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4세(Leo IV, AD.750~780) : 동로마 제국 제79대 황제(AD.775~780)
- Leo IV the Khazar [Greek : Λέων ὁ Χάζαρος / romanized : Léōn ho Khazaros]
- 출생 : 750년 1월 25일
- 사망 : 780년 9월 8일
- 부친 : Constantine V
- 모친 : Tzitzak
- 배우자 : Irene
- 자녀 : Constantine VI
- 재위 : 775년 9월 14일 ~ 780년 9월 8일
- 대관식(공동황제) : 751년 6월 6일
성상 파괴 시대의 과도기 군주 : 동로마 레오 4세 황제의 짧은 치세 (775-780)
8세기 후반의 동로마 제국은 성상 숭배를 둘러싼 격렬한 종교적 논쟁과 끊임없는 외부 위협 속에서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강력한 성상 파괴 황제 콘스탄티누스 5세(Constantine V, 718–775)의 치세가 끝나고, 그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오른 인물이 바로 레오 4세(Leo IV, 750–780)이다. ‘카자르인(the Khazar)’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 그는 불과 5년간(775–780) 동로마 제국을 통치했지만, 강경했던 부친의 정책을 계승하면서도 유화적인 면모를 보여주었고, 그의 이른 죽음은 이후 제국을 또 다른 격동의 시대로 이끌었다. 그의 치세는 동로마 제국사에서 중요한 과도기이자, 성상 파괴 시대의 마지막을 예고하는 시기로 기록된다.
1. 출생과 즉위 : 카자르인의 후손, 황제에 오르다
레오 4세는 서기 750년 1월 25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사우리아 왕조(Isaurian dynasty)의 강력한 성상 파괴 황제 콘스탄티누스 5세였고, 어머니는 콘스탄티누스 5세의 첫 번째 황후 치착(Tzitzak)이었다. 치착은 카자르족(Khazar) 출신이었으며,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이레네(Eirene)’라는 기독교식 이름을 받았다. 레오 4세가 ‘카자르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도 바로 그의 어머니의 민족적 배경 때문이었다.
레오 4세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751년에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5세에 의해 공동 황제(co-emperor)로 책봉되었다. 이는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5세가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미리 정하여 제위 승계의 안정성을 확보하려 했던 의도였다. 그는 769년에 아테네 출신의 이레네(Irene of Athens)와 결혼했다. 이듬해 770년에는 외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Constantine VI, 771–797)를 얻었다.
775년 9월 14일,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5세가 불가리아 제국과의 전쟁 원정 중 사망하자, 레오 4세는 동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는 이미 아버지의 치세 동안 공동 황제로서 제국의 주요 행정과 군사에 참여하며 통치자로서의 경험을 쌓았을 것이다.
2. 내치와 권력 안정화 : 혼란 속의 균형
레오 4세는 황위에 오른 후,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제국의 안정을 꾀하기 위한 정책들을 펼쳤다.
- 재정 확보와 내부 통제 : 그는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5세가 추진했던 재정 및 인구 재분배 정책을 이어갔다. 특히 아랍 국경의 도시들(게르마니케이아, 멜리테네, 테오도시우폴리스)에서 포로들을 제국 내부의 트라키아(Thrace) 지역으로 재정착시켜 새로운 군사 주둔지(castra)를 건설하는 데 활용했다. 이는 국경 지역의 인구 재배치와 더불어 군사력 강화를 위한 정책이었다.
- 성상 숭배 정책 : 레오 4세는 기본적으로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5세의 성상 파괴 정책을 계승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처럼 극단적인 강경책을 고수하지는 않았다. 즉위 초에는 일부 성상 숭배자들을 박해했으나, 이후 점차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며 성상 숭배를 지지하는 일부 관리들을 등용하기도 했다. 이는 제국 내의 깊은 종교적 갈등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지만, 잠시 동안의 완화를 가져왔다.
- 제위 계승과 반란 진압 : 레오 4세에게는 이복동생인 니케포루스(Nikephoros)와 크리스토퍼(Christopher) 두 명이 있었고, 이들은 황위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었다. 776년, 이들은 레오 4세에 대한 반란을 모의했다. 그러나 레오 4세는 자신의 어린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를 카이사르로 승격시키며 자신의 후계자로 공식 지명하고, 동시에 이복동생들의 반란을 진압했다. 주목할 점은 그가 반란을 주도한 이복동생들을 처형하지 않고 사면했다는 것이다. 대중은 이들의 처형을 원했지만, 레오 4세는 대신 다른 공모자들을 케르손(Cherson)으로 유배 보내며 유화적인 처분을 내렸다. 이는 그의 관대함과 더불어 황위 계승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 조치였다.
3. 군사적 활동과 외교 : 짧지만 효과적인 리더십
레오 4세의 치세는 짧았지만, 그는 군사적 성공과 능숙한 외교술을 통해 제국의 안정에 기여했다.
- 아바스 칼리파국과의 전쟁 : 레오 4세는 778년에 아바스 칼리파국(Abbasid Caliphate)의 시리아(Syria) 지역을 침략하여 게르마니케이아(Germanikeia) 외곽에서 아바스 군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는 동방 국경에서의 로마 제국의 위상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 불가리아와의 관계 : 776년부터 777년 사이에 불가리아의 칸 텔레리그(Telerig)는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피신했다. 레오 4세는 텔레리그를 기독교 세례를 받게 하고, 자신의 황후 이레네의 친척과 결혼시키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5세의 성공적인 불가리아 원정으로 다져진 평화를 지속하려는 외교적 노력이었다. 불가리아의 잠재적 위협을 외교적으로 관리하여 제국의 북부 국경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4. 건강 문제와 비극적인 종말 : 이른 죽음과 이레네의 등장
레오 4세는 황위에 오를 무렵부터 결핵(tuberculosis)을 앓고 있었으며, 결국 780년 9월 8일, 3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로마 제국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레오 4세의 사망 당시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는 불과 9살의 어린아이였다. 따라서 황위는 콘스탄티누스 6세에게 계승되었고, 그의 어머니이자 레오 4세의 황후였던 이레네(Irene of Athens, 752–803)가 섭정으로서 제국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레네는 성상 숭배자였으며, 그녀의 섭정 통치는 성상 파괴 시대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서막이었다.
5. 레오 4세의 유산과 역사적 평가
레오 4세의 치세는 비록 짧았지만, 로마 제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 과도기적 황제 : 그는 성상 파괴 정책을 이어갔지만 아버지와 달리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며 종교적 갈등을 잠시 완화시켰다. 그의 죽음은 성상 파괴 시대가 끝나고 성상 숭배를 지지하는 세력이 다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 내부 안정 유지 : 강력한 아버지의 통치 이후 복잡했던 제위 승계 문제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관리하고, 내부 반란을 유화적으로 진압하며 제국의 안정을 유지했다.
- 군사적 성공과 외교적 관리 : 아바스 칼리파국에 대한 군사적 승리와 불가리아와의 안정적인 외교는 제국의 국경을 유지하고 위상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 이레네 시대의 서막 : 그의 이른 죽음은 야심 찬 황후 이레네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레네는 훗날 로마 역사상 전례 없는 여성 단독 황제로 등극하며 제국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레오 4세는 로마 제국의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선대와 후대를 잇는 중요한 과도기적 황제였다. 그의 통치는 비록 짧았지만, 혼란의 시대에 제국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이끌었던 현명한 군주로 평가된다.
=-=-=-=-=-=-=-=-=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