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7일 일요일

레오 6세(Leo VI, AD.866~912) : 동로마 제국 제90대 황제(AD.886~912)

레오 6(Leo VI, AD.866~912) : 동로마 제국 제90대 황제(AD.886~912)

 
  • 레오 6(Leo VI) : Leo the Wise
  • [Greek : Λέων Σοφός / romanized: Léōn ho Sophós]
  • 출생 : 866919
  • 사망 : 912511
  • 부친 : 바실리우스 1(Basil I, officially), 미카엘 3(Michael III, reputed)
  • 모친 : 에우도키아 인게리나(Eudokia Ingerina)
  • 배우자 : Theophano Martinakia, Zoe Zaoutzaina, Eudokia Baïana, Zoe Karbonopsina
  • 자녀 :
    Theophano : Eudokia
    Zoe Zaoutzaina : Anna of Constantinople
    Eudokia : Basil
    Zoe Karbonopsina : Anna, Constantine VII
  • 재위 : 886829~ 912511
  • 대관식 : 87016
  • 공동황제 :
    바실리우스 1(Basil I) : 870~886
    콘스탄니누스(Constantine) : 870~879
    알렉산데르(Alexander) : 879~912
    콘스탄티누스 7(Constantine VII) : 908~912
 
그리스도의 존전에 경의를 표하는 레오 6세를 묘사한 아야 소피아의 모자이크
그리스도의 존전에 경의를 표하는 레오 6세를 묘사한 아야 소피아의 모자이크
 

1. 현자 레오 6세 황제 : 지혜와 격동의 비잔틴 통치자

 
레오 6(Leo VI, 866919912511)886년부터 912년까지 비잔틴 제국을 통치한 황제이다. ‘현자(Λέων Σοφός, Léōn ho Sophós)’라는 별칭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학식이 풍부했던 인물로, 선황 바실리우스 1(Basil I) 시대에 시작된 학문과 문화의 르네상스를 계속 이어갔다. 그러나 그의 치세는 발칸반도에서 불가리아에 대항하고 시칠리아와 에게해에서 아랍에 맞서 여러 차례 군사적 패배를 겪었던 격동의 시기이기도 했다. 또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로마 집정관(Roman consul) 직위와 같은 고대 로마 제도의 공식적인 소멸이 목격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마케도니아 왕조(Macedonian dynasty)의 두 번째 황제였지만,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다.
 

2. 출생의 미스터리와 비운의 어린 시절

 
레오 6세는 866919일에 황후 에우도키아 인게리나(Eudokia Ingerina)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친부는 미하일 3(Michael III, 840867)로 알려져 있거나, 공식적인 아버지인 바실리우스 1(Basil I, 811886)의 아들로 여겨졌다. 에우도키아는 미하일 3세의 정부이면서 동시에 바실리우스 1세의 아내였기 때문이다. 미하일 3세가 867년에 바실리우스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레오 6세는 공식적으로 바실리우스 1세의 아들로 인정되었다.
 
바실리우스 1세는 레오를 870년에 공동 황제로 임명했고, 879년에는 그의 이복형 콘스탄티노스(Constantine, 생몰년 미상)가 사망하면서 레오 6세는 단독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레오와 바실리우스의 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다. 에우도키아의 사망 이후, 레오가 자신의 정식 부인인 테오파노(Theophano Martinakia)에게 불만을 품고 조에 자우차이나(Zoe Zaoutzaina)라는 정부를 두면서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바실리우스는 조에를 보잘것없는 관료와 결혼시켰으며, 나중에는 레오가 자신을 암살하려 모의했다는 혐의를 받고 눈이 멀 뻔하기도 했다. 886829, 바실리우스는 사냥 사고로 사망했는데, 죽기 직전 레오가 암살 시도에 연루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3. 황제로서의 통치 : 문화와 종교

 
레오 6세는 바실리우스 1세의 뒤를 이어 886829일부터 단독 황제로 즉위했다. 그의 별칭인 현자처럼, 그는 지식과 학문을 장려하며 비잔틴 문화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학문적 성과가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레오 6세는 예언가이자 마법사로 여겨지기도 했는데, ‘현자 레오의 예언서(Oracles of Leo the Wise)’라는 예언 시와 짧은 점술 텍스트 모음집이 그의 이름으로 전해지며 세상의 미래를 예언하는 것으로 믿어지기도 했다.
 
또한, 레오 6세는 890년에 성 라자로(St. Lazarus)의 유물을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는 데 공을 세웠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라자로 토요일(Lazarus Saturday)’에 그의 이름으로 된 여러 찬송가(stichera)가 불리며, ‘십자가 현양 대축일(Exaltation of the Cross)’에도 그가 작곡한 찬송가가 불린다. 이러한 활동들은 그가 종교적으로도 깊이 관여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통치는 또한 고대 로마의 제도가 점차 사라지는 과정을 목격한 시기였다. 특히 로마 집정관 직위는 그의 치세 마지막 해에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4. 복잡한 가족 관계와 후계자 문제

 
레오 6세는 황위 계승을 위해 네 번이나 결혼해야 하는 복잡한 가족사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비잔틴 교회는 세 번째 결혼까지는 어느 정도 용인했으나, 네 번째 결혼은 허용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레오 6세는 아들을 얻기 위해 이 원칙을 어겨야 했고, 이는 그와 교회 사이에 큰 갈등을 초래했다.
 
  • 첫 번째 부인 : 테오파노 마르티나키아(Theophano Martinakia) 바실리우스 1세의 강요로 882년에 결혼했지만, 레오 6세는 그녀를 탐탁지 않아 했다. 테오파노는 독실한 신앙심으로 성녀로 추앙받기도 했다. 둘 사이에는 딸 에우도키아(Eudokia)가 있었으나 892년에 사망했다. 테오파노는 897년에 사망했다.
  • 두 번째 부인 : 조에 자우차이나(Zoe Zaoutzaina) 레오의 오랜 정부이자 바실리우스 1세가 불쾌해했던 인물이다. 테오파노가 사망한 후 레오 6세는 조에와 결혼했고, 딸 안나(Anna)를 낳았다. 안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이 맹인왕(Louis the Blind)과 약혼하고 결혼했다. 조에는 899년에 사망했다.
  • 세 번째 부인 : 에우도키아 바이아나(Eudokia Baïana) 조에가 사망한 후 900년에 결혼했지만, 에우도키아는 아들 바실(Basil)을 낳고 몇 일 만에 사망했다. 바실 역시 태어난 지 며칠 만에 요람에서 사망하면서, 레오 6세는 합법적인 남성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 놓였다.
  • 네 번째 부인 : 조에 카르보놉시나(Zoe Karbonopsina) 레오 6세는 에우도키아 바이아나가 죽은 후 황위 계승에 대한 압박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조에 카르보놉시나라는 정부를 두어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바로 훗날의 콘스탄티노스 7(Constantine VII, 905959)였다. 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906년에 조에와 네 번째 결혼을 강행하여 콘스탄티노스 7세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로 인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니콜라스 미스티코스(Nicholas Mystikos)와 갈등을 겪었으나, 결국 니콜라스가 해임되고 새 총대주교가 레오의 네 번째 결혼을 승인하게 된다. 조에와의 사이에서는 콘스탄티노스 7세 외에 딸 안나(Anna)도 있었다.
 
이러한 네 번의 결혼과 그로 인한 교회와의 갈등은 레오 6세 치세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며, 황위 계승이라는 정치적 목적이 종교적 관습을 압도했던 비잔틴 황제의 권력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5. 현자의 유산과 역사적 평가

 
레오 6세는 912511일 사망하고 그의 동생 알렉산드로스(Alexander)가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그의 통치는 학문과 지혜를 사랑했던 황제의 개인적인 성향과 제국이 직면한 현실적인 도전이 교차했던 시기로 평가된다. 그는 비록 발칸반도와 동부 지중해에서 군사적 후퇴를 겪었지만, 내부적으로는 학문적 르네상스를 지속하고 법률 제정(바실리카 법전의 완성을 지시했다)을 통해 제국의 행정 체계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네 번의 결혼을 통해 후계자를 얻으려는 그의 노력은 당시 사회와 교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으나, 이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연속성을 확보하고 장기적인 안정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결국 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 7세는 비잔틴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황제 중 한 명이 되어 제국의 문화적 황금기를 이끌게 된다. ‘현자라는 별칭에 걸맞게 레오 6세는 지식과 법, 종교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제국을 이끌었던 다면적인 통치자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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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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