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시아누스(Bassianus, AD.?~316) : 로마 제국 제44대 공동황제(Caesar?)
로마 제국의 운명을 가른 희생양, 바시아누스 황제
- 출생 : 미상
- 사망 : 기원후 316년
- 기원후 314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카이사르’에 임명하려고 했으나 리키니우스가 거부
- 리키니우스가 바시아누스를 부추겨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대항하게 하였고, 바시아누스는 암살 계획이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1. 격동의 시대 속, 한 인물의 비극적인 운명
기원후 3세기는 로마 제국에 ‘3세기의 위기’라 불리는 극심한 혼란과 격변의 시기였다. 끊임없는 내전과 빈번한 황제 교체, 그리고 제국 안팎의 위협은 로마를 심각한 불안정 속으로 몰아넣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 황제가 도입한 사두정치(Tetrarchy) 체제는 한동안 안정을 가져왔지만, 그의 퇴위 이후 황제들 간의 복잡한 권력 투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 격동기 속에서 황제들 간의 갈등에 휘말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 바로 바시아누스(Bassianus, 316년 사망)다. 그는 로마 제국의 주류 역사에서 큰 역할을 한 인물은 아니지만, 그의 죽음은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e I)와 리키니우스(Licinius) 사이의 전면적인 내전을 촉발시킨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2. 가문의 배경과 전략적 결혼
바시아누스는 4세기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었다. 그의 가문 배경에 대해서는 최근의 프로소포그라피(Prosopography, 인명 연구) 연구를 통해 그와 그의 형제 세네키오(Senecio)가 유서 깊은 아니키(Anicii) 가문과 누미이 알비니 세네키오네스(Nummii Albini Seneciones) 가문의 일원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는 그가 당대의 유력 귀족 가문 출신이었음을 시사한다.
바시아누스의 이름이 역사에 등장한 것은 콘스탄티누스 1세의 정치적 전략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동방의 공동 황제인 리키니우스와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자신의 이복 여동생 아나스타샤(Anastasia)와 바시아누스를 결혼시켰다. 이러한 혼인은 당시 로마 제국의 복잡한 권력 관계 속에서 두 ‘아우구스투스(Augustus)’ 간의 관계를 공고히 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담겨 있었다. 더욱이 바시아누스의 형제 세네키오는 리키니우스 밑에서 고위 관료를 지내고 있었기에, 이 결혼은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양측에게 이점을 제공하는 듯했다.
3. 권력의 야망과 갈등의 씨앗 : 이탈리아의 지배권
314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로마 제국의 통치 체제를 재편하고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그는 리키니우스의 동의를 얻어 바시아누스를 ‘카이사르(Caesar)’의 지위에 올리고, 이탈리아에 대한 통치권을 부여하려 했다. 당시 사두정치 체제에서는 두 아우구스투스 아래 각각 두 명의 카이사르가 배치되어 제국을 분할 통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퇴위 이후 이 시스템은 이미 혼란스러웠고, 황제들 간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는 상황이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바시아누스에게 넘겨주려 한 것은 사실상 리키니우스의 동방 통치와 서방의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Maxentius)를 물리치고 서방을 장악한 자신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 한 시도였다. 하지만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의 이러한 움직임을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바시아누스의 카이사르 임명을 승인하기를 거부하며 두 황제 사이의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다.
4. 음모와 비극적인 종말
리키니우스의 거부로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사이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이 상황에서 리키니우스는 교활한 음모를 꾸몄다. 그는 세네키오에게 연락하여 그의 형제인 바시아누스를 부추겨 콘스탄티누스를 암살하고, 무장 봉기하여 이탈리아를 점령해 리키니우스의 세력으로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는 콘스탄티누스를 제거하고 이탈리아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려는 리키니우스의 치밀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음모는 발각되었다. 역사가 에우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의 기록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는 신이 보내준 환상 덕분에 이 암살 계획을 미리 알아챘다고 한다. 음모가 드러나자 바시아누스는 즉시 체포되었고, 곧 처형당했다. 그의 죽음은 정치적 야망과 복잡한 황제 간의 역학 관계 속에서 희생된 한 인물의 비극적인 최후였다.
5.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간의 전쟁의 도화선
바시아누스의 처형은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간의 평화를 깨뜨리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에게 음모를 꾸민 세네키오를 자신에게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리키니우스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리키니우스는 두 황제의 영향권 경계 지역인 에모나(Emona)에 있던 콘스탄티누스의 동상들을 철거하고 파괴하는 도발적인 행동을 감행했다. 이는 사실상의 전쟁 선포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곧 로마 제국의 서방과 동방을 아우르는 전면적인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은 흔히 ‘벨룸 키발렌세(bellum Cibalense)’로 불리며, 316년 또는 317년에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사이에 키발라이 전투(Battle of Cibalae)와 마르디아 전투(Battle of Mardia)가 벌어지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비록 바시아누스는 권력의 주역이 아니었지만, 그의 삶과 죽음은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의 패권을 장악하는 중요한 전환점의 핵심 요소로 작용했다.
6. 역사적 의의와 평가
바시아누스는 그 자체로 역사적 업적을 남긴 위대한 인물은 아니다. 그는 황제가 되지 못했고, 심지어 짧은 카이사르 자리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존재와 비극적인 최후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도입했던 사두정치 체제의 붕괴가 얼마나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라는 당시 로마 제국의 가장 강력한 두 지도자 간의 신뢰가 무너지고 최종적인 무력 충돌로 이어지는 데 결정적인 촉매 역할을 했다.
바시아누스의 죽음은 단순히 개인의 비극을 넘어, 로마 제국의 정치적 불안정과 권력 투쟁이 심화되던 4세기 초의 상황을 대변한다. 그는 결국 시대의 큰 흐름에 휩쓸려간 희생양이었지만, 그의 죽음을 통해 로마 제국은 더욱 심한 내전을 겪었고, 결과적으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제국 전체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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