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4일 목요일

율리아누스(Julian, AD.331~363) : 로마 제국 제46대 황제(AD.360~363)

율리아누스(Julian, AD.331~363) : 로마 제국 제46대 황제(AD.360~363)

 
  •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Flavius Claudius Julianus)
  • Ancient Greek : Ἰουλιανός, Ioulianos
  • 황제 칭호 : 임페라토르 카에사르 블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Flavius Claudius Julianus Augustus)
  • 출생 : 기원후 331/ 콘스탄티노플
  • 사망 : 기원후 363626/ 사산 제국, 사마라(Samarra)
  • 부친 :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Julius Constantius)
  • 모친 : 바실리나(Basilina)
  • 배우자 : 헬레나(Helena) : 355년 결혼, 360년 사망
  • 재위 :
    카에사르(Caesar) : 기원후 355년 11월 6일 ~ 360년
    아우구스투스(Augustus) : 기원후 361년 11월 3일 ~ 363년 6월 26일(360년 2월부터 주장)

율리아누스(Julian, AD.331~363) : 로마 제국 제46대 황제(AD.360~363)
율리아누스(Julian, AD.331~363) : 로마 제국 제46대 황제(AD.360~363)
 

로마 제국의 마지막 이교도 황제이자 철학자

 
로마 제국 말기의 역사에서 율리아누스(Julian) 황제만큼 논쟁적인 인물은 드물다. 그는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후예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이교(異敎) 신앙으로 돌아가 제국의 전통 신앙을 복원하려 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배교자 율리아누스’(Julian the Apostate)로 기억되지만, 로마의 고전적 가치를 수호하고 제국을 재건하려 했던 이상주의적인 철학자이자 유능한 군사 지도자였다. 그의 짧은 통치는 로마 제국이 겪었던 종교적, 문화적 전환점과 혼란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율리아누스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그의 야심 찬 시도와 비극적인 최후를 자세히 살펴본다.
 

1. 어린 시절과 남다른 교육

 
율리아누스의 본명은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Flavius Claudius Julianus), 331년경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대 황제 콘스탄티누스 1(Constantine I, 재위 306~337)의 이복 조카이자, 그의 아버지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Julius Constantius)는 콘스탄티누스의 이복 동생이었다.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난 최초의 로마 황제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순탄치 않았다. 337, 아버지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가 처형당하면서 율리아누스는 고아가 되었다. 그는 사촌인 콘스탄티우스 2(Constantius II, 재위 337~361)의 엄격한 감시 아래 성장했지만,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가 그리스어 사용 지역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율리아누스는 비록 기독교 신앙 안에서 양육되었지만, 그리스 철학과 고전 문학에 깊이 빠져들었다. 특히 그는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에 심취하며 철학자이자 작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이러한 학문적 배경은 훗날 그가 황제가 되었을 때 추진했던 정책의 근간이 되었다.
 

2. 카이사르(Caesar)로서의 군사적 성공

 
355,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를 궁정으로 불러 카이사르(Caesar)로 임명하고, 로마 제국 서부의 갈리아(Gaul)로 파견했다. 이는 그에게 단순한 학자가 아닌 군사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었다. 율리아누스는 갈리아에서 뛰어난 군사적 수완을 보여주었다. 라인 강(Rhine)을 넘어 침입하는 게르만 부족들의 약탈을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오히려 이들을 역습하여 국경을 안정시켰다. 그는 또한 침략으로 피폐해진 속주들의 재건을 장려하며 행정 능력도 입증했다.
 
이 시기 율리아누스는 갈리아 총독 플로렌티우스(Florentius)와 세금 문제와 행정 전반에 걸쳐 갈등을 빚기도 했다. 율리아누스는 군사적 안정을 바탕으로 민생 회복에 중점을 두었고, 플로렌티우스의 세금 인상 시도와 관료들의 부패에 반대했다. 이는 그가 단순한 군인이 아닌, 제국 전체의 안정을 생각하는 통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것이었다.
 

3. 아우구스투스(Augustus) 선포와 콘스탄티우스 2세와의 내전

 
율리아누스의 승승장구는 360년 콘스탄티우스 2세의 명령으로 위기를 맞았다. 사산 제국(Sasanian Empire)이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를 침공하자,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 휘하 갈리아 주둔군의 절반 이상을 동방으로 이동시키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갈리아 병사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기를 원치 않았다. 그들은 루테티아(Lutetia, 오늘날 파리)에서 율리아누스를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선포하며 반기를 들었다.
 
이로 인해 율리아누스와 콘스탄티우스 2세는 피할 수 없는 내전 상황에 돌입했다. 율리아누스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진군하며 콘스탄티우스 2세와 맞설 준비를 했다. 그러나 361113, 두 황제 간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콘스탄티우스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흥미롭게도 일부 기록은 콘스탄티우스 2세가 죽기 직전 율리아누스를 자신의 정당한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전한다. 이는 더 큰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3611211, 율리아누스는 단독 황제로서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했다. 그는 비록 기독교를 거부했지만, 첫 정치적 행동으로 콘스탄티우스 2세의 기독교식 장례를 주관하며 자신의 합법적인 황제 계승권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4. 로마 재건과 종교 개혁 : 마지막 이교도 황제

 
단독 황제가 된 율리아누스는 로마 제국을 과거의 영광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야심 찬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제국의 해체를 막기 위해서는 고대 로마의 가치와 전통, 특히 이교 신앙을 복원해야 한다고 믿었다.
 
  • 행정 개혁 : 그는 비대한 제국 관료 체계를 개혁하고, 불필요한 관직을 폐지하여 효율성을 높이고자 했다.
  • 종교 정책 : 율리아누스는 기독교를 거부하고 다신교적 전통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는 기독교 이전에 로마 제국의 지배적인 종교였던 헬레니즘(Hellenism)과 전통 로마 종교 의례를 장려했다. 예루살렘에 제3성전(Third Temple)을 재건하려 한 것도 기독교를 약화시키려는 의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또한 기독교인들이 고전 텍스트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금지하며, 지식의 전달을 통해 기독교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이러한 정책 때문에 그는 기독교 전통에서 배교자’(Apostate)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다.
 
율리아누스의 종교 정책은 단순히 개인적인 신념을 넘어, 제국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고전적 로마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정치적 시도였다. 그러나 이는 이미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기독교 세력과의 심각한 갈등을 야기했다.
 

5. 페르시아 원정과 비극적인 죽음

 
율리아누스는 제국 동방의 오랜 위협이었던 사산 제국과의 전쟁을 통해 자신의 역량을 입증하고 제국에 영광을 안기려 했다. 363, 그는 사산 제국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시작했다. 원정 초반에는 성공적이었다. 그는 사산 제국의 수도 크테시폰(Ctesiphon) 외곽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수도를 포위하는 대신 페르시아 내륙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그러나 이 선택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로마군은 보급 문제에 직면했고, 끊임없이 페르시아군 게릴라의 괴롭힘을 받으며 북쪽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363626, 사마라 전투(Battle of Samarra) 중에 율리아누스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로마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사산 제국 원정은 비극적인 실패로 끝났다.
 
율리아누스 사후, 제국의 황제는 요비아누스(Jovian, 재위 363~364)로 계승되었다. 그는 포위된 로마군을 구하기 위해 사산 제국에 영토를 할양하는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맺어야 했다. 율리아누스와 요비아누스는 로마 제국이 동서로 완전히 분할되기 전, 전체 제국을 통치한 마지막 단독 황제로 기록된다.
 

6. 율리아누스에 대한 역사적 평가

 
율리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매우 특별하고도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는 철학자이자 유능한 군사 전략가, 그리고 행정가로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제국의 쇠퇴를 막고 고전 로마의 영광을 되찾으려 했던 그의 노력은 순수하고 이상주의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기독교 대신 이교 신앙을 복원하려 했던 그의 종교 정책은 결국 큰 반발에 부딪혔고, 그의 통치는 짧고 불완전하게 끝났다.
 
그의 죽음과 함께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 길을 굳건히 걸었고, 이교 전통은 점차 쇠퇴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율리아누스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황제의 비극적인 삶을 넘어, 서양 문명의 거대한 전환점을 상징하는 드라마틱한 역사적 순간으로 남아있다. ‘배교자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 뒤에 가려진, 제국의 마지막 이교도 황제이자 이상주의자 율리아누스는 오늘날에도 역사가와 학자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재조명되고 있는 인물이다.
 
=-=-=-=-=-=-=-=-=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요비아누스(Jovian, AD. 331~364) : 로마 제국 제47대 황제(AD.363~364)

요비아누스 (Jovian, AD. 331~364) : 로마 제국 제47대 황제(AD.363~364)   플라비우스 요비아누스 (Flavius Jovianus) Ancient Greek : Ἰ οβιανός , Iobianós 부친 : 바로니아누스 (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