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4일 목요일

달마티우스(Dalmatius, AD.?~337) : 로마 제국 제44대 공동황제(AD.335~337)

달마티우스(Dalmatius, AD.?~337) : 로마 제국 제44대 공동황제(AD.335~337)

 
  • 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Flavius Dalmatius), 델마티우스(Delmatius)
  • 출생 : 미상
  • 사망 : 기원후 3379
  • 부친 : 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Flavius Dalmatius)

달마티우스(Dalmatius, AD.?~337) : 로마 제국 제44대 공동황제(AD.335~337)
달마티우스(Dalmatius, AD.?~337) : 로마 제국 제44대 공동황제(AD.335~337)
 

비운의 황족 : 로마의 카이사르 달마티우스의 삶과 죽음

 
고대 로마 제국의 역사는 수많은 황제와 권력 투쟁의 연속이었다. 특히 4세기는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기 전, 강력한 황제 콘스탄티누스 1(Constantinus I, 272337)의 통치 아래 잠시 안정기를 맞이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다시금 황실 내부의 피바람을 예고했다. 이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조카이자 잠시 로마의 카이사르(Caesar)’였던 달마티우스(Dalmatius, 사망 337)이다. 그의 짧지만 격렬했던 생애는 로마 제국의 불안정한 계승 원칙과 피비린내 나는 권력의 속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1. 달마티우스의 가계와 성장 :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일원

 
달마티우스는 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Flavius Dalmatius)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동시대 주화에는 종종 델마티우스(Delmatius)로 표기되었다. 그는 서기 337년 사망한 인물로,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가계는 당대 로마 제국에서 가장 강력했던 콘스탄티누스 왕조(Constantinian dynasty)에 속한다 .
 
그의 아버지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감찰관(censor)을 지낸 인물이자, 그 역시 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Flavius Dalmatius)라는 동명이었다. 이 아버지 달마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복형제였는데, 이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Constantius I Chlorus, 250306)가 두 번 결혼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달마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조카가 되는 셈이다 .
 
달마티우스에게는 형제인 한니발리아누스(Hannibalianus, 사망 337)가 있었다. 한니발리아누스 또한 335년에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왕 중의 왕(Rex Regum)’이라는 특이한 칭호를 받으며 로마 제국-사산조 페르시아 접경 지역의 동방 통치를 위임받은 인물이다. 두 형제는 당시 갈리아 지방의 툴루즈(Tolosa, 현재 프랑스의 Toulouse)에서 저명한 수사학자 엑수페리우스(Exuperius)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이는 황족으로서 장차 제국의 중요한 역할을 맡을 인재로 양성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배경은 달마티우스가 단순한 귀족이 아니라 제국의 핵심 권력층에 깊이 연루된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2. 카이사르로의 임명 :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제위 계승 구상

 
콘스탄티누스 1세는 로마 제국의 혼란을 끝내고 제국을 안정시킨 위대한 황제였다. 그는 324년 라이벌인 리키니우스(Licinius, 263325)를 물리치고 로마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제국의 효율적인 통치와 미래의 안정적인 제위 계승을 위해 자신의 가족들을 요직에 앉혔다. 콘스탄티누스에게는 콘스탄티누스 2(Constantinus II, 317340), 콘스탄티우스 2(Constantius II, 317361), 콘스탄스 1(Constans I, 320350) 등 세 아들이 있었다. 이들은 각각 아우구스투스(Augustus)’카이사르칭호를 받아 제국의 특정 지역을 분할 통치하도록 했다.
 
달마티우스가 카이사르로 임명된 것은 이러한 콘스탄티누스의 제위 계승 구상 속에서 이루어졌다. 335918, 그는 공식적으로 카이사르 지위에 올랐다. 이로써 그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들과 함께 제국의 주요 통치권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달마티우스가 카이사르로서 통치했던 영역은 트라키아(Thracia), 아카이아(Achaea), 마케도니아(Macedonia) 등 제국의 중요한 동부 지역들이었다. 이 지역들은 지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제국의 동방 방어를 책임지는 역할도 맡았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달마티우스를 포함한 여러 황족들에게 제국의 광대한 영토를 분할하여 다스리게 함으로써, 제국 전체의 효율적인 통치와 유사시의 빠른 대응을 기대했다. 이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치 체제와 유사한 권력 분할의 형태로, 한 명의 황제가 모든 제국을 다스리기에는 너무나 광활하다는 현실적인 판단에서 비롯되었다.
 

3.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죽음과 337년 황실 숙청의 서막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의 정교한 계승 계획은 그의 죽음과 함께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3375,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사망하자 제국은 다시금 불안정한 권력 공백 상태에 빠졌다. 그는 제국의 분할 통치를 명확히 구상하고 있었지만, 그의 죽음은 그 계획을 실행할 강한 중앙 권력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들들, 즉 콘스탄티누스 2, 콘스탄티우스 2, 콘스탄스 1세는 각자의 권력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고, 이때 이들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들이 있었다. 바로 제위에 오를 가능성이 있는 다른 황족들이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유일한 황제가 되면서 자신의 이복형제들을 포함한 많은 친인척들을 등용하여 요직에 앉혔다. 그 중에는 달마티우스와 그의 형제 한니발리아누스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복동생이자 달마티우스의 아버지와 동명이인인 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1세의 또 다른 이복동생인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Julius Constantius, 사망 337)와 그의 아들들, 훗날 황제가 되는 율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Julian Augustus, 331363)와 갈루스(Gallus, 325354)도 있었다.
 
이처럼 콘스탄티누스 1세의 직계 아들들 외에도 제국의 유력한 지위를 가진 황족들이 다수 존재했다. 이들은 명목상 카이사르이거나 주요 직책을 맡고 있었으므로, 장차 황위를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 라이벌로 비춰질 수 있었다.
 

4. 달마티우스의 죽음 : 337년 황실 숙청의 비극

 
콘스탄티누스 대제 사망 후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은 337년 여름, 로마 제국은 피비린내 나는 비극적인 사건을 목격한다. 바로 ‘337년 황실 숙청(Purge of 337)’으로 알려진 대규모 숙청이다. 이 숙청의 희생자 중 한 명이 달마티우스였다. 그는 337년 초여름에 사망했으며, 자신의 병사들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기록되었다. 그의 형제 한니발리아누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인 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를 비롯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복동생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 등 수많은 콘스탄티누스 1세의 친척들이 이때 목숨을 잃었다.
 
이 숙청의 정확한 전모와 배후는 오늘날까지도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주된 견해는 콘스탄티우스 2세가 숙청을 주도했거나 최소한 방조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사망한 후, 아버지의 직계 아들들(본인과 두 형제) 외에 제위 계승에 간섭할 수 있는 모든 잠재적 위협 요소를 제거하려 했을 것이다. 군대가 이러한 숙청에 동조했거나 직접 실행한 것은 당시 군대의 충성심이 황제 개인보다 강력한 보상이나 권력자에게 향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달마티우스가 자신의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는 기록은 이 숙청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군사적 지원을 바탕으로 강행되었음을 시사한다.
 
달마티우스의 죽음은 로마 제국 황실 내부의 권력 암투가 얼마나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세웠던 제국 안정화와 계승의 틀은 그의 죽음과 함께 허물어졌고, 혈족 간의 경쟁은 살육으로 이어지며 제국의 기반을 흔들었다. 이 사건 이후 살아남은 황족들은 콘스탄티누스 1세의 직계 아들들과 극히 일부의 인물들뿐이었다.
 

5. 달마티우스의 죽음이 남긴 의미

 
달마티우스의 삶과 죽음은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하나의 작은 조각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이는 당시 제국의 정치적 현실을 반영하는 중요한 사례이다. 그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계획하에 중요한 카이사르의 직위를 받았지만, 결국 제위 계승의 불안정성과 황실 내 권력 다툼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은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후계자들이 피를 뿌리며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하려 했던 잔혹한 과정을 보여주는 증거다.
 
달마티우스와 같은 비운의 황족들은 로마 제국의 역사가 단지 위대한 정복과 통치의 연속만이 아니라, 때로는 피와 배신, 그리고 권력을 향한 맹렬한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그의 이야기는 로마 제국 황권의 불안정성과 계승 원칙의 미성숙이 초래한 비극적인 결과의 한 단면을 보여주며, 이는 이후 로마 제국이 동서로 완전히 분리되고 멸망하는 과정 속에서도 끊이지 않는 권력 다툼의 전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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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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