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누스 6세(Constantine VI, AD.771–797) : 동로마 제국 제80대 황제(AD.780~797)
- Constantine VI [Greek : Κωνσταντῖνος / romanized : Kōnstantīnos] the Blind
- 출생 : 771년 1월 14일
- 사망 : 805년 이전
- 부친 : 레오 4세(Leo IV)
- 모친 : 이레네(Irene of Athens)
- 배우자 : 마리나(Maria of Amnia), 테오도테(Theodote)
- 자녀 :
- 마리나 : Euphrosyne(황제 Michael II와 결혼), Irene(수녀가 됨)
- 테오도테 : Leo, unnamed son
- 재위 : 780년 9월 8일 ~ 797년 8월 19일
- 대관식(공동황제) : 776년 4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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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6세(Constantine VI, AD.771–797) : 동로마 제국 제80대 황제(AD.780~797) |
모후의 그늘에 가려진 비극 : 동로마 콘스탄티누스 6세 (780-797)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 동로마 제국은 성상 숭배를 둘러싼 종교적 갈등과 불안정한 황위 계승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 강력한 성상 파괴 정책을 추진했던 레오 3세(Leo III the Isaurian, 685경–741)와 콘스탄티누스 5세(Constantine V, 718–775)의 치세 이후, 황위에 오른 인물은 바로 콘스탄티누스 6세(Constantine VI, 771–797)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 황제에 즉위했으나, 사실상 그의 어머니이자 강력한 섭정인 이레네(Irene, 752–803) 황후의 그늘에 가려진 비운의 황제였다. 그의 짧고 파란만장한 치세는 로마 제국 황실의 권력 다툼이 얼마나 잔혹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1. 어린 황자의 탄생과 모후 이레네의 섭정 (771-790)
콘스탄티누스 6세는 서기 771년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le)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레오 3세의 아들이자 이사우리아 왕조(Isaurian dynasty)의 4대 황제인 레오 4세(Leo IV the Khazar, 750–780)였고, 어머니는 아테네 출신의 이레네 황후였다. 그는 태어난 지 1년 만인 772년에 공동 황제(co-emperor)로 책봉되어 일찍이 제위 계승 서열 1위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780년 9월 8일, 아버지 레오 4세가 3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자, 불과 9살의 콘스탄티누스 6세는 동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 자리에 올랐다. 어린 황제는 국정을 직접 운영할 수 없었기에, 그의 어머니 이레네가 강력한 섭정(regent)으로서 제국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레네는 성상 숭배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성상 숭배자(iconophile)’였고, 레오 4세의 유화적 성상 파괴 정책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녀는 성상 파괴자들을 요직에서 배제하고, 성상 숭배를 지지하는 인물들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이레네의 섭정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787년에 니케아(Nicaea)에서 개최된 ‘제2차 니케아 공의회(Second Council of Nicaea)’였다. 이 공의회는 성상 숭배를 다시 공식적으로 허용하고 성상 파괴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로써 약 60년간 제국을 뒤흔들었던 성상 파괴 논쟁은 이레네의 노력으로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레네는 점차 성장하는 아들에게 권력을 이양하려 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 6세가 16세가 되던 787년, 그는 이미 성인으로 간주되었으나 이레네는 여전히 실권을 쥐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황제와 섭정 사이의 불화를 초래했다.
2. 친정(親政)의 꿈과 황제 즉위 (790)
콘스탄티누스 6세는 점차 어머니의 강력한 통치에서 벗어나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790년, 그는 어머니 이레네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단독으로 제국을 통치하려 했다. 그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장교들과 함께 어머니를 축출하려 했지만, 이레네가 미리 눈치채고 이를 저지하려 했다. 이레네는 병사들에게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강요했지만, 병사들은 거부하며 콘스탄티누스 6세의 편에 섰다. 특히 아르메니아콘 테마(Armeniac Theme)의 병사들이 콘스탄티누스 6세를 지지하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790년 10월, 콘스탄티누스 6세는 어머니 이레네를 폐위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엘레프테리우스 궁전(Eleutherius Palace)에 유폐했으며, 어머니의 충실한 환관 스타우라키오스(Staurakios)를 포함한 측근들을 제거했다. 이로써 콘스탄티누스 6세는 명실상부한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는 이제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통치 역량을 보여줄 기회를 얻은 것이다.
3. 황제의 실책과 인기 상실 (790-797)
콘스탄티누스 6세는 황권을 잡은 초기에 다소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1) 모후 이레네의 복귀 : 황위에 오른 콘스탄티누스 6세는 정치적 불안정을 우려해 이레네를 다시 궁전으로 불러들이고 그녀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이는 관용적인 조치로 보일 수 있었지만, 결국 이레네가 다시 권력을 잡는 계기를 마련하고 말았다. 이레네는 이 시점부터 아들을 제거하고 자신이 단독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키웠을 것이다.
2) 결혼 문제와 ‘간음 논쟁(Moechian controversy)’ : 콘스탄티누스 6세의 가장 큰 실책 중 하나는 그의 결혼 문제였다. 그는 어머니 이레네의 강요로 메리트론(Merritron)의 마리아(Maria of Amnia)와 결혼했지만,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황제는 마리아와 이혼하고 자신의 정부였던 테오도테(Theodote)와 결혼하려 했다. 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리아와 강제로 이혼한 후 테오도테와 결혼식을 올렸고, 이는 ‘간음 논쟁(Moechian controversy)’이라 불리는 큰 스캔들을 일으켰다. 총대주교 타라시우스(Tarasius)는 이러한 결혼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압력에 굴복했으며, 이에 반대한 많은 성직자들은 추방당하거나 투옥되었다. 이 사건은 콘스탄티누스 6세의 평판을 크게 실추시켰고, 교회와 대중으로부터 그의 지지를 잃게 만들었다.
3) 군사적 실패 : 콘스탄티누스 6세는 자신의 군사적 역량을 입증하려 했다. 그는 동방의 숙적 아랍군과 산발적인 전투를 벌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또한 792년에는 불가르족(Bulgars)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감행했지만, 마르첼라이 전투(Battle of Marcellae)에서 불가르족에게 참패를 당했다. 이 패배는 황제의 군사적 무능함을 드러내며 그의 권위를 더욱 떨어뜨렸다.
4) 통치자의 불안정성 : 권력을 확고히 다지지 못한 콘스탄티누스 6세는 점차 편집증적이고 잔혹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다시 궁으로 들였던 병사들에게 보복하고, 과거 자신을 지지했던 아르메니아콘 테마의 장군 알렉시오스 모젤(Alexios Mosele)의 눈을 뽑아 유배 보냈으며, 일부 반역자들을 잔인하게 처형하는 등 폭압적인 통치를 이어갔다. 이러한 행동들은 그의 리더십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다.
4. 모후 이레네의 복수와 황제의 비극적 몰락 (797)
콘스탄티누스 6세의 실책과 인기 상실은 모후 이레네에게 다시 권력을 되찾을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레네는 그의 실책을 이용해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규합했고, 황제 콘스탄티누스 6세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 음모에는 황후 이레네의 충성스러운 환관들과 유력 귀족들이 동참했다.
결국 797년 8월, 음모는 실행에 옮겨졌다. 콘스탄티누스 6세는 어머니 이레네의 지시에 따라 반란군에게 붙잡혔다. 797년 8월 19일, 그는 어머니의 명령에 따라 황궁의 ‘자줏빛 방(Porphyra)’에서 자신의 눈이 뽑히는 ‘실명형(blinding)’을 당했다. 자줏빛 방은 전통적으로 로마 황제들이 태어나는 신성한 장소였다는 점에서, 이레네의 행동은 단순한 복수를 넘어 황제로서의 콘스탄티누스 6세의 모든 존재와 정통성을 지워버리겠다는 잔혹한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6세는 이 실명형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의 죽음과 함께 로마 제국 이사우리아 왕조의 남성 계보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이레네는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를 실명시킨 후 스스로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로써 그녀는 로마 제국 역사상 전례 없는, 남성 황제 없이 통치한 최초의 황제가 된다.
5. 콘스탄티누스 6세의 유산과 역사적 평가
콘스탄티누스 6세의 짧고 비극적인 치세는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어두운 권력 투쟁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 모후의 희생양 : 그는 황제로서의 역량을 온전히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어머니의 권력욕과 자신의 실책 사이에서 고뇌하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삶은 권력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진 혈육 간의 비극적인 배신을 상징한다.
- 불안정한 황제권 : 그의 치세는 ‘20년 무정부 시대’ 이후 이사우리아 왕조가 나름의 안정을 찾아가던 시기였지만, 그의 몰락은 여전히 황제권이 외부의 위협뿐 아니라 내부의 권력 다툼에도 취약했음을 보여준다.
- 성상 숭배 논쟁의 종결 : 콘스탄티누스 6세의 실명과 이레네의 황제 즉위는 성상 숭배를 지지하는 세력이 황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성상 파괴 논쟁은 한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된다.
- 새로운 시대의 서막 : 그의 죽음은 로마 제국의 황위가 이사우리아 왕조의 남성 후계자가 아닌, 여성에 의해 계승되는 전례를 만들었다. 이는 동로마 제국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다.
콘스탄티누스 6세는 로마 제국의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희생된 비운의 황제로 기억될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로마 역사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 암투와 인간 본성의 복합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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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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