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8일 월요일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Nikephoros II Phokas, AD.c.912~969) : 동로마 제국 제94대 황제(AD.963~969)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Nikephoros II Phokas, AD.c.912~969) : 동로마 제국 제94대 황제(AD.963~969)

 
  •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Nikephoros II Phokas)
  • [Greek : Νικηφόρος Φωκς / romanized : Nikēphóros Phōkâs]
  • 출생 : 912년경
  • 사망 : 9691211
  • 부친 : Bardas Phokas
  • 배우자 : Theophano
  • 재위 : 963816~ 9691211
  • 공동황제 :
    바실리우스(Basil II) : 963~969
    콘스탄티노스 8(Constantine VIII) : 963~969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의 초상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의 초상 — 15세기 베네치아 마르치아나 도서관 소장 필사본에 수록이 초상화는 거의 확실히 상상에 의해 그려진 것이다.
 

1.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 황제 : 비잔틴 제국의 군사적 영광과 비극적인 몰락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Nikephoros II Phokas, 912년경9691211)963년부터 969년까지 비잔틴 제국을 통치했던 황제이다. 그의 경력은 비록 국정 운영이나 전쟁에서 늘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10세기 비잔틴 제국의 부흥에 크게 기여했다. 동쪽에서는 킬리키아를 정복하고 크레타와 키프로스 섬을 탈환하여, 이후 상부 메소포타미아와 레반트 지역까지 비잔틴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길을 열었다. 이러한 군사적 업적으로 그는 사라센의 창백한 죽음(pale death of the Saracens)’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된다.
 

2. 포카스 가문 : 군사 명문가의 후예

 
니케포로스 포카스는 912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여러 뛰어난 장군을 배출했던 포카스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의 아버지 바르다스 포카스 장군(Bardas Phokas the Elder)은 물론, 삼촌인 레오 포카스(Leo Phokas the Younger)와 조부인 니케포로스 포카스 장군(Nikephoros Phokas the Elder) 모두 야전군 사령관(domestikos tōn scholōn)으로 복무했다. 어머니 쪽으로는 카파도키아에 정착한 강력한 아나톨리아 그리스 가문인 말레이노이(Maleinoi)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스테파노라는 여성과 결혼했으나, 그녀는 니케포로스가 명성을 얻기 전에 사망했다. 그녀가 죽은 후 그는 순결 서약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배경은 그가 황제가 되기 전부터 군사적 재능과 개인적인 신념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3. 황제 즉위 전의 군사적 위업 : ‘사라센의 창백한 죽음

 
니케포로스는 군사적 경력으로 이미 명성을 떨쳤다. 황제가 되기 전, 그는 동부 군대의 총사령관(Domestic of the Schools of the East)으로 복무하며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크레타를 재탈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는 비잔틴 제국에게 매우 중요한 전략적 승리였다. 크레타 섬의 탈환은 에게해와 동부 지중해에서 비잔틴의 해상 패권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일련의 승리들은 그에게 사라센의 창백한 죽음이라는 별명을 안겨주었으며, 그의 군사적 명성을 드높였다.
 
963, 전임 황제 로마노스 2(Romanos II, 938963)가 사망하자 니케포로스는 군대의 지지를 등에 업고 황위에 올랐다. 그는 963816일 제위에 올랐으며, 로마노스 2세의 어린 아들들인 바실리우스 2(Basil II, 9581025)와 콘스탄티노스 8(Constantine VIII, 9601028)가 그의 공동 황제였다.
 

4. 황제로서의 군사적 확장과 국방 강화

 
황제가 된 니케포로스 2세는 군사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제국의 영토 확장에 주력했다.
 
  • 동부 전선 : 킬리키아(Cilicia)를 완전히 정복하고, 키프로스(Cyprus)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 지역들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으며, 이슬람 세력에 대한 비잔틴의 공세를 강화하는 전초 기지 역할을 했다. 그의 이러한 원정은 상부 메소포타미아(Upper Mesopotamia)와 레반트(Levant) 지역까지 비잔틴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 군사 교리서 집필 : 니케포로스 2세는 뛰어난 군인이자 전략가로서, 프라에케프타 밀리타리아(Praecepta Militaria)라는 군사 교리서도 저술했다. 이 책은 비잔틴군의 전술과 훈련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를 보여주며, 그의 군사적 유산을 후대에 남겼다.
 
그의 통치는 비잔틴 제국의 군사적 부흥을 이끈 중요한 시기로 평가된다. 제국은 그의 지휘 아래 상당한 영토를 회복하고 국방을 강화할 수 있었다.
 

5. 리우트프란트의 혹평과 외교적 갈등

 
니케포로스 2세의 통치는 동서양 간의 긴장 관계가 빚어낸 외교적 문제들도 야기했다. 크레모나의 주교 리우트프란트(Liutprand of Cremona)는 니케포로스와 그의 궁정을 극도로 혹평하는 콘스탄티노플 대사 기록(Relatio de legatione Constantinopolitana)이라는 글을 남겼다. 리우트프란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외교 사절로 머무는 동안 니케포로스에게 받은 부당한 대우 때문에 그를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리우트프란트는 니케포로스 2세를 괴물 같은 인간, 난쟁이, 머리가 크고 눈이 두더지처럼 작다고 묘사하며, “짧고 넓고 두껍고 반백인 수염, 1인치 길이의 목, 길고 두꺼운 머리카락 때문에 매우 뻣뻣한 머리, 에티오피아인 같은 피부색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그는 한밤중에 만나기 즐겁지 않을 것이라며 방대한 배, 마른 허리, 작은 키에 비해 긴 엉덩이, 작은 다리, 발과 발꿈치는 비례에 맞고, 값비싸지만 너무 낡고 나이 때문에 냄새나고 바랜 옷을 입고, 시키오니아 신발을 신었고, 혀는 대담하고, 본성은 여우 같으며, 위증과 거짓말에 능한 율리시스 같다고까지 했다.
 
이는 니케포로스가 외교에는 능하지 않았다는 평가를 뒷받침한다. 더욱이 교황 요한 13(Pope John XIII)는 리우트프란트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동안 오토 1(Otto I)로마 황제라 칭하고 니케포로스를 단지 그리스인의 황제라고 부르는 서신을 보내 비잔틴 황제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리우트프란트는 오토 1세의 어린 아들인 미래의 오토 2(Otto II)를 위해 비잔틴 황녀를 신부로 얻으려 했으나, 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이러한 외교적 마찰은 그의 군사적 업적과는 별개로 그의 통치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6. 비극적인 암살 : 황후와 총사령관의 음모

 
니케포로스 2세의 통치는 비극적인 암살로 막을 내린다. 이 암살 음모는 안티오키아 공성전에서의 불복종으로 인해 니케포로스가 미카엘 부르체스(Michael Bourtzes)를 해임하면서 시작되었다. 부르체스는 곧 니케포로스에게 반기를 들 동맹을 찾게 된다. 965년 말, 니케포로스는 의심되는 불충 때문에 요한네스 치미스케스(John I Tzimiskes, 925976)를 소아시아 동부로 유배 보냈으나, 니케포로스의 아내 테오파노(Theophano)의 간청으로 소환되었다.
 
연대기 작가 요안네스 조나라스(Joannes Zonaras)와 요한 스킬리체스(John Skylitzes)에 따르면, 니케포로스와 테오파노는 사랑 없는 관계였다고 한다. 니케포로스가 금욕적인 삶을 살았던 반면, 테오파노는 은밀히 치미스케스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테오파노와 치미스케스는 황제를 전복시키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결국 9691211일 밤, 테오파노는 니케포로스의 침실 문을 잠그지 않았고, 치미스케스와 그의 수행원들은 황제의 아파트에서 니케포로스를 암살했다. 그는 성모에게 기도하다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죽음 이후, 니케포로스의 조카 바르다스 포카스(Bardas Phokas the Younger)의 주도 하에 포카스 가문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치미스케스가 제위에 오르면서 반란은 즉시 진압되었다. 존 줄리어스 노르위치(John Julius Norwich)는 그의 죽음과 매장에 대해 그곳은 명예로운 장소였다. 그러나 시리아와 크레타의 영웅, 사라센의 백색 죽음, 신성하고도 끔찍하며, 웅장하면서도 참을 수 없었던 니케포로스 포카스는 더 나은 죽음을 맞이할 자격이 있었다고 평했다.
 

7. 역사적 유산과 크레타의 기억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의 통치는 비잔틴 제국에 지울 수 없는 유산을 남겼다. 그는 크레타에서의 사라센 지배를 종식시킨 역할 때문에, 이후 중세 후기 베네치아 지배 하의 크레타 섬에서 비잔틴 제국의 황제와 관련된 전설에 자주 등장했다. 크레타의 열두 귀족 가문 전설에도 언급되며, 칼레르기스(Kallergis) 가문과 같은 가장 저명한 베네치아 시대 크레타 귀족 가문은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의 후손임을 주장하기도 했다.
 
비록 그의 개인적인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리지만, 그는 군사적 업적을 통해 제국의 힘과 위상을 다시 드높인 황제였다. 그의 삶은 군사적 영광, 복잡한 궁정 정치, 그리고 결국 비극적인 죽음으로 끝맺는 드라마틱한 한 편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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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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