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3일 수요일

누메리아누스(Numerian, AD.?~284) : 로마 제국 제42대 공동황제(AD.283~284)

누메리아누스(Numerian, AD.?~284) : 로마 제국 제42대 공동황제(AD.283~284)

 

누메리아누스, 제국의 귀환 길에서 사라진 젊은 황제

 
누메리아누스는 283~284년에 형 카리누스(Carinus, ?~285)와 함께 공동 황제로 재위한 로마 황제이다. 부친 카루스(Carus, 222~283)의 동방 원정에 동행해 승전의 행군을 이어갔으나, 284년 가을 귀환 도중 폐쇄된 가마에서 시신으로 발견되며 비극적으로 퇴장하였다. 그의 죽음은 동방 야전군이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 244~312)를 새 황제로 선출하는 직접 계기가 되었고, 제국 통치 체제의 대전환을 예고하는 이정표로 남았다.
 
누메리아누스(Numerian, AD.?~284) : 로마 제국 제42대 공동황제(AD.283~284)
누메리아누스(Numerian, AD.?~284) : 로마 제국 제42대 공동황제(AD.283~284)

출생과 가계, ‘카루스 왕조의 차남

 
누메리아누스(라틴식: Marcus Aurelius Numerius Numerianus)는 황제 카루스의 차남이며, 형은 공동 황제 카리누스이다. 카루스는 282년에 상단 도나우(라에티아ㆍ노리쿰) 방면 군단의 추대로 즉위했고, 곧 두 아들을 카이사르로 올려 왕조적 연속을 예고하였다. 누메리아누스의 초기 생애는 자세하지 않으나, 가문의 승계 설계 속에서 일찍부터 정치적 전면에 등장하였다.
 

카루스의 동방 원정과 페르시쿠스 막시무스의 칭호

 
283년에 카루스는 누메리아누스와 근위대 총관 아리우스 아페르(Arrius Aper)와 함께 동방 원정에 나섰고, 사산 왕조가 후계 분규로 약화된 틈을 타 티그리스 강변의 셀레우키아와 크테시폰을 함락하는 대승을 올렸다. 이를 기념해 카루스·카리누스·누메리아누스 모두 페르시키 막시미(Persici maximi)’ 칭호를 채택하였다. 카루스는 2837~8월경 돌연 사망했으며, 당대에는 번개에 맞았다는 보고가 널리 퍼졌다.
 

카리누스ㆍ누메리아누스의 공동 통치 개시

 
카루스의 사망 이후 두 형제는 아우구스투스로 격상되어 공동 통치를 개시하였다. 카리누스는 서방으로 급행해 2841월 로마에 입성했고, 누메리아누스는 동방 야전군과 함께 서진을 시작했으나 행군 속도는 느렸다. 바흐람 2세의 내정으로 페르시아의 추격은 없었고, 로마군의 귀환은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다.
 

에메사에서의 조칙과 건강 이상보고

 
2843, 누메리아누스는 시리아의 에메사(오늘날 홈스)에 도달했으며, 이곳에서 그의 명의로 발급된 유일한 칙서(rescript)가 남아 있어 당시까진 건재했음이 확인된다. 이후 11월이 되도록 소아시아에 머물렀다는 점은 행군이 매우 더뎠음을 보여준다. 그의 참모진은 눈의 염증을 이유로 황제가 폐쇄된 가마로만 이동한다고 보고했으며, 황제의 대면 노출은 급격히 줄었다.
 

비두니아 혹은 트라키아에서 드러난 시신, ‘폐차의 비극

 
비두니아(혹은 트라키아)로 진입했을 때, 병사들이 황제의 가마에서 시체 썩는 냄새를 맡고 커튼을 젖혀 확인한 결과 누메리아누스가 이미 사망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는 28411월경 니코메디아(오늘날 이즈밋)에서 공식화되었고, 황제 죽음의 은폐 시도에 대한 분노가 야전군에 번졌다. 니코메디아에서 죽음이 공표된 뒤, 동방 야전군의 장교단과 호민관들은 보스포루스 건너 칼케돈에서 후계를 논의하는 회의를 열었다.
 

칼케돈의 선택, 디오클레티아누스 즉위와 아페르의 최후

 
칼케돈 회의에서 동방 군은 근위 기병 지휘관(프로텍토레스 기병대)의 사령관이던 디오클레티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단 앞에서 태양빛에 칼을 들어 선서하며 자신은 누메리아누스의 죽음에 무관하다고 맹세했고, 진범은 아페르라 주장하였다. 곧 결박된 아페르를 회중 앞에서 직접 칼로 처단하며 새 정권의 정통성을 각인시켰다. 이 일련의 장면은 동방 야전군이 독자적 정통성의 주체로 부상하는 변곡점이었다.
 

레갈 데이터와 주화가 전하는 통치의 외피

 
누메리아누스의 공식 호칭은 Imperator Caesar Marcus Aurelius Numerianus Augustus로 제시되며, 284년에는 형과 함께 집정관을 역임하였다. 사이지쿠스 등 소아시아 조폐소에서 그의 명의로 발행된 동전이 남아 있으나, 말년에는 그가 공적 장면에 모습을 보였는지 확언하기 어렵다. 에메사 칙서는 그의 행정 행위가 실제로 집행되었음을 보여주는 희소한 1차 흔적이다.
 

인물상 전승, ‘수사와 시를 아는 황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누메리아누스를 수사와 시에 뛰어나고 성품이 원만한 황제였다고 묘사하며, 원로원이 가장 강력한 웅변가에게라는 비문을 새긴 동상을 세웠다고 전한다. 비록 해당 전승 전체의 신빙성은 제한적이지만, 젊은 황제에 대한 긍정적 인상과 지적 역량의 이미지는 후대 기록에도 흔적으로 남아 있다.
 

사료와 해석의 경계, ‘사건-전승-선전의 층위를 구분

 
누메리아누스의 행군ㆍ사망ㆍ후계의 핵심 골격은 동시대 요약과 비문ㆍ주화로 교차 확인되나, 세부 경위(: 정확한 사망 위치, 아페르의 역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현장 처형)는 사가ㆍ전승마다 결이 다르다. 따라서 본문은 교차 가능한 공통분모를 중심으로 재구성하고, 전승(서사)의 층위는 분리해 표기하였다.
 

연표로 보는 핵심 이정표

 
  • 282: 카루스 즉위, 누메리아누스ㆍ카리누스가 카이사르로 선포되다.
  • 283: 동방 원정 대승(셀레우키아ㆍ크테시폰), 셋이 페르시키 막시미(Persici maximi)’ 칭호를 채택하다.
  • 2837~8: 카루스 급사, 두 형제가 공동 황제로 즉위하다.
  • 2843: 에메사에서 누메리아누스 칙서가 발급되다.
  • 28411월경 : 니코메디아에서 누메리아누스 사망이 공표되고, 칼케돈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선출되다.
 

맺음말 : 귀환하는 군대, 사라진 군주, 시작되는 전환

 
누메리아누스의 죽음은 우연한 개인사 비극을 넘어, 군이 정통성의 실질적 심판자로 부상하는 장면을 드러냈다. 칼케돈의 선택은 곧 테트라르키아로 이어지는 체제 변화를 예고했고, 젊은 황제의 짧은 통치는 동방 승전의 행군제국 재조직의 문턱사이에 낀 과도기의 단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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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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