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게니우스(Eugenius, AD.?~394) : 로마 제국 황제 찬탈자(AD.392~394)
- 유게니우스(Eugenius)
- 출생 : 미상
- 사망 : 기원후 394년 9월 6일 / 프리기두스 강(Frigidus River)
- 재위 : 392년 8월 22일 ~ 394년 9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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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게니우스(Eugenius, AD.?~394) : 로마 제국 황제 찬탈자(AD.392~394) |
로마 제국의 마지막 이교 부흥을 꿈꾼 찬탈자
로마 제국은 4세기 말 기독교가 국교로 자리 잡으면서 거대한 종교적, 정치적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제국의 근간이었던 전통 로마 신앙, 즉 이교(異敎)를 옹호하는 세력 또한 여전히 강력했다. 이 격동의 시기에 서방 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여 이교 부흥을 시도했지만, 결국 기독교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와의 운명적인 대결에서 패배한 인물이 바로 유게니우스(Eugenius)이다. 그의 통치는 불과 2년에 그쳤지만, 로마 제국에서 이교 부흥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이 글에서는 문법 교사 출신이었던 유게니우스가 어떻게 황제가 되었고, 어떤 정책을 펼쳤으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살펴본다.
1. 학자에서 황제로 : 권좌에 오르기까지
유게니우스(Flavius Eugenius)는 392년부터 394년까지 서방 로마 제국을 통치한 황제로,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394년에 사망했다. 그는 본래 문법과 수사학을 가르치던 교사 출신으로, 학문적 소양이 깊은 지식인이었다. 이후 로마 제국의 행정 고위 관직인 마기스테르 스크리니오룸(magister scriniorum)을 역임하며 관료로서의 경력도 쌓았다. 이 직책은 황실 비서실의 장으로, 황제의 문서와 행정 명령을 담당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의 정치적 부상은 서방 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프랑크족 출신 군 사령관 아르보가스트(Arbogast)와의 인연 덕분이었다. 아르보가스트의 삼촌인 리코메레스(Richomeres)의 소개로 아르보가스트를 알게 된 유게니우스는 그의 신임을 얻었다. 아르보가스트는 비록 게르만족 혈통이었으나 서방 로마 제국의 군부를 장악하며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Valentinian II)마저 꼭두각시로 만들 만큼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392년 5월,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의문스럽게 사망한 지 3개월이 지난 8월 22일, 아르보가스트는 프랑스 리옹에서 유게니우스를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추대하며 황제로 옹립했다. 아르보가스트가 황제 자리에 직접 오르지 않고 유게니우스를 선택한 데는 전략적인 판단이 작용했다. 프랑크족 이교도였던 자신보다 로마인이자 기독교도인 유게니우스가 황제로서 대내외적인 명분과 정당성을 확보하기에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또한 로마 원로원이 로마인 출신인 유게니우스를 지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계산도 있었다. 이로써 유게니우스는 아르보가스트의 후원을 받는 서방 황제로 등극하며 로마 정치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2. 행정 개혁과 이교 부흥 정책
황제에 오른 유게니우스는 제국 내부의 행정 체제를 재편하며 자신의 통치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그는 이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서방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감시를 위해 주요 관직에 배치했던 자신의 측근들을 해임하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원로원 계급 출신 인물들로 대체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비리우스 니코마쿠스 플라비아누스 장로(Virius Nicomachus Flavianus the Elder)를 제국의 최고 행정직인 프라이토리안 프리펙트(praetorian prefect)로 임명했으며, 그의 아들 소(小) 니코마쿠스 플라비아누스(Nicomachus Flavianus the Younger)는 로마 시장에 해당하는 프라이펙투스 우르비(praefectus urbi) 자리에 올랐다. 또한 누메리우스 프로엑투스(Numerius Proiectus)는 새로운 프라이펙투스 안노나이(praefectus annonae)가 되었다.
유게니우스의 통치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주목받는 부분은 그의 종교 정책이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기독교인이었지만, 그의 실제 신앙심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그는 이교도 원로원 의원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고, 이들의 설득에 따라 공공 자금을 이교 사업에 사용하도록 허용했다. 이는 당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엄격한 이교 탄압 정책과 대조되는 행보였다. 특히 로마 포럼에 위치한 베누스에 로마 사원(Temple of Venus and Roma)을 재건하고, 오랜 기간 로마 제국의 승리를 상징하던 ‘승리의 제단’(Altar of Victory)을 로마 원로원 회의장 쿠리아(Curia)에 다시 복원했다. 또한 이교도였던 니코마쿠스 플라비아누스를 고위직인 프라이토리안 프리펙트로 임명하며 이교 부흥의 명분을 살렸다.
이러한 이교 장려 정책은 정통 기독교를 지지했던 테오도시우스 1세와의 관계를 급격히 악화시켰다. 강력한 기독교 주교인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Ambrose)는 유게니우스의 궁정이 밀라노에 도착하자 도시를 떠나버리며 유게니우스의 종교 정책에 대한 불만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기도 했다.
3. 군사적 역량과 외교적 시도
유게니우스는 군사적으로도 뛰어난 지도자적 역량을 보였다. 그는 라인 강(Rhine) 국경을 따라 제국을 위협하던 게르만 부족들, 특히 알레만니족(Alamanni)과 프랑크족(Franks)과의 관계를 재정비하고 동맹을 강화했다. 심지어 그는 직접 라인 강 국경까지 진격하여 자신의 군대를 사열함으로써 이들 부족에게 강력한 군사력을 과시하여 평화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위압적인 시위 이후, 그는 알레만니족과 프랑크족 출신의 병사들을 자신의 군대로 대거 모집하기도 했다. 이는 유게니우스가 단순히 학자나 관료 출신이 아닌, 군사적 지략도 겸비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유게니우스는 제위에 오른 후,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동방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사절단을 보냈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들을 형식적으로만 맞이했을 뿐, 유게니우스의 통치에 대한 명확한 인정을 거부하고 모호한 답변만을 주었다. 이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유게니우스의 즉위를 찬탈 행위로 보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결국 두 사절단은 아무런 성과 없이 돌아왔다. 393년 1월, 테오도시우스 1세는 유게니우스에 대한 직접적인 반대의사를 표명하며 자신의 8살 된 어린 아들 호노리우스(Honorius)를 서방의 ‘아우구스투스’로 승격시켰다. 이는 유게니우스의 황제위가 정통성이 없다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공식적인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4. 프리기두스 강 전투와 비극적인 최후
테오도시우스 1세가 호노리우스를 서방의 황제로 선포하면서, 유게니우스와 테오도시우스 1세 사이의 군사적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양측은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준비했다. 서방의 유게니우스와 아르보가스트는 자신들의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동부로 향했다.
운명의 대결은 394년 9월, 이탈리아와 이리리쿰 사이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프리기두스 강(Frigidus River) 근처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는 서방 로마 제국과 동방 로마 제국의 미래, 그리고 제국의 종교적 방향을 결정짓는 역사적인 싸움이었다. 전투 초기에는 유게니우스와 아르보가스트의 군대가 우세했지만, 이틀에 걸친 격렬한 전투 끝에 테오도시우스 1세의 동방 로마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프리기두스 강 전투에서 패배한 유게니우스는 결국 붙잡혔다. 그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발치에서 목숨을 구걸했지만, 결국 394년 9월 6일 처형당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잘린 머리와 함께 콘스탄티노플 거리를 끌려다니며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찬탈을 주도했던 아르보가스트 또한 전투 후 숲으로 도망쳤다가 며칠 후 자살했다.
5. 유게니우스의 유산 : 실패한 이교 부흥의 마지막 그림자
유게니우스의 짧은 통치는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기독교가 국교화되는 과정에서 이교도들이 마지막으로 주류 권력을 되찾고 자신들의 신앙을 복원하려 했던 시도이자, 그 시도가 좌절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의 죽음과 프리기두스 강 전투의 승리는 로마 제국이 기독교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유게니우스는 비록 찬탈자라는 꼬리표와 함께 역사에 기록되었지만, 뛰어난 학식과 군사적, 행정적 능력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의 재위는 혼란스러웠던 4세기 말 로마 제국의 정치적 불안정과 종교적 갈등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남아있다. 유게니우스는 제국에서 이교 부흥을 시도한 마지막 황제로, 그의 죽음과 함께 로마의 고대 전통 신앙은 점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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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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