈자로 간주했다. 레오 1세는 글리케리우스를 인정하지 않는 대신, 율리아누스 네포스(Julius Nepos, 재위 474~475/480)를 서로마 황제로 지명하고 그에게 군대를 주어 서방으로 보내 진압하게 했다. 이는 서방 로마 제국의 황제마저 동방 황제의 승인이 있어야 정통성을 얻을 수 있었다는 당시의 국제 관계를 보여준다.
 
글리케리우스의 재위 기간 동안의 기록은 매우 단편적이며, 그가 제국의 실권을 제대로 행사했음을 보여주는 내용은 거의 없다. 몇몇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그의 통치는 다음과 같다.
 
  • 외세 침략 방어 : 글리케리우스는 비록 실권이 없었지만, 일부 지역에서 외세 침략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동고트족(Ostrogoths)의 지도자 위디미르(Vidimir)는 이탈리아 침략을 계획하고 있었다. 글리케리우스는 위디미르를 설득하여 이탈리아를 침략하는 대신, 2천 솔리두스(solidi)라는 거액의 금화 뇌물을 주어 그들의 침략 방향을 갈리아(Gaul)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또한 서고트족(Visigoths)의 이탈리아 침공 시도도 지역 사령관들의 노력으로 저지되어 이들을 갈리아로 돌려보냈다.
  • 긍정적인 평가 : 일부 당대 역사가들은 글리케리우스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9세기의 역사가 테오파네스(Theophanes)는 그를 결코 천하지 않은 인물(not despicable man)”이라고 묘사했다. 파비아(Pavia)의 주교 엔노디우스(Ennodius)비타 성 에피파니우스(Vita St. Epiphanius)에서 글리케리우스가 많은 사람의 안녕을 위해 수많은 일을 했다고 기록했다. 특히 에피파니우스 주교의 중재로 자신이 불만을 품었던 인물들을 사면하는 관용을 베풀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들은 그가 통치자로서 어느 정도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글리케리우스는 제국의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이나 실권이 없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4. 퇴위와 수도사로서의 삶 (474)

 
글리케리우스의 짧았던 통치는 율리아누스 네포스(Julius Nepos)의 등장으로 막을 내렸다. 레오 1세가 지지하는 율리아누스 네포스가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격해 오자, 글리케리우스는 궁지에 몰렸다. 게다가 그를 황제로 옹립했던 군도바드가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황제위를 주장하는 새로운 황제를 지지하기 위해 갈리아로 떠나면서 글리케리우스는 군사적 지지 기반마저 상실했다.
 
결국 글리케리우스는 저항할 의지를 잃었다. 474624, 그는 아무런 저항 없이 제위에서 물러났다. 그의 뒤를 이어 율리아누스 네포스가 서로마 황제 자리에 올랐다.
 
글리케리우스는 퇴위 후 살로나(Salona)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이는 로마 역사상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인물에게 주어지는 흔치 않은 형태의 평화로운 은퇴였다. 그가 실제 종교적 열정으로 주교가 되었는지, 아니면 강제로 임명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5. 말년과 미스터리한 최후 (c.480)

 
살로나의 주교가 된 글리케리우스의 말년에 대한 기록 역시 매우 희미하다. 그는 474년 이후에 사망했으며, 아마도 480년경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추측이 존재한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글리케리우스가 율리아누스 네포스의 암살(480)에 연루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은 불확실하며, 당시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그는 간혹 밀라노(Milan)의 대주교 글리케리우스(Glycerius)와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이는 정확한 정보가 아니다.
 

6. 역사적 평가 : 멸망 직전의 그림자 황제

 
글리케리우스는 서로마 제국 멸망 직전의 혼란스러운 시기를 대표하는 황제 중 한 명이다. 그는 리키메르나 군도바드와 같은 강력한 게르만족 장군들의 그림자에 가려진 그림자 황제에 불과했다. 그의 통치는 제국의 무력함과 권위 상실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이다. 그는 스스로 제국의 운명을 바꿀 만한 힘이 없었으며, 단지 외세의 침략 방향을 돌리거나 제한된 범위에서 선정을 베푸는 데 그쳤다.
 
그의 짧은 재위와 평화로운 퇴위, 그리고 주교로의 전환은 로마 제국의 마지막 단계에서 황제의 권위가 얼마나 허구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글리케리우스의 이야기는 서로마 제국이 종말을 향해 나아가던 시기의 암울한 분위기를 극명하게 드러내며, 역사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비운의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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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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