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키아누스(Marcian, AD.c.392–457) : 동로마 제국 제54대 황제(AD.450~457)
- 마르키아누스(Marcian, Marcianus)
- Ancient Greek : Μαρκιανός, Markianos
- 황제 명칭 : 임페라토르 카에사르 플라비우스 마르키아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Flavius Marcianus Augustus, Αὐτοκράτωρ καῖσαρ Φλάβιος Μαρκιανός αὐγουστος)
- 출생 : 기원후 392년경 / 트라키아(Thrace) 혹은 일리리아(Illyria)
- 사망 : 기원후 457년 1월 27일 / 콘스탄티노플
- 배우자 : 풀케리아(Pulcheria) 450년 결혼, 453년 사망
- 자녀 : 마르키아 에우페미아(Marcia Euphemia)
- 재위 : 기원후 450년 8월 25일 ~ 457년 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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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키아누스(Marcian, AD.c.392–457) : 동로마 제국 제54대 황제(AD.450~457) |
잊혀진 실력자, 마르키아누스 황제 : 혼돈 속 동로마 제국의 등불 (450-457)
5세기 중반, 로마 제국은 끊임없이 밀려오는 야만족의 침입과 내부의 정치적 불안정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특히 훈족의 아틸라(Attila, 사망 453)가 동유럽을 휩쓸며 제국에 막대한 조공을 요구하던 암흑기였다. 이처럼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동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올라 불과 7년이라는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제국을 안정시키고 번영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 바로 마르키아누스(Marcian, 392–457) 황제이다. 그는 잘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군인의 신분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라 로마 제국에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었다.
1. 평범한 시작 : 마르키아누스의 초기 생애와 군 복무
마르키아누스는 서기 392년경 트라키아(Thracia) 또는 일리리아(Illyria)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군 복무를 한 경험이 있었으며, 마르키아누스 또한 어린 나이에 트라키아의 필리포폴리스(Philippopolis)에서 군에 입대했다.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고대 역사가 존 말랄라스(John Malalas)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키가 크고 발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평범한 군인이었지만, 꾸준히 승진하여 로마-사산조 전쟁(421–422) 무렵에는 트리부누스(tribune) 계급에 도달하여 한 군사 부대를 지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는 이 전쟁에서 직접 전투를 치르지 못했는데, 리키아(Lycia) 지역에서 병을 앓았기 때문이다. 이때 타티아누스(Tatianus)와 그의 형제 율리우스(Iulius)의 보살핌을 받았는데, 훗날 마르키아누스는 타티아누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도시 지사(praefectus urbi)로 임명하여 은혜를 갚았다.
마르키아누스의 경력에서 전환점은 그가 15년 동안 로마 제국의 고위 장군 아르다부르(Ardabur)와 그의 아들 아스파르(Aspar)의 개인 비서(domesticus)로 일하면서 찾아왔다. 아스파르는 동고트족 출신의 실력자이자 당시 동로마 제국에서 막강한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이었다. 이 시기 동안 마르키아누스는 제국의 군사 및 정치 체계에 대한 깊은 이해를 쌓았으며, 유력자들의 신뢰를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2. 왕좌로 가는 길 : 테오도시우스 2세의 죽음과 풀케리아의 선택 (450)
450년 7월 28일, 동로마 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 401–450)가 사고로 사망하면서 제국은 새로운 황제를 찾아야 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아들이 없었기에, 그의 누나이자 오랜 섭정이었던 풀케리아(Pulcheria, 399–453)가 황위 계승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풀케리아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여성이었으며,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제국의 실권을 쥐고 있었다.
이때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아스파르는 자신이 믿을 수 있고 통제 가능한 인물을 황제로 옹립하고자 했다. 그의 선택은 바로 그의 부하였던 마르키아누스였다. 마르키아누스는 황족 출신이 아니었으며, 그가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황실의 정통성을 대표하는 인물과의 결합이 필요했다. 한 달간의 협상 끝에, 풀케리아는 마르키아누스와 결혼하는 데 동의했다. 이 결혼은 마르키아누스의 통치 정당성을 확보해 주었고, 풀케리아는 스스로 황후의 자리에 오르며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풀케리아는 평생 동정을 지키겠다고 맹세했기에, 이 결혼은 순전히 정치적인 동맹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450년 8월 25일, 마르키아누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헤브도몬(Hebdomon)에서 군대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고 즉위했다. 그는 즉위와 함께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플라비우스 마르키아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Flavius Marcianus Augustus)’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로써 미천한 신분에서 시작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 탄생했다.
3. 강건한 통치 : 훈족에 대한 단호한 대응 (450-453)
마르키아누스 황제는 즉위하자마자 이전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정책들을 과감하게 뒤집으며 자신의 강건한 통치 철학을 드러냈다. 특히 훈족의 아틸라에 대한 정책에서 이러한 단호함이 두드러졌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훈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막대한 양의 조공을 바치는 굴욕적인 평화 협정을 맺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키아누스는 이를 즉시 파기하고 아틸라에게 보내던 모든 보조금 지급을 중단했다.
452년, 아틸라가 서로마 제국의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약탈을 일삼는 동안, 마르키아누스는 훈족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다뉴브 강 너머 대헝가리 평원으로 군사 원정을 감행했다. 동로마 제국의 군대는 이곳에서 훈족을 격파하며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마르키아누스의 이러한 단호한 군사 행동은 이탈리아에서 기근과 역병에 시달리던 서로마 제국이 아틸라에게 뇌물을 주어 철수시키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마르키아누스의 과감한 전략은 아틸라의 관심을 동쪽으로 분산시켜 서로마 제국의 부담을 줄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453년 아틸라가 사망하자, 마르키아누스는 훈족 연합의 분열을 활용하여 게르만 부족들을 로마 영토 내에 동맹군(foederati)으로 정착시켰다. 이는 제국의 국경 방어를 강화하고 새로운 군사 자원을 확보하는 전략적인 움직임이었다. 마르키아누스의 이러한 강력하고 독립적인 통치 방식은 비잔티움 학자 콘스탄스 헤드(Constance Head)에 의해 “독립심이 강한 황제”로 평가받기도 했다.
4. 종교 정책과 칼케돈 공의회 (451)
마르키아누스는 군사적, 경제적 업적 외에도 종교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제국의 신학적 통합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의 치세 동안 가장 중요한 종교적 사건은 451년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조 이후 가장 중요한 교회 회의로 꼽히는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를 소집한 것이다.
이 공의회는 테오도시우스 2세 치세에 심화된 기독론(Christology) 논쟁,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에 대한 에우티케스주의(Eutychianism)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열렸다. 칼케돈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divine)과 인성(human)이라는 두 가지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명확히 선언하고, 이 두 본성이 혼합되거나 분리되지 않는다는 정통 교리를 확립했다. 이로써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주요 교리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시리아와 이집트 지역의 기독교 인구 중 많은 수를 차지했던 단성론(Miaphysites) 신자들의 소외를 초래했다. 이들은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는 훗날 동로마 제국 내에서 종교적, 정치적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마르키아누스의 이러한 종교적 개입은 그의 통치 전반에 걸친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 의지를 보여준다.
5. 경제적 번영과 유산 : 황제의 죽음과 후계
마르키아누스 황제는 군사 및 종교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동로마 제국은 상당한 재정적 안정을 이룩했다. 457년 1월 27일, 그가 사망했을 때 동로마 제국 국고에는 700만 솔리두스(solidi)라는 막대한 양의 금화가 남아 있었다. 이는 훈족의 침략과 테오도시우스 2세의 조공 지급으로 인해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던 제국의 상황을 고려할 때 매우 인상적인 성과였다. 이 기록은 마르키아누스가 뛰어난 행정가이자 재정 운영가였음을 입증한다.
마르키아누스는 비록 단 한 명의 딸인 마르키아 에우페미아(Marcia Euphemia)만을 두었지만, 그에게는 직계 아들이 없었다. 따라서 그의 죽음 이후에도 후계자 문제가 발생했다. 아스파르(Aspar)는 마르키아누스의 사위였던 안테미우스(Anthemius, 420–472)를 제쳐두고 군사령관이었던 레오 1세(Leo I, 401–474)를 황제로 옹립했다. 아스파르는 아버지 아르다부르(Ardabur)와 함께 동로마 제국 군대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특히 군사적 능력이 뛰어나 제국 내에서 ‘킹메이커(kingmaker)’라 불릴 정도로 황제 선출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이방인 출신이었기에 스스로 황제가 될 수 없었지만, 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가 사망했을 때, 자신의 부하였던 마르키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했고, 이후 457년 마르키아누스가 사망했을 때는 자신의 사위였던 안테미우스 대신 레오 1세를 지지한 것이다. 마르키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이어 테오도시우스 왕조와 연결되는 마지막 동로마 황제였다.
마르키아누스의 치세는 짧았지만, 그는 로마 제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훈족에 대한 단호한 정책으로 제국의 명예를 회복시켰고, 재정을 튼튼히 하며,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 기독교 교리의 확립에 기여했다. 그가 남긴 재정적 여유와 안정적인 제국은 그의 후계자들이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고 제국을 이어나가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마르키아누스는 혼란스러운 5세기 로마 제국에 나타난 한 줄기 빛과 같았던 실력자 황제로 평가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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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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