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테미우스(Anthemius, AD.c.420~472) : 서로마 제국의 제58대 황제(AD.467~472)
- 프로코피우스 안테미우스(Procopius Anthemius)
- Ancient Greek : Προκόπιος Ανθέμιος, Prokópios Anthémios
- 출생 : 기원후 420년경 / 콘스탄티노플
- 사망 : 기원후 472년 7월 11일 / 로마
- 배우자 : 마르키아 에우페미아(Marcia Euphemia)
- 자녀 : 알리피아(Alypia), 안테미우스(Anthemius), 안테미올루스(Anthemiolus), 마르키안(Marcian), 로물루스(Romulus)
- 재위 : 기원후 467년 4월 12일 ~ 472년 7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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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테미우스(Anthemius, AD.c.420~472) : 서로마 제국의 제58대 황제(AD.467~472) |
로마 제국은 5세기 중반에 이르러 서방 지역의 통제권을 점차 상실하고 멸망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의 시기, 서방 로마 제국에 동방 로마 제국의 지지를 등에 업고 등극한 황제가 있었다. 바로 안테미우스(Anthemius)이다. 467년부터 472년까지 서방을 통치했던 그는 동방 출신의 귀족이자 강력한 황실과 연결된 인물이었다. 그는 서로마 제국의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기 위해 유능한 정책과 야심 찬 군사 작전을 시도했지만, 결국 제국의 실권을 쥐고 있던 게르만 장군 리키메르(Ricimer)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등장은 서로마 제국의 부활을 위한 마지막 시도이자, 그 실패는 제국 멸망의 불가피성을 암시하는 비극이었다. 이 글에서는 안테미우스의 생애와 등극, 제국 재건을 위한 노력, 그리고 그를 삼킨 로마의 권력 암투를 자세히 살펴본다.
1. 동방 엘리트의 성장 : 학식과 혈통
플라비우스 프로코피우스 안테미우스(Flavius Procopius Anthemius)는 420년경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서 태어났다. 그는 동로마 제국에서 수많은 고위 관료와 군사령관을 배출한 명문 프로코피우스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외할아버지 안테미우스는 동방의 프라이토리안 프리펙트(praetorian prefect)이자 405년 집정관을 역임했던 거물이었다. 그의 아버지 프로코피우스는 422년부터 424년까지 동방의 최고 군사령관(magister militum per Orientem)을 지냈으며, 심지어 황제 율리아누스(Julian)의 사촌이었던 찬탈자 프로코피우스의 후손이기도 했다.
안테미우스는 황족과 밀접한 혼인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했다. 그는 동로마 황제 마르키아누스(Marcian)의 딸 마르키아 에우페미아(Marcia Euphemia)와 결혼했다. 그는 이러한 혈통과 배경을 바탕으로 동로마 제국 내에서 빠르게 승진하며 고위직에 올랐다. 그는 장인 마르키아누스의 뒤를 이을 차기 황제로 유력하게 거론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457년 마르키아누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강력한 게르만족 출신 고위 장군 아스파르(Aspar)는 안테미우스가 너무 독립적인 성향을 가질 것을 우려하여, 그 대신 상대적으로 서열이 낮았던 레오(Leo)를 황제로 옹립했다. 이 레오가 훗날 레오 1세(Leo I)로 불리는 동로마 황제이다.
2. 서방 황제로서의 등극 : 절망 속의 희망
안테미우스는 동로마 제국에서 최고의 군사 및 정치적 엘리트로 성장했다. 465년 서방 로마 제국은 리비우스 세베루스(Libius Severus) 황제의 죽음으로 2년 동안 황제가 없는 공백 상태에 빠졌다. 서방 제국은 날로 심화되는 야만족의 침입과 내부 혼란으로 멸망 직전에 있었다. 특히 북아프리카를 장악한 반달족(Vandals)의 해상 약탈은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방 지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 레오 1세 황제는 안테미우스를 서방 로마 제국의 황제로 지명했다. 467년 4월 12일, 안테미우스는 레오 1세의 전폭적인 지지와 군사적 지원을 받으며 로마에 입성하여 서방 로마 황제로 즉위했다. 동방 황제가 서방 황제를 직접 임명한 것은 제국의 안정을 위해 동서방이 마지막으로 협력하려 했던 시도이자, 안테미우스가 로마 제국을 구원할 마지막 희망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의 등극은 동로마 제국이 서방 로마 제국에 대한 통제력을 재확립하려는 시도이자, 반달족에 대항하는 연합 작전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3. 리키메르와의 갈등 : 권력 다툼의 서막
황제가 된 안테미우스는 서로마 제국을 재건하기 위한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그는 제국을 위협하는 서고트족(Visigoths)과 반달족 문제를 해결하고, 내부 질서를 회복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앞에는 강력한 난관이 있었다. 바로 게르만족 장군 리키메르(Ricimer)였다.
리키메르는 사실상 서로마 제국의 실권을 쥐고 흔들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전 황제 리비우스 세베루스를 옹립하고 폐위시키는 등 황제의 운명을 좌우했다. 안테미우스는 리키메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제국을 통치하려 했다. 그는 자신의 권한을 과시하고 로마 황제로서의 위엄을 회복하려 했으며, 이는 제국 내 게르만족 세력을 견제하고 로마 귀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적인 통치 방식은 리키메르의 권력 기반을 위협했고, 곧 두 사람 사이에 치열한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다.
겉으로는 리키메르와 안테미우스의 딸이 결혼하며 동맹을 맺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는 잠시뿐이었고 둘의 갈등은 점점 심화되었다.
4. 반달족 원정의 실패와 권력의 균열
안테미우스의 통치 기간 중 가장 큰 군사적 노력은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반달족에 대한 대규모 원정이었다. 반달족은 지중해를 장악하며 로마의 곡물 공급로를 위협하고 이탈리아를 끊임없이 약탈했다. 안테미우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과 대규모 연합군을 편성했다. 이 원정은 당시 서로마 제국이 겪었던 가장 큰 군사 작전 중 하나였다.
그러나 468년, 이 대규모 반달족 원정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로마 연합 함대는 카르타고(Carthage) 근처에서 반달족에게 궤멸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 실패는 서로마 제국의 재정을 고갈시켰을 뿐만 아니라, 안테미우스의 통치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리키메르는 이 실패를 안테미우스를 공격하는 빌미로 삼았다. 이로 인해 안테미우스의 황제로서의 권위는 크게 추락했고, 그의 제위는 불안정해졌다.
5. 최후의 내전과 비극적인 죽음
472년 초, 안테미우스와 리키메르 사이의 갈등은 내전으로 폭발했다. 안테미우스는 성 베드로 대성당(St. Peter's Basilica)으로 피신하는 등 혼란 속에서 버티려 했다. 동로마 황제 레오 1세는 오리브리우스(Olybrius)를 보내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하려 했지만, 이 중재 노력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 리키메르가 레오 1세가 안테미우스에게 오리브리우스를 죽이라는 비밀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폭로하며, 오리브리우스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한 것이다.
이로써 안테미우스와 리키메르, 그리고 새로운 황제 오리브리우스 사이에 삼파전이 벌어졌다. 로마는 리키메르의 군대에 의해 포위되었고, 5개월간의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다. 안테미우스는 갈리아에서 지원군을 요청했지만, 리키메르의 조카인 군도바드(Gundobad)가 이 지원군을 격파하며 모든 희망은 사라졌다. 결국 식량 부족과 병력의 약화로 안테미우스는 재차 성 베드로 대성당(또는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으로 피신했지만, 결국 붙잡혔다.
472년 7월 11일, 안테미우스는 군도바드 또는 리키메르에 의해 참수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죽음은 서로마 제국이 더 이상 자체적으로 황제를 선출할 능력조차 상실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6. 안테미우스에 대한 역사적 평가
안테미우스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4년 전에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황제이다. 그는 동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을 살려보려 했던 마지막 시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유능하고 학식 있는 지도자였던 그는 고대 로마의 영광을 되찾으려 했지만, 강력한 게르만 장군 리키메르와의 권력 다툼과 반달족 원정의 실패라는 거대한 난관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의 짧은 통치는 서로마 제국이 직면한 내부의 정치적 불안정성과 외부의 야만족 압력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안테미우스는 로마의 멸망을 막기 위해 노력했던 몇 안 되는 황제 중 한 명으로 기억되지만, 결국은 역사의 거대한 흐름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의 이야기는 로마 제국의 황제 권력이 점차 유명무실해지고, 게르만 장군들의 그림자에 가려지며 멸망을 향해 나아가던 시기의 암울한 초상화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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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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