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Alexander, AD.870~913) : 동로마 제국 제91대 황제(AD.912~913)
- 알렉산드로스(Alexander)
- [Greek : Άλέξανδρος / romanized : Aléxandros]
- 출생 : 870년 11월 23일
- 사망 : 913년 6월 6일
- 부친 : 바실리우스 1세(Basil I)
- 모친 : 에우도키아 인게리나(Eudokia Ingerina)
- 재위 : 912년 5월 11일 ~ 913년 6월 6일
- 대관식 : 897년 9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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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에 있는 알렉산드로스 황제의 모자이크. 그는 로로스를 입고 오른손에 아카키아를 들고 있다. |
1. 알렉산드로스 황제 : 짧지만 격동적이었던 비잔틴의 그림자 통치자
알렉산드로스(Alexander, 870년 11월 23일 – 913년 6월 6일)는 비잔틴 제국을 912년부터 913년까지 단 1년여 동안 통치했던 황제였다. 그는 마케도니아 왕조(Macedonian dynasty)의 세 번째 황제로, 비록 재위 기간은 짧았지만, 형 레오 6세(Leo VI the Wise)의 통치 이후 혼란스러운 시기에 제국을 이끌며 상당한 변화와 외교적 긴장을 야기했던 인물로 기록된다. 비잔틴 역사에서 그의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인데, 사료들은 그를 나태하고 방탕하며 술에 취해있고 악의적인 인물로 묘사한다.
2. 황실의 탄생과 공동 황제로서의 삶
알렉산드로스는 870년 11월 23일에 황제 바실리우스 1세(Basil I)와 황후 에우도키아 인게리나(Eudokia Ingerina)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궁정에서 태어났음을 의미하는 ‘포르피로게네토스(born in the purple)’의 자격을 지녔다. 그의 형 레오 6세의 경우 친부 논란이 있었던 것과 달리, 알렉산드로스는 미하일 3세(Michael III)가 사망한 지 몇 년 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친부 논란에서는 자유로웠다.
어린 시절인 879년 초, 아버지 바실리우스 1세에 의해 공동 황제(co-emperor)로 책봉되었다. 이는 바실리우스의 또 다른 아들이자 알렉산드로스의 이복형인 콘스탄티노스(Constantine)가 사망한 직후 이루어진 조치였다. 이로써 알렉산드로스는 공식적으로 황위 계승 라인에 합류하여, 약 33년 동안 공동 황제의 지위를 유지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실질적인 권력보다는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했지만, 제국의 정치 구조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3. 단독 황제 즉위와 전횡
912년 5월 11일, 그의 형 레오 6세가 사망하자 알렉산드로스는 비로소 단독 황제로서의 권한을 행사하게 된다. 그는 레오의 어린 아들이자 공식적인 공동 황제였던 콘스탄티노스 7세(Constantine VII, 905–959)를 제쳐두고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그는 동전에 자신을 ‘아우토크라토르(autocrator, αὐτοκράτωρ πιστὸς εὑσεβὴς βασιλεὺς)’라고 새긴 최초의 비잔틴 황제였다. 이는 그가 33년간의 공동 황제 생활을 마치고 완전한 권력을 잡았음을 선언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황제가 된 알렉산드로스는 곧바로 이전 황제의 정책과 인사들을 대거 숙청하기 시작했다. 그는 레오 6세의 조언자들과 임명된 관리들 대부분을 해임했다. 여기에는 해군 제독 히메리오스(Himerios), 총대주교 에우티미오스(Euthymios) 등이 포함되었다. 특히 콘스탄티노스 7세의 어머니이자 황후였던 조에 카르보놉시나(Zoe Karbonopsina)를 수녀원에 유폐시키는 과감한 조치를 취했다. 대신, 그는 레오의 네 번째 결혼에 반대하여 해임되었던 니콜라스 미스티코스(Nicholas Mystikos)를 총대주교직에 복권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그가 전임 황제의 흔적을 지우고 자신만의 통치 방식을 확립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4. 외교적 위기와 전쟁의 시작
알렉산드로스의 재위 기간은 짧았지만, 그는 중요한 외교적 판단을 내렸고 이는 제국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 아바스 칼리프국과의 대치 : 동방에서는 아바스 칼리프국의 알-무크타디르(Al-Muqtadir)의 군사적 압력에 직면했다. 이슬람 세력은 비잔틴 제국의 동부 국경을 끊임없이 위협했으며,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의 침공에 대응해야 했다.
- 불가리아와의 전쟁 도발 : 가장 심각한 외교적 실책은 불가리아의 시메온 1세(Simeon I of Bulgaria)와의 관계에서 발생했다. 비잔틴 제국은 전통적으로 새로운 황제가 즉위할 때마다 불가리아에 공물을 보내 평화를 유지하는 관례가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이 전통적인 공물 지급을 거부했고, 이는 곧바로 불가리아와의 전쟁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 전쟁은 알렉산드로스 사망 이후에도 장기간 이어지며 제국에 막대한 군사적, 재정적 부담을 안겼다. 그가 불가리아 사절들을 물리치는 모습은 비잔틴의 자존심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나, 동시에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외교적 오만함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5. 통치 방식과 인물 평가
알렉산드로스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그는 국가 운영에 대한 열정이나 능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고 비판받는다. 실제로 그를 묘사하는 사료들은 일관적으로 그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내놓고 있다. 이들 사료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는 나태하고(lazy), 음탕했으며(lecherous), 항상 술에 취해 있었고(drunk), 악의적인(malignant)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는 그가 책임감 없는 통치자였다는 인상을 준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가 이교도적인 행위, 즉 우상 숭배를 했다는 비난이다. 콘스탄티노플 히포드롬(Hippodrome)에 있는 황금 멧돼지상에 이교도적 제사를 지내고, 자신의 발기 부전(impotence)을 치료하기 위해 멧돼지상에 새로운 이빨과 생식기를 달아주었다는 구체적인 혐의까지 제기되었다. 이러한 묘사들은 그의 황제로서의 정통성과 도덕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었다. 비잔틴 역사에서 황제의 사적인 행태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비판받는 경우는 드물었다.
또한, 알렉산드로스가 조카인 콘스탄티노스 7세의 황위 계승을 막기 위해 그를 거세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소문도 전해진다. 비록 이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이러한 소문 자체만으로도 알렉산드로스가 얼마나 잔인하고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로 여겨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는 그가 미래 세대의 황제에게까지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증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6. 갑작스러운 죽음과 유산
알렉산드로스는 913년 6월 6일에 4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과도한 식사와 음주로 인한 위장병(stomach disease)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는 그를 나태하고 방탕한 인물로 묘사하는 사료의 내용과 일관된 부분이다.
그의 짧고 논란 많았던 재위 기간은 비잔틴 제국에 여러 가지 부정적인 유산을 남겼다. 첫째, 그는 어린 콘스탄티노스 7세에게 총대주교 니콜라스 미스티코스를 중심으로 한 적대적인 섭정 체제를 남겼다. 이는 어린 황제의 권력 기반을 약화시키고 향후 궁정 내 불안정을 야기할 소지가 있었다. 둘째, 그의 불가리아에 대한 외교적 오판은 비잔틴-불가리아 전쟁(Byzantine–Bulgarian war of 913–927)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 전쟁은 비잔틴 제국의 국력을 소모시키고 불안정을 심화시키는 장기적인 갈등으로 이어졌다.
결론적으로,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선임 황제들과 비교했을 때 두드러진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오히려 개인적인 문제와 외교적 실책으로 비난받는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의 삶은 황제의 자리가 개인의 방탕함으로 인해 얼마나 위협받을 수 있는지, 그리고 지도자의 부적절한 판단이 국가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비록 그의 재위 기간은 짧았지만, 그는 비잔틴 제국의 중요한 전환기에 혼란과 위기를 더했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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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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