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키니우스 2세(Licinius II, AD.c.315~326) : 로마 제국 제44대 공동황제(Caesar, AD.317~324)
로마 제국 권력 투쟁의 희생양, 리키니우스 2세
- 리키니우스 2세(Licinius II)
- 리키니우스 주니오르(Licinius Junior)
- 리키니우스 카에사르(Licinius Caesar)
- 발레리우스 리키니아누스 리키니우스(Valerius Licinianus Licinius)
- 출생 : 기원후 315년 7/8월경
- 사망 : 기원후 326년경
- 재위 :
Caesar : 기원후 317년 3월 1일 ~ 324년 9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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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키니우스 2세(Licinius II, AD.c.315~326) : 로마 제국 제44대 공동황제(AD.317~324) |
1. 혼돈의 시대 속에 피어난 어린 왕자
기원후 3세기는 로마 제국에 ‘3세기의 위기’라 불리는 극심한 혼란의 시기였다. 군인 황제들의 난립, 끊임없는 내전, 그리고 제국 안팎의 위협은 로마를 뿌리째 흔들었다. 이러한 혼란을 잠재우고자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 황제는 사두정치(Tetrarchy) 체제를 도입하여 안정을 도모했지만, 그의 퇴위 이후 이 시스템은 다시 예측 불가능한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이 격동기 속에서 황제들 간의 패권 다툼에 휘말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로마 제국의 동방 황제 리키니우스(Licinius I)의 아들이자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the Great)의 이복 조카였던 발레리우스 리키니아누스 리키니우스(Valerius Licinianus Licinius), 통칭 리키니우스 2세(Licinius II, 315년경~326년)다. 그는 ‘리키니우스 주니어(Licinius Junior)’ 또는 ‘리키니우스 카이사르(Licinius Caesar)’로도 불렸다.
2. 황실의 혈통과 어린 카이사르로의 즉위
리키니우스 2세는 315년 7월 또는 8월경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동방 황제 리키니우스 1세였고, 어머니는 플라비아 율리아 콘스탄티아(Flavia Julia Constantia)였다. 그의 어머니는 로마 제국의 강력한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복 여동생이기도 했다. 즉, 리키니우스 2세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복 조카인 셈이다. 이 혈연 관계는 훗날 그의 삶과 죽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317년 3월 1일, 리키니우스 2세는 불과 20개월의 나이로 ‘카이사르(Caesar)’의 지위에 올랐다. 이는 그의 아버지 리키니우스 1세와 콘스탄티누스 1세 사이의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 같은 날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 크리스푸스(Crispus)와 콘스탄티누스 2세(Constantine II) 또한 카이사르로 임명되었다. 이 날짜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버지이자 이 아이들의 할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 1세의 즉위 기념일이기도 했다. 이들은 모두 같은 날 즉위함으로써 카이사르들 사이의 서열 다툼을 피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리키니우스 2세는 나이가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황실의 일원으로서 중요한 상징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그는 문법학자이자 훗날 집정관이 되는 플라비우스 옵타투스(Flavius Optatus)에게 교육받았다고 한다.
3. 소년 황제의 명목상 통치와 권력 관계의 징표
리키니우스 2세는 황실에 편입된 지 2년 후인 319년에 첫 번째 ‘콘술(consul)’ 직을 수행했다. 그의 공동 콘술은 그의 삼촌인 콘스탄티누스 1세였다. 321년에는 두 번째 콘술이 되었는데, 이때는 제국이 동서로 나뉘어 콘술을 임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동방에서는 그가 아버지 리키니우스와 함께 콘술이 되었고, 서방에서는 콘스탄티누스 1세와 크리스푸스가 콘술이 되었다. 이는 당시 리키니우스 1세와 콘스탄티누스 1세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악화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리키니우스 2세는 321년 3월 1일 카이사르 임명 5주년을 기념하는 ‘퀸쿠에날리아(quinquennalia)’를 성대하게 치렀다. 이 행사에는 ‘뮌헨 보물(Munich Treasure)’이라고 불리는, 리키니우스 1세의 은제 흉상과 리키니우스 2세를 위한 대형 은제 그릇들이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이 그릇들에는 두 황제의 초상화가 새겨져 있었고, 리키니우스 2세의 5주년을 기념하며 앞으로의 10년 통치를 기원하는 문구가 담겨 있었다. 비록 그는 어린 나이였지만, 그의 존재 자체가 아버지 리키니우스 1세의 정통성과 권력을 상징하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그는 324년까지 카이사르의 지위를 유지했다.
4. 권력 투쟁의 희생양 : 지위 박탈과 몰락
324년은 리키니우스 2세에게 결정적인 비극을 가져온 해였다. 그의 아버지 리키니우스 1세는 콘스탄티누스 1세와의 최종 패권 대결에서 연이어 참패했다. 헬레스폰트 해전(Battle of the Hellespont)과 크리소폴리스 전투(Battle of Chrysopolis, 324년 9월 18일)에서 리키니우스 1세의 군대는 완벽하게 붕괴되었다. 결국 리키니우스 1세는 니코메디아(Nicomedia)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항복했다. 어머니 플라비아 율리아 콘스탄티아의 간곡한 탄원으로 리키니우스 1세는 처음에는 목숨을 건져 테살로니키(Thessalonica)로 은퇴했다.
하지만 아버지 리키니우스 1세의 패배와 항복 직후, 리키니우스 2세는 즉시 ‘카이사르’의 칭호를 박탈당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자신의 오랜 숙적 리키니우스 1세에 대한 자비를 후회한 듯했다. 결국 리키니우스 1세는 325년 봄, “다시 전쟁을 계획한다”는 명분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5. 삼촌에 의한 비극적인 최후와 기억의 말살
리키니우스 2세는 아버지 리키니우스 1세보다 1년 더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의 운명 역시 비극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326년에 자신의 삼촌인 콘스탄티누스 1세의 명령으로 처형당했다. 처형 장소는 폴라(Pola,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풀라)였다. 당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자신의 장남 크리스푸스(Crispus)까지 처형하는 등 황실 내부의 피의 숙청을 단행하고 있었다. 리키니우스 2세의 죽음 또한 이러한 콘스탄티누스의 의심과 권력 강화를 위한 숙청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리키니우스 2세는 그의 아버지 리키니우스 1세와 마찬가지로 ‘기억 말살형(damnatio memoriae)’을 당했다. 이는 로마 시대에 반역자나 정적의 존재 자체를 역사에서 지우는 형벌이었다. 그의 이름은 모든 공식 기록과 비문에서 지워졌다. 그는 죽음 이후에도 역사 속에서 지워지려는 시도 속에 놓였던 비극적인 인물이다.
6. 역사에 남긴 의미 : 권력의 희생양
리키니우스 2세는 로마 제국 후기, 사두정치 체제의 붕괴와 콘스탄티누스 1세의 단일 통치 체제 확립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전환기에 존재했던 수많은 인물 중 하나다. 그의 짧고 비극적인 생애는 황제들 간의 권력 다툼이 얼마나 잔혹하게 전개되었는지, 그리고 아무리 어린 나이라 할지라도 정치적 숙청의 대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권력을 휘두른 통치자라기보다는, 부모의 권력 관계와 삼촌의 권력 강화 과정에서 희생된 ‘피해자’의 전형이다. 그의 죽음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제국 전체의 유일한 패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자신의 아들들로 이루어진 ‘콘스탄티누스 왕조(Constantinian dynasty)’를 확고히 세우는 데 있어 마지막 방해물 제거와 같았다. 리키니우스 2세의 이야기는 로마 제정 말기 권력의 무대에서 이름만 올린 채 사라져 간 인물들의 비극적인 그림자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기록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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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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