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누스(Carinus, AD.?~285) : 로마 제국 제42대 황제(AD.283~285)
‘위기의 세기’ 말 한복판에서 떠오르고 사라진 서방의 황제
카리누스는 283년부터 285년까지 재위한 로마 황제이다. 부친 카루스(Carus, 약 222~283)의 장자로, 282년 말 카이사르로, 283년 초 아우구스투스로 승격되어 서방을 맡았고, 동방은 동생 누메리아누스(Numerian)가 맡았다. 카루스 사후 형제가 공동 황제로 제위를 이었으며, 285년 모에시아의 마르구스 강 전투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와 최후의 결전을 치른 뒤 사망하였다. 사가들이 전하는 품평은 적대 선전이 강하게 섞여 있으므로 비판적 독해가 필요하다.
카리누스(Carinus, AD.?~285) : 로마 제국 제42대 황제(AD.283~285) |
즉위 전후의 배경과 권력 분담
프로부스(Probus) 사후 군영 반란 속에 프라이토리움 총관이던 카루스가 황제로 선포되었다. 카루스는 페르시아 원정에 나서며 두 아들을 카이사르로 삼고, 장남 카리누스를 서방 통치자로 남겼다가 다시 아우구스투스로 승격시켜 공동 황제의 지위를 부여하였다. 동생 누메리아누스는 부친을 따라 동방으로 갔다가, 283년 여름 카루스 급사 후 형과 함께 정식 공동 황제가 되었다.
서방 통치의 초반 실적과 로마 귀환 이후의 이미지
기번 등 고전 사가의 서술에 따르면 카리누스는 집권 초 갈리아의 소요와 쿠아디(Quadi)에 맞선 방어에서 일정한 전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곧 상부 라인의 방위를 부하들에게 맡기고 로마로 돌아와 호사와 과시에 빠졌다는 비판적 전승이 따라붙는다. 이 대목의 부정적 평판은 후일 디오클레티아누스 진영의 선전이 강하게 반영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카루스 사후의 공동 통치와 동방 정세의 급변
카루스가 동방 원정 중 번개에 맞아 급사했다는 보고가 퍼지자, 병사들의 미신과 정치적 계산이 겹치며 누메리아누스는 전승을 접고 귀환했다. 누메리아누스는 건강 악화로 가마에 실려 행군했고, 트라키아의 헤라클레이아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전승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공백을 틈타 근위 기병 지휘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칼케돈에서 군단의 추대로 즉위했고, 누메리아누스 살해의 배후로 프라이토리움 총관 아리우스 아페르를 공개 처단하며 정통성을 확보했다는 이야기 구조가 표준 서술로 전한다.
마르구스 강 전투(285)와 서로 다른 최후의 전승
카리누스는 즉시 동으로 향해 파노니아의 찬탈자 사비누스 율리아누스를 격파하고, 285년 7월 마르구스 강 전투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군과 맞붙었다. 이후 전개에 관해서는 사료가 갈린다. 하나는 카리누스군이 승세를 탔으나, 카리누스가 농락했던 공작의 아내 문제로 원한을 품은 군단 장교에게 살해되었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완승과 카리누스 진영의 대규모 이탈을 전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카리누스의 프라이토리움 총관 티투스 클라우디우스 아우렐리우스 아리스토불루스를 계속 중용한 사실은 후설을 뒷받침하는 정황으로 거론된다.
성격ㆍ평판에 대한 사료 비판
카리누스는 “최악의 황제”라는 평판을 전승 속에서 얻지만, 이 이미지는 승자 서사가 덧칠된 측면이 크다. 신뢰도가 낮은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아홉 번 결혼’ 같은 선정적 일화로 인물을 희화화하고, 사후에는 공식적인 ‘기억 말살(damnatio memoriae)’ 조치가 내려져 비문에서 이름이 지워졌다. 이러한 기록은 존재하지만, 평가를 곧이곧대로 수용하기보다 정쟁과 선전의 맥락을 함께 읽는 균형이 필요하다.
집정관ㆍ통치 연표와 공식 직함
카리누스는 283~285년에 걸쳐 집정관에 이름을 올렸으며, 이 기간 동·서의 공동 황제로 통치하였다. 표제 연표는 그가 283년 봄 즉위하여 285년 7월 마르구스 전투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정리한다. 공식 칭호는 ‘임페라토르 카에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리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Marcus Aurelius Carinus Augustus)’로, 주화와 공문서의 범례로도 확인된다.
사료가 전하는 로마 내 통치와 공공 행사
로마 귀환 이후 카리누스가 유례없이 성대한 루디 로마니(Ludi Romani)를 개최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반면 이 시기 누메리아누스의 동방 철군은 카루스의 번개 사망 소식이 낳은 군심과 미신의 영향 아래 진행되었다는 설명이 덧붙는다. 전승의 서술이 혼재하지만, 서방과 동방의 서로 다른 심리ㆍ정치 환경이 형제의 행보를 갈랐다는 큰 틀은 일치한다.
종합 평가 : 선전의 장막 너머에서 본 카리누스의 좌표
카리누스는 ‘서방 현장 통치자’로서 초기에 실무적 성과를 보였고, 제국 축제ㆍ행정에서 황제 권위를 과시하려 했다. 그러나 동방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군단의 지지를 등에 업고 부상하자, 양자 간 전면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그의 최후를 둘러싼 상반된 전승은 승자 정권의 정당화와 패자 비난의 전형을 보여 준다. 따라서 카리누스의 역사적 의미는 ‘패자 개인의 일탈’보다, 3세기 위기 말기 권력이 군단 충성과 현장 정치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했는지 드러내는 지표로 읽을 때 더 명료해진다.
연표로 보는 핵심 이정표
- 282년 말 : 카리누스, 카이사르로 선포되다.
- 283년 초 : 아우구스투스로 승격되어 서방 공동 황제가 되다.
- 283~284년 : 갈리아·쿠아디 전선에서 초반 전공을 세웠다는 전승이 남다.
- 285년 7월 : 마르구스 강 전투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최후 결전을 치르다. 이후 최후 전승이 양분된다.
사료 길잡이와 주의점
- 공적 연표ㆍ직함ㆍ가족 항목은 표제ㆍ개요ㆍ도표에서 상호 보강된다.
- 통치 실적과 사생활에 관한 ‘타락’ 서사는 승자 선전의 영향이 크므로, 기번ㆍ1911년 브리태니커ㆍ현대 주석이 교차 지적하는 편향을 감안해야 한다.
- 마르구스 전투의 결말은 상반된 전승이 병존하므로, 아리스토불루스의 유임 같은 정황증거를 함께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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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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