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우스 세베루스(Libius Severus, AD.?~465) : 서로마 제국 제57대 황제(AD.461~465)
- 리비우스 세베루스(Libius Severus), 세베루스 3세(Severus III)
- 출생 : 미상 / 루카니아( Lucania)
- 사망 : 기원후 465년 11월 14일)
- 재위 : 기원후 461년 11월 19일 ~ 465년 1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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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우스 세베루스(Libius Severus, AD.?~465) : 서로마 제국 제57대 황제(AD.461~465) |
혼돈 속 ‘그림자 황제’이자 리키메르의 꼭두각시
로마 제국은 5세기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특히 서로마 제국은 내분과 외부 침략으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황제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유능한 게르만족 장군들의 손에 좌우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약 4년간 서로마 제국을 통치했던 리비우스 세베루스(Libius Severus)는 역사 기록에 거의 남지 않은 극히 모호한 인물이다. 그는 당대 가장 강력했던 게르만 장군 리키메르(Ricimer)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으며, 그의 치세는 서로마 제국이 얼마나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다. ‘그림자 황제’라 불린 그의 삶은 혼돈의 시대 속에서 이름만 황제였던 한 인물의 쓸쓸한 초상화를 그린다. 이 글에서는 리비우스 세베루스의 알려진 단편적인 기록과 그의 시대적 배경을 통해, 멸망 직전 서로마 제국의 암울한 모습을 자세히 살펴본다.
1. 시대적 배경 : 붕괴 직전의 서로마 제국 (460년경)
리비우스 세베루스가 황제가 되었던 460년대 초는 서로마 제국에 있어 최악의 시기였다. 3세기 위기 이후 제국은 동방과 서방으로 분할되어 통치되었지만, 서방 제국은 게르만족의 대규모 이동과 내부 갈등으로 인해 통제 불능 상태에 놓여 있었다.
- 영토 상실 : 460년경 서로마 제국의 광대한 영토는 이미 상당 부분 ‘야만족’들의 손에 넘어갔다. 브리튼(Britain)은 로마의 통치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아프리카는 반달족(Vandals)의 지배 아래 놓였다. 히스파니아(Hispania)는 수에비족(Suebi)과 서고트족(Visigoths)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로마 제국의 동맹자(foederati)이면서도 사실상 독립적인 세력이었다.
- 정치적 불안정 : 황제의 자리는 군부의 입김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다. 발렌티니아누스 왕조가 455년에 멸망한 후, 짧게 재위했던 황제들은 대부분 게르만족 장군들의 지원에 힘입어 제위에 올랐으며, 이들을 ‘그림자 황제(Shadow Emperors)’라고 부른다. 리비우스 세베루스도 바로 이들 중 네 번째 황제였다.
이처럼 제국은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외세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서서히 소멸해 가고 있었다.
2. 베일 속에 가려진 황제의 기원과 이름
리비우스 세베루스의 본명은 리비우스 세베루스(Libius Severus)이며, 때로는 세베루스 3세(Severus III)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오늘날 이탈리아 남부에 해당하는 루카니아(Lucania) 출신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과 초기 경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심지어 그의 성격이나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는 고대 기록들이 거의 침묵하고 있다.
그의 이름 자체도 약간의 혼란이 있다. 라틴어에서 'b'와 'v'가 종종 혼용되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간혹 리비우스(Livius)로 잘못 표기되기도 했다. 또한, 일부 기록(Chronicon Paschale)에서는 그를 세르펜티우스(Serpentius)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또 다른 기록(Theophanes the Confessor)에서는 세베루스와 세르펜티우스를 함께 사용하기도 했다. 현대 학자들은 세르펜티우스라는 이름이 기록의 오류이거나, 또는 그의 시그눔(signum)이나 수페르노멘(supernomen), 즉 별칭일 수 있다고 추정한다. 이러한 이름의 불확실성은 그의 역사적 모호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3. 리키메르의 꼭두각시 황제로 등극하다
리비우스 세베루스가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된 배경은 전임 황제 마요리아누스(Majorian, 재위 457~461)의 비극적인 죽음과 깊은 관련이 있다. 마요리아누스는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유능한 황제로 평가받으며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고 제국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반달족 원정 실패와 함께 게르만족 장군 리키메르와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결국 461년, 리키메르는 마요리아누스를 제거하고 새로운 황제로 리비우스 세베루스를 옹립했다.
리키메르는 로마군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마기스테르 밀리툼(magister militum)이었으며, 서로마 제국의 정치적 실세였다. 그는 황제의 권력보다는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 더 관심이 많았다. 리비우스 세베루스는 리키메르에게 완전히 의존적인 황제였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리키메르가 리비우스 세베루스 통치 기간 동안 사실상 모든 실권을 쥐고 있었다고 본다. 따라서 리비우스 세베루스의 치세에 일어난 어떤 단일 제국 활동도 그에게 명확하게 귀속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4. 제국을 휩쓴 위기들 : 그림자 황제의 무력함
리비우스 세베루스의 재위 기간(461년 11월 19일 ~ 465년 11월 14일) 동안 서로마 제국은 수많은 위기에 직면했지만, 그는 이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그의 치세는 제국이 통제권을 잃어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시기였다.
- 동방 황제 레오 1세의 인정 거부 : 리비우스 세베루스는 동방 황제 레오 1세(Leo I, 재위 457~474)로부터 황제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는 서방 제국의 권위를 더욱 약화시켰고, 두 제국 간의 협력 체제가 사실상 붕괴되었음을 의미한다. 462년, 리비우스 세베루스가 레오 1세와 함께 공동 집정관으로 지명되기도 했지만, 이는 형식적인 직위에 불과했다.
- 반달족의 끊임없는 이탈리아 약탈 : 전임 황제 마요리아누스가 반달족의 왕 겐세리크(Gaiseric)와 맺었던 동맹은 리비우스 세베루스의 재위 기간에 완전히 붕괴되었다. 반달족은 이탈리아 해안을 끊임없이 약탈하며 로마 제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리비우스 세베루스나 리키메르는 이를 효과적으로 막아낼 힘이 없었다.
- 속주들의 반항 : 갈리아(Gaul)와 달마티아(Dalmatia)에서는 마요리아누스에게 충성을 바쳤던 로마 관리들이 리비우스 세베루스의 통치를 거부했다. 이들 지역은 사실상 서로마 제국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 알란족의 침략 : 북이탈리아는 알란족(Alans)의 침략을 받았다. 제국은 사방에서 야만족의 위협에 시달렸고, 이는 끊임없이 제국의 자원을 고갈시켰다.
이처럼 리비우스 세베루스의 통치 기간 동안 서로마 제국은 사실상 이름만 남은 상태였으며, 그의 황제로서의 역할은 전적으로 리키메르의 의도에 따라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5. 짧은 재위와 의문스러운 죽음
리비우스 세베루스는 461년 11월 19일부터 465년 11월 14일까지 약 4년간 재위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기록은 모호하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가 자연사했다고 보지만, 또 다른 이들은 리키메르가 그를 독살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리키메르가 자신이 조종하기 어려운 황제들을 가차 없이 제거했던 전례를 볼 때, 후자의 가설도 충분히 설득력을 가진다.
그의 사후, 리키메르는 한동안 황제를 옹립하지 않고 서로마 제국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다음 황제 안테미우스(Anthemius, 재위 467~472)가 제위에 오르기까지 약 18개월간의 공백기가 있었다.
6. 역사적 평가 : 무능한 황제의 그림자
리비우스 세베루스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 직전에 나타난 수많은 단명한 황제들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그의 통치는 리키메르라는 강력한 군 사령관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으며, 제국의 어떠한 위기도 해결하지 못했다. 그의 시대는 서로마 제국의 명목상의 권위가 점차 소멸하고, 게르만족 장군들이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하던 시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역사가들은 리비우스 세베루스를 로마의 힘이 쇠퇴하고, 황제의 권력이 얼마나 무력해졌는지를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한다. 그는 스스로 어떤 역사적 사건의 주역이 되기에는 너무나 미미한 존재였지만, 그의 존재 자체가 멸망해 가던 서로마 제국의 암울한 상황을 대변하는 중요한 증거로 남아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그림자 황제'의 전형이자, 몰락의 가속화를 알린 비운의 이름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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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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