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요리아누스(Majorian, AD.c.420~461) : 서로마 제국 제56대 황제(AD.457~461)
- 플라비우스 율리우스 발레리우스 마이오리아누스(Flavius Iulius Valerius Maiorianus)
- 출생 : 기원후 420년 11월경 / Roman Gaul
- 사망 : 기원후 461년 8월 7일 / 데르토나(Dertona)
- 재위 : 기원후 457년 12월 28일 ~ 461년 8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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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요리아누스(Majorian, AD.c.420~461) : 서로마 제국 제56대 황제(AD.457~461) |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유능한 황제
로마 제국은 5세기에 접어들면서 서방 지역의 통제권을 점차 상실하고 멸망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혼돈의 시기, 서방 로마 제국은 잠시나마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희망을 보았던 황제가 있었다. 바로 군사적 재능과 행정 능력을 겸비했던 마요리아누스(Majorian)이다. 그는 457년부터 461년까지 서방을 통치하며 제국의 적들과 맞서 싸우고 내부 개혁을 시도했지만, 결국 짧은 치세 끝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등장은 쇠퇴해 가던 로마 제국에 마지막 활력을 불어넣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이었지만, 그가 암살당한 후 제국은 사실상 게르만 장군들의 허수아비 황제들에 의해 지배되면서 멸망의 길을 재촉하게 된다. 이 글에서는 마요리아누스의 생애, 그의 개혁과 군사 활동, 그리고 비운의 결말을 자세히 살펴본다.
1. 군인 황제의 탄생 : 율리아누스 마요리아누스의 초기 경력
플라비우스 율리우스 발레리우스 마요리아누스(Flavius Iulius Valerius Maiorianus)는 420년경 로마 속주 갈리아(Roman Gaul)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마 군사 귀족 가문 출신으로, 그의 이름인 마요리아누스는 그의 영향력 있는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재위 379~395) 휘하에서 마기스테르 밀리툼(magister militum), 즉 최고 군 지휘관의 자리에 올랐던 인물이다.
마요리아누스의 아버지는 아에티우스(Aetius) 장군의 재정관이었던 인물과 결혼했다. 마요리아누스는 바로 그 아에티우스 장군 휘하에서 군사 경력을 시작했다. 아에티우스는 훈족의 아틸라(Attila)로부터 서로마 제국을 지켜냈던 당대 최고의 군사 천재였다. 마요리아누스는 아에티우스를 따라 갈리아 지역에서 복무하며 중요한 인물들과 인연을 맺었다. 그중에는 훗날 그의 협력자이자 대적자가 될 리키메르(Ricimer)와 아에기디우스(Aegidius)도 있었다.
마요리아누스는 군인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투로넨시스(Turonensis, 오늘날 투르) 시를 방어하는 데 공을 세웠고, 447년 또는 448년 프렌치족과 벌인 비쿠스 헬레나 전투(Battle of Vicus Helena)에서 선두에 서서 기병대를 지휘하며 아에티우스(Aetius)의 통제하에 다리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활약들은 그가 제국의 가장 유능한 장군 중 한 명임을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2. 아비투스 폐위와 제위 등극 (457년)
455년, 서로마 제국은 발렌티니아누스 3세(Valentinian III) 황제의 암살과 반달족의 로마 약탈이라는 이중의 재앙을 겪었다. 이 혼란 속에서 갈리아 귀족 아비투스(Avitus, 재위 455~456)가 서고트족의 지지를 등에 업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아비투스는 로마 귀족과 군부, 특히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게르만 장군 리키메르의 반발에 직면했다.
리키메르는 당시 마요리아누스와 손을 잡고 아비투스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리키메르와 마요리아누스는 456년 10월 17일, 피아첸차(Piacenza)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아비투스를 격파하고 그를 황제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아비투스 퇴위 후, 서로마 제국은 한동안 황제 없는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리키메르는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오르지 않고, 오히려 457년 2월 28일 마요리아누스를 로마 군 최고 사령관인 마기스테르 밀리툼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28일, 마요리아누스는 리키메르의 지지 아래 서방 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마요리아누스는 동로마 제국에서 레오 1세(Leo I, 재위 457~474)가 동방 황제로 통치하던 시기에 서방 황제가 되었다. 그의 통치는 약 4년간 이어졌다.
3. 제국 재건을 위한 노력 : 활발한 군사 원정
마요리아누스는 황제에 오른 후 제국의 군사력을 재건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의 치세 3년 동안 그는 제국의 적들에 맞서 매우 적극적으로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
- 갈리아 지역 안정화 : 아비투스의 권력 기반이 갈리아에 있었던 만큼, 마요리아누스는 제위에 오르자마자 갈리아를 재정복하는 데 힘썼다. 그는 갈리아를 재통합한 후, 아비투스 황제를 지지했던 갈리아 귀족들의 반란을 용서하고, 이들을 제국 행정에 적극적으로 참여시켰다. 이는 이전 황제들이 특정 지역 귀족만을 선호했던 실책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현명한 조치였다. 그는 460년에 갈리아 원로원 의원 마그누스(Magnus)를 집정관(consul)으로 임명했고, 461년에는 이탈리아 원로원 의원 세베리누스(Severinus)를 임명했다. 이탈리아와 갈리아 귀족들을 모두 포용하여 통합하려는 그의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 히스파니아 회복과 반달족 원정 준비 : 마요리아누스는 히스파니아(Hispania) 지역을 일부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또한 서방 로마 제국에 끊임없이 해상 공격을 가하며 막대한 피해를 입히던 반달족을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 해상 원정을 준비했다. 그는 함대를 건설하여 반달족의 근거지인 마우레타니아(Mauretania)로 건너갈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반달족 원정은 비극적으로 좌절되었다. 460년 가을, 반달족은 배신자들을 이용하여 마요리아누스가 히스파니아 카르타고(Carthaginensis) 해안에서 출항 준비 중이던 함대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 함대를 잃은 마요리아누스는 반달족 원정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고, 겐세리크(Gaiseric) 왕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 이 평화 조약은 반달족의 마우레타니아 실효적 점령을 인정하는 내용을 포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비싼 군대를 해산하고 이탈리아로 돌아왔지만, 내부의 불만은 커져가고 있었다.
4. 내정 개혁과 원로원과의 관계
마요리아누스는 군사적 노력뿐만 아니라 제국 내부의 행정 및 재정 개혁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의 국내 정책은 506년 알라리크 2세(Alaric II)를 위해 편찬된 로마법 모음집인 ‘알라리크의 브레비아리움(Breviary of Alaric)’에 포함된 ‘노벨라에 마이오리아니(Novellae Maioriani)’라는 법령들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 재정 확보 및 부패 척결 : 그는 제국의 재정을 안정화하고 부패를 척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 원로원 존중 : 마요리아누스는 로마 원로원(Roman Senate)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표했다. 그는 자신의 즉위 전 원로원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고발자들의 음모에 귀 기울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며, 실제로 이 약속을 지켰다. 당대 로마의 지식인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Sidonius Apollinaris)는 마요리아누스가 자신의 익명으로 된 비방문 고발을 재치 있는 유머로 넘겨 상황을 무마시킨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
- 로마 기념물 보존 : 그는 로마의 고대 기념물들이 해체되어 건축 재료로 사용되는 것을 막는 법령을 제정하여 로마 유산 보존에 힘썼다.
마요리아누스의 이러한 노력들은 쇠퇴하는 제국에 활력을 불어넣고 마지막까지 로마의 영광을 되찾으려 했던 그의 의지를 보여준다.
5. 비극적인 최후와 역사적 평가
마요리아누스의 유능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치는 비극적으로 끝나고 말았다. 반달족 원정의 실패는 그에게 치명적이었다. 황제가 막대한 자금을 들여 준비한 원정이 실패하자, 이탈리아 내 그의 반대 세력, 특히 게르만 장군 리키메르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리키메르는 마요리아누스가 동로마 황제 레오 1세와 단독으로 연락하고 있다고 의심하며 그의 권력을 두려워했다.
결국 리키메르는 마요리아누스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461년 8월 7일, 마요리아누스는 데르토나(Dertona)에서 리키메르의 명령에 의해 체포되어 암살당했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마요리아누스의 죽음은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순간으로 평가된다. 그가 죽은 후, 뒤이은 황제들은 리키메르와 같은 게르만 장군들의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마요리아누스는 리키메르에게 살해당한 마지막 정식 황제였으며, 그의 사후 서로마 제국은 불과 15년 후인 476년에 공식적으로 멸망하게 된다. 그의 이야기는 로마 제국 말기에 나타났던 소수의 유능한 황제들이 비극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 한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남아있다. 그는 로마 제국 최후의 강력한 황제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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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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