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타바스도스(Artabasdos, AD.?~743) : 동로마 제국 제78대 황제(AD.741~743)
- Artabasdos or Artavasdos
- [Greek : Ἀρταύασδος or Ἀρτάβασδος]
- [Armenian : Արտավազդ, Artavazd, Ardavazt, Latinized as Artabasdus]
- 출생 : 미상
- 사망 : 743년
- 배우자 : Anna
- 자녀 : Nikephoros, Niketas
- 재위 : 741년 6월 ~ 743년 11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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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타바스도스(Artabasdos, AD.?~743) : 동로마 제국 제78대 황제(AD.741~743) |
8세기 로마의 짧은 역모 : 동로마 아르타바스도스 황제의 비극적 일대기 (741-743)
8세기 중반의 동로마 제국은 성상 숭배를 둘러싼 종교적 논쟁이 한창이었다. 레오 3세(Leo III the Isaurian, 685경–741) 황제가 시작한 성상 파괴 정책은 제국 사회를 양분하는 심각한 갈등의 불씨가 되었고,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Constantine V, 718–775)의 치세에서도 이어졌다. 이러한 혼란의 시기에, 한때 황제의 사위이자 충신으로 제국의 요직을 지냈던 인물이 황위에 대한 야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짧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데, 그가 바로 아르타바스도스(Artabasdos, 사망 743)이다. 그는 불과 2년 남짓한 기간 동안(741년 6월 – 743년 11월 2일) 황제의 자리에 머물며, 로마 제국 황위 다툼의 잔혹성과 8세기 제국의 불안정한 정치적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1. 군인 아르타바스도스의 부상 : 황실과의 인연
아르타바스도스는 정확한 출생 연도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아르메니아(Armenian) 혈통을 지닌 장군이었다. 그의 이름 ‘아르타바스도스’는 아르메니아어 ‘아르타바즈드(Artavazd)’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8세기 초, 로마 제국은 혼란스러운 ‘20년 무정부 시대(Twenty Years' Anarchy)’를 겪었고, 유능한 군사 인물들이 제국의 권력 구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였다. 아르타바스도스도 이러한 배경 속에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자신의 경력을 쌓아나갔다.
서기 713년경, 그는 당시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아나스타시우스 2세(Anastasius II, 713–715)에 의해 ‘아르메니아콘 테마(Armeniac Theme)’의 총독(stratēgos)으로 임명되었다 . 아르메니아콘 테마는 로마 제국의 중요한 군사 행정 구역으로, 이사우리아 테마와 함께 제국의 동부 국경 방어를 책임지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아르타바스도스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꾼 사건은 서방의 아나톨리콘 테마(Anatolic Theme) 총독이었던 레오(Leo)와의 동맹이었다. 레오와 아르타바스도스는 당시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3세(Theodosius III, 715–717)를 타도하고 권력을 잡기 위해 힘을 합쳤다. 이 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아르타바스도스는 레오의 딸 안나(Anna)와 약혼하게 된다.
717년 3월, 레오는 테오도시우스 3세를 몰아내고 동로마 제국의 새로운 황제 레오 3세로 등극했다. 황제가 된 레오 3세는 자신의 충성스러운 동맹이자 사위인 아르타바스도스에게 ‘쿠로팔라테스(kouropalates)’, 즉 황궁 총괄이라는 명예로운 고위 관직을 수여했다. 동시에 아르타바스도스는 제국의 또 다른 중요한 군사 구역인 ‘옵시키온 테마(Opsikion Theme)’의 코메스(komēs)이자 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아르타바스도스는 황제의 가장 가까운 친인척이자 제국의 주요 군사 지휘관으로서 막강한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2. 제위 찬탈 : 콘스탄티누스 5세에 대한 반란 (741)
레오 3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가 741년 황위에 올랐을 때, 아르타바스도스는 황제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자 제국 내 유력 인사였다. 그러나 그는 황위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었고, 제국 내의 복잡한 정치적, 종교적 상황을 이용하려 했다. 당시 레오 3세가 시작한 ‘성상 파괴(Iconoclasm)’ 정책은 제국 사회에 깊은 갈등을 초래했고, 콘스탄티누스 5세 또한 이 정책을 계승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741년 6월, 콘스탄티누스 5세가 동부 전선에서 아랍군과 싸우기 위해 소아시아(Asia Minor)를 횡단하던 중, 아르타바스도스는 매형인 황제를 기습 공격했다. 콘스탄티누스 5세는 공격을 피해 아모리움(Amorion)으로 도피했고, 아르타바스도스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과 성상 숭배를 지지하는 세력은 콘스탄티누스 5세의 성상 파괴 정책에 반감을 품고 있었기에, 아르타바스도스에게 환영과 지지를 보냈다.
742년 여름, 아르타바스도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정식으로 황제에 즉위했다. 그는 자신의 아들 니케포루스(Nikephoros)를 공동 황제(co-emperor)로, 또 다른 아들 니케타스(Niketas)를 아르메니아콘 테마의 총독으로 임명하며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졌다. 그의 황위 찬탈은 이사우리아 왕조의 초기이자 성상 파괴 논쟁의 한복판에서 벌어진 중요한 사건이었다.
3. 황제 아르타바스도스의 통치 : 성상 숭배 정책과 권력 기반
황제에 오른 아르타바스도스는 자신의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고 지지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이전 황제들의 정책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1) 성상 숭배 정책 : 아르타바스도스는 레오 3세와 콘스탄티누스 5세의 성상 파괴 정책을 폐기하고, 성상 숭배를 공식적으로 다시 허용했다. 고대 역사가 테오파네스(Theophanes the Confessor)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니케포루스 1세(Nikephoros I of Constantinople)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성상 숭배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수도의 대다수 성상 숭배자들과 로마 교황청의 환영을 받았다. 아르타바스도스는 이를 통해 자신을 정통 교리의 수호자로 내세우며, 전임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5세를 이단 황제로 규정하려 했다.
2) 지지 세력 : 아르타바스도스는 자신을 황제로 옹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옵시키온(Opsikion), 트라키아(Thrace), 그리고 자신의 본거지였던 아르메니아콘 테마의 강력한 군사적 지지를 받았다. 이들 테마는 황위에 반대하는 콘스탄티누스 5세에 맞설 그의 주요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반면 콘스탄티누스 5세는 강력한 해군력을 지닌 키비르라이오테 테마(Cibyrrhaeot Theme)와 아나톨리콘(Anatolic), 트라케시온(Thracesian) 테마의 군대라는 또 다른 강력한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곧 양측 간의 피할 수 없는 충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4. 짧은 통치와 비극적인 몰락 (743-744)
아르타바스도스의 통치는 2년 5개월여에 불과했다. 콘스탄티누스 5세는 아르타바스도스의 황위 찬탈에 굴하지 않고 반격을 준비했다.
- 첫 번째 충돌(743년 5월) : 743년 5월, 아르타바스도스는 콘스탄티누스 5세를 상대로 선제공격을 감행했지만, 오히려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 잇따른 패배 : 이후에도 아르타바스도스의 아들 니케타스가 이끄는 군대는 콘스탄티누스 5세에게 패배하는 등 전세는 급격히 콘스탄티누스 5세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744년 11월 2일) : 결국 744년 11월 2일, 콘스탄티누스 5세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고, 아르타바스도스의 황위는 막을 내렸다.
아르타바스도스는 자신의 측근 바크탕기오스(Baktangios)와 함께 옵시키온 테마의 푸자네스 성(Pouzanes Castle)으로 도피했으나, 곧 체포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왔다. 콘스탄티누스 5세는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아르타바스도스와 그의 아들들에게 잔혹한 처벌을 내렸다. 그들은 로마 제국에서 황위 계승 자격을 박탈하는 대표적인 형벌인 ‘실명형(blinding)’에 처해졌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외곽의 초라 수도원(Chora Monastery)에 유폐되었다. 이로써 아르타바스도스의 짧고 비극적인 치세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5. 아르타바스도스의 유산 : 비운의 삶과 역사적 의의
아르타바스도스는 로마 제국사에서 비교적 짧은 기간 황제로 재위했기에 직접적인 업적은 크지 않다. 그러나 그의 삶과 치세는 8세기 로마 제국의 복잡하고 격동적인 현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기록된다.
황위 계승의 불안정성 : 이사우리아 왕조의 초기, 황권이 완전히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친인척 간에도 황위를 둘러싼 권력 다툼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준다.
성상 논쟁의 정치적 도구화 : 아르타바스도스가 성상 숭배 지지 정책을 내세운 것은 신앙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누스 5세의 성상 파괴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을 규합하여 자신의 황권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이는 당시 성상 논쟁이 단순한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 황위 다툼의 핵심적인 정치적 이슈였음을 드러낸다.
잔혹한 처벌의 반복 : 폐위된 황제나 반란 지도자에 대한 실명형은 당시 로마 제국 황실에서 권력 다툼의 패자에게 가해지던 일반적인 처벌이었다. 이는 황위의 잔혹한 속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이다.
콘스탄티누스 5세의 권력 강화 : 아르타바스도스의 반란은 결국 콘스탄티누스 5세가 자신의 황권을 더욱 공고히 하고, 군사적 능력과 리더십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콘스탄티누스 5세는 이후 강력한 통치를 펼칠 수 있는 기반을 다지게 된다.
아르타바스도스는 로마 제국의 불안정한 시기에 등장하여 황제라는 최고의 자리를 잠시 차지했지만, 결국 권력의 격류 속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황제로 기억될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로마 제국 황실의 어두운 이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변화의 시기를 겪고 있던 제국의 모습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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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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