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John I Tzimiskes, AD.925~976) : 동로마 제국 제95대 황제(AD.969~976)
-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John I Tzimiskes)
- [Greek : Ἰωάννης ὁ Τζιμισκής / romanized : Iōánnēs ho Tzimiskēs]
- 출생 : 925년
- 사망 : 976년 1월 10일
- 배우자 : Maria Skleraina, Theodora
- 재위 : 969년 12월 11일 ~ 976년 1월 10일
- 대관식 : 969년 12월 19일
- 공동황제 :
Basil II : 969~976년
Constantine VIII : 969~9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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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투흐(Gunthertuch)’의 세부 장면 — 개선식에서 요안네스 치미스케스가 블루와 그린(청색당과 녹색당)의 환영을 받는 모습을 묘사한 비잔틴 실크 태피스트리. |
1.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 황제 : 비잔틴 제국의 군사적 영웅, 격동의 재위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John I Tzimiskes, 925년경–976년 1월 10일)는 969년부터 976년까지 비잔틴 제국을 통치했던 황제였다. 그는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Nikephoros II Phokas, 912년경–969년)의 조카이자 암살자로 권력을 잡았지만, 비잔틴 역사상 가장 유능하고 성공적인 군사 지휘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재위 기간은 제국의 영토가 크게 확장되고 군사적 위상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
2. 출생과 치미스케스라는 별칭
요한네스 1세는 924년 또는 925년에 비잔틴 제국의 아나톨리아(Anatolia) 지역, 현재 튀르키예의 툰첼리 주(Tunceli Province)에 위치한 체미슈게젝(Çemişgezek)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코우르쿠아스(Kourkouas) 가문의 일원이었으며, 어머니는 비잔틴 제국의 유력 군사 가문 중 하나인 포카스 가문의 인물로, 훗날 황제가 되는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의 여동생이었다. 코우르쿠아스 가문과 포카스 가문 모두 카파도키아 출신의 저명한 가문으로, 10세기 초 아시아 마이너(Asia Minor)의 군사 귀족들 사이에서 가장 두드러진 가문으로 자리 잡았다.
그의 별칭인 ‘치미스케스(Tzimiskes)’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존재한다. 일부 학자들은 아르메니아어 ‘크무쉬크(Chmushkik)’에서 유래했다고 보는데, 이는 ‘붉은 부츠’를 의미하거나 ‘키가 작은 사람’을 뜻하는 아르메니아어 단어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중세 아르메니아 역사가 에데사의 마태오(Matthew of Edessa)는 치미스케스가 포이그나툰(Paghnatun) 지역의 코잔(Khozan) 출신이며, ‘크무쉬카착(Chmushkatzag)’이라는 지역명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쨌든, ‘치미스케스’는 요한네스 가족의 다른 구성원들도 사용했던 성으로, 아르메니아 역사가 스테파노스 아소기크(Stepanos Asoghik)는 그를 “체미쉬킥의 손자”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3. 권력으로의 도약 : 니케포로스 2세의 암살
요한네스는 963년에 그의 숙부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가 황제로 즉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니케포로스는 요한네스를 자신의 휘하에서 동방 군대의 총사령관(Domestic of the Schools of the East)으로 임명하며 그의 군사적 재능을 신뢰했다. 요한네스는 뛰어난 전술적 지휘관이자 전사로서, 제국 방어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니케포로스 황제와 요한네스 사이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니케포로스는 요한네스를 경계하여 소아시아 동부로 유배를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니케포로스의 황후이자 로마노스 2세(Romanos II, 938–963)의 미망인이었던 테오파노(Theophano)는 요한네스 치미스케스와 내연 관계를 맺게 된다. 테오파노와 치미스케스는 황제를 전복시키기 위한 음모를 꾸몄고, 결국 969년 12월 11일 밤, 치미스케스는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플 황궁으로 침투하여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를 암살했다. 황제의 침실 문이 테오파노에 의해 열려 있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요한네스 치미스케스는 그 후 곧바로 황제에 즉위하게 된다.
4. 군사적 영웅 : 동서양 전선의 정복자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의 재위 기간은 끊임없는 군사적 승리와 영토 확장의 시기였다. 그는 비잔틴 제국의 국력을 다시 한번 최고조로 끌어올린 군사적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 러시아-비잔틴 전쟁(970-971) : 그의 재위 초 가장 큰 위협은 발칸반도에서 나타났다. 키예프 루스(Kievan Rus')의 대공 스뱌토슬라프(Sviatoslav of Kiev, 942경–972)는 불가리아를 정복하고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고 있었다. 요한네스 치미스케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스뱌토슬라프의 루스 군대에 맞섰다. 971년에 도르스톨론(Dorostolon) 공방전에서 루스 군대를 포위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로 스뱌토슬라프는 비잔틴 제국에 복종하고 발칸반도에서 철수해야 했다. 이로써 비잔틴 제국은 발칸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 동방 원정 : 아랍 세력 격퇴: 러시아와의 전쟁을 마친 후, 요한네스 치미스케스는 동방으로 눈을 돌려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에 집중했다. 그는 시리아(Syria), 팔레스타인(Palestine), 이집트(Egypt) 지역을 목표로 대규모 원정을 감행했다. 975년에는 다마스쿠스(Damascus), 베이루트(Beirut), 트리폴리(Tripoli) 등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으며, 지중해 연안의 사라센 해군 기지들을 파괴하여 제국의 해상 무역로를 확보했다. 그의 군사적 성공은 비잔틴 제국의 동부 국경을 안정화시키고, 수십 년간 빼앗겼던 영토를 상당 부분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 핀란드의 문헌학자이자 연구원인 파보 호티(Paavo Hohti)는 치미스케스를 “비잔티움에서 가장 유능한 군사 장군 중 한 명”으로 평가하며, 그의 루스와 아랍에 대한 성공적인 캠페인이 발칸과 메소포타미아에서 동로마 제국의 우위를 회복시켰다고 주장한다.
5. 내치와 종교적 화합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 외에도 제국 내부의 안정과 종교적 화합을 추구했다. 황위에 오른 직후, 그는 니케포로스 황제와의 관계 때문에 한동안 냉각되었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폴리옉토스(Polyeuctus)와 로마 교황 요한 13세(Pope John XIII)와의 관계를 개선하려 노력했다. 그는 자신은 니케포로스 암살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았으며, 모든 책임은 황후 테오파노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교회 지도자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그는 수도원 확장을 장려하고, 사회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교회의 독립성을 존중하며, 종교 기관 개혁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제국은 정치적 안정과 함께 경제적 번영을 누렸으며, 이는 강력한 군사적 기반 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6. 갑작스러운 죽음과 유산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는 976년 1월 10일, 51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일부 연대기 작가들은 그가 동방 원정 중에 너무 많은 전리품을 가져왔고, 이를 탐낸 그의 환관 시종장(parakoimomenos) 바실리우스 레카페노스(Basil Lekapenos)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바실리우스 레카페노스는 과거 황제 로마노스 1세 레카페노스(Romanos I Lekapenos, 870년경–948년)의 서자이자 권력 실세였다.
요한네스의 죽음 이후, 젊은 공동 황제였던 바실리우스 2세(Basil II, 958–1025)와 콘스탄티노스 8세(Constantine VIII, 960–1028)가 제국의 통치권을 확보하게 된다. 요한네스 치미스케스는 마케도니아 왕조에 속하는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의 뒤를 이었으며, 그의 사후 바실리우스 2세가 황위를 계승했다.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는 비록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황위에 올랐지만,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비잔틴 제국은 군사적 영광을 되찾고 중요한 영토를 회복했다. 그의 군사적 업적은 제국의 안정을 가져왔고, 후대 바실리우스 2세의 재위 기간 동안 비잔틴 제국이 전성기를 누릴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현재 튀르키예 툰첼리 주에 위치한 체미슈게젝(Çemişgezek)이라는 지명과 그리스 테살로니키(Thessaloniki)의 주요 상업 거리인 '치미스키 거리(Tsimiski Street)'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은 그의 역사적 중요성을 보여주는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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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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