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그누스 막시무스(Magnus Maximus, AD.?~388) : 로마 제국 황제 찬탈자(AD.383~388)
- 마그누스 막시무스(Magnus Maximus)
- 출생 : 미상 / 갈라에키아(Gallaecia), 히스파니아(Hispania)
- 사망 : 기원후 388년 8월 28일 / 아퀼레이아(Aquileia)
- 배우자 : 엘렌(Elen)
- 자식 : 빅토르(Victor)
- 재위 : 기원후 383년 여름 ~ 388년 8월 28일
- 공동 통치 :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동방
발렌티니아누스 2세(Valentinian II)
빅토르(Vi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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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누스 막시무스(Magnus Maximus, AD.?~388) : 로마 제국 황제 찬탈자(AD.383~388) |
로마 제국의 찬탈자이자 브리튼의 전설적 황제
로마 제국은 끊임없이 황제들의 흥망성쇠로 점철된 역사였다. 특히 4세기 후반은 게르만족의 침입과 내부 권력 투쟁으로 제국이 격동하던 시기였다. 이 혼란 속에서 제국의 서방 황제 그라티아누스(Gratian)에게 반기를 들고 제위를 찬탈했던 인물이 바로 마그누스 막시무스(Magnus Maximus)이다. 그는 짧은 기간 로마 제국 서방의 상당 부분을 통치했으나, 결국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와의 대결에서 패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로마 역사뿐만 아니라 브리튼(Britain)과 웨일스(Wales)의 전설 속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며 ‘영웅’으로 재탄생했다. 이 글에서는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생애, 그의 황제위 찬탈 과정, 그리고 그의 몰락과 역사적 유산에 대해 자세히 살펴본다.
1. 젊은 시절과 군사 경력 : 국경의 수호자
마그누스 막시무스는 350년경 히스파니아(Hispania)의 갈라에키아(Gallaecia)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마 제국에서 변방 출신 인물이 군사적 재능으로 고위직에 오르는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그의 집안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에서 이어진 테오도시우스 왕조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젊은 시절, 그는 훗날 위대한 황제가 되는 테오도시우스 1세와 함께 브리타니아(Britannia)에서 테오도시우스 장군(Theodosius the Elder) 휘하에서 복무했다. 이 경험은 그에게 중요한 군사적 기반과 인맥을 형성해 주었다.
마그누스 막시무스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았다. 373년 아프리카에서 군복무를 했으며, 특히 380년 브리튼으로 파견된 후에는 381년에 침입해 들어온 픽트족(Picts)과 스코티족(Scoti)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며 군인으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 이러한 성공으로 그는 브리튼 주둔 로마군의 둑스(dux), 즉 총사령관 자리에 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병사들의 신뢰와 로마화된 브리튼 주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으며 군부 내에서 강력한 지지 기반을 다져나갔다. 이는 훗날 그가 황제위를 찬탈하는 데 결정적인 배경이 된다.
2. 황제위 찬탈과 서방 제국의 통치 (383년)
383년, 마그누스 막시무스는 브리타니아에서 그의 군대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다. 이는 당시 서방 제국을 통치하던 황제 그라티아누스(Gratian, 재위 375~383)에 대한 직접적인 반역이었다. 그라티아누스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게르만 문화를 지나치게 선호하고 국정을 소홀히 한다는 비판을 받으며 인기가 하락하고 있었다. 마그누스 막시무스는 이러한 불만을 파고들었고, 병사들은 그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했다.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반란 소식에 그라티아누스는 밀라노로 도망쳤으나, 결국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군대에게 붙잡혀 살해당했다. 이로써 마그누스 막시무스는 갈리아(Gaul), 히스파니아, 브리튼 등 서방 제국의 광대한 영토를 장악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동방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가 그를 합법적인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율리아누스 황제 사망 후의 혼란을 막기 위해 테오도시우스 1세는 마그누스 막시무스를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인정하며 외교적인 타협을 했다. 마그누스 막시무스는 갈리아, 히스파니아, 브리튼을 통치하게 되었고, 이탈리아(Italia), 판노니아(Pannonia), 히스파니아, 아프리카(Africa)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Valentinian II, 재위 375~392)가 계속 통치하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로마 제국은 발렌티니아누스 2세, 테오도시우스 1세, 그리고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세 명의 황제가 공동으로 통치하는 다소 복잡한 체제를 이루게 되었다.
3. 이탈리아 침공과 피할 수 없는 대결
마그누스 막시무스는 비록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황제로 인정받았지만, 그의 야망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방 전역을 장악하려 했다. 387년, 그는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동방으로 피신시켰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 그의 어머니 유스티나(Justina)는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테오도시우스 1세는 망명 온 발렌티니아누스 2세에게 군사적 지원을 약속했다.
이때부터 마그누스 막시무스와 테오도시우스 1세 사이의 피할 수 없는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마그누스 막시무스를 단지 찬탈자로 치부하는 대신, 그라티아누스 황제를 죽인 원수이자 로마 제국의 안정화를 방해하는 존재로 규정하며 군사적 개입의 명분을 삼았다.
4. 최후의 전투와 비극적인 몰락 (388년)
388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막대한 병력을 이끌고 마그누스 막시무스와의 대결에 나섰다. 결정적인 전투는 388년 8월, 오늘날 슬로베니아 포테나에서 벌어진 ‘포테나 전투(Battle of Poetovio)’에서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군대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군대에게 참패를 당했다.
전투에서 패한 마그누스 막시무스는 아퀼레이아(Aquileia)로 도주하여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지만, 결국 포위되었다. 그는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자비를 구하며 항복했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1세는 그라티아누스 살해에 대한 복수와 자신의 정통성 확립을 위해 마그누스 막시무스를 처형할 것을 명령했다. 388년 8월 28일, 마그누스 막시무스는 아퀼레이아에서 처형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죽음 이후, 로마 원로원은 그의 이름에 대한 ‘담나티오 메모리아에(Damnatio memoriae)’, 즉 기록 말살형을 선포하며 그의 존재를 역사에서 지우려 했다. 그러나 그의 가족 중 어머니와 최소 두 명의 딸은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목숨을 구했다. 그의 아들 빅토르(Victor) 역시 아버지와 함께 공동 황제를 칭했지만, 388년 가을 트리어(Trier)에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장군 아르보가스트(Arbogast)에게 살해당했다.
5. 가족과 후손 : 역사에 남은 흔적
마그누스 막시무스에게는 아내가 있었지만, 그녀의 이름은 명확한 역사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다. 다만 웨일스의 전통 설화에서는 그녀를 ‘성 엘렌(Saint Elen)’과 연관 짓기도 한다. 그의 어머니와 딸들은 테오도시우스 1세의 자비로 목숨을 건졌고, 딸들은 친척에게 보내지고 어머니는 연금을 받으며 지낸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후손과 관련된 기록들이다. 그의 딸 중 한 명이 395년 아프리카 프로콘술을 역임한 에노디우스(Ennodius)와 결혼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에노디우스의 후손 중에는 훗날 황제가 된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Petronius Maximus, 재위 455)와 아니키우스 올리브리우스(Anicius Olybrius, 재위 472) 등이 있으며, 파비아(Pavia)의 주교인 성 마그누스 펠릭스 에노디우스(St. Magnus Felix Ennodius)도 있다.
또한 웨일스의 9세기 석비 ‘엘리세기스 기둥(Pillar of Eliseg)’에는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딸 세비라(Sevira)가 브리튼의 왕 보티게른(Vortigern)과 결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브리튼의 전설과 역사 속에서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준다.
6. 역사적 평가 : 찬탈자이자 전설이 된 황제
마그누스 막시무스는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찬탈자이자 비운의 황제로 기억된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바탕으로 황제위에 올랐으나, 과도한 야망으로 인해 정통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와 충돌하며 결국 패망했다. 그의 죽음은 일부 역사가들에게 로마가 브리튼과 갈리아 북부에서 직접적인 제국적 존재감을 상실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브리튼과 웨일스의 역사 및 전설 속에서 로마의 황제가 아닌, 오히려 ‘웨일스 왕조의 조상’이자 ‘꿈의 마크센 블레디그(Macsen Wledig)’로 추앙받으며 영웅적인 존재로 재탄생했다. 웨일스 전설에 따르면 그는 현명하고 정의로운 통치자였으며, 웨일스 왕조의 많은 부분이 그에게서 비롯되었다고 믿어진다. 이는 정복자 로마인이 아닌, 브리튼의 독립과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그의 이미지가 재해석되었음을 보여준다.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삶은 로마 제국의 쇠퇴기, 즉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지역의 군사 지도자들이 부상하던 시대적 배경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는 단순한 권력 욕망의 화신이 아니라, 급변하는 제국의 상황 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펼치려 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로마와 브리튼 양쪽에서의 복합적인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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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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