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6일 토요일

콘스탄티누스 5세(Constantine V, AD.718~775) : 동로마 제국 제77대 황제(AD.741~775)

콘스탄티누스 5(Constantine V, AD.718~775) : 동로마 제국 제77대 황제(AD.741~775)

 
  • Constantine V [Greek : Κωνσταντνος / romanized : Kōnstantīnos]
  • 출생 : 7187/ 콘스탄티노플
  • 사망 : 775914
  • 부친 : Leo III the Isaurian
  • 모친 : Maria
  • 배우자 : Tzitzak(Irene of Khazaria), Maria, Eudokia
  • 자녀 : Leo IV, Nikephoros, Christopher, Niketas, Eudokimos, Anthimos, Anthousa
  • 재위 : 741618~ 775914
 
콘스탄티누스 5세(Constantine V, AD.718~775) : 동로마 제국 제77대 황제(AD.741~775)
콘스탄티누스 5세(Constantine V, AD.718~775) : 동로마 제국 제77대 황제(AD.741~775)

성상 파괴자이자 제국의 수호자 : 동로마 콘스탄티누스 5세의 논쟁적인 치세 (741-775)

 
8세기 동로마 제국은 성상 숭배를 둘러싼 종교적 논쟁과 끊임없는 외부 위협 속에서 격동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의 한복판에서 황제 자리에 올라 약 34년간(741775) 동로마 제국을 통치한 인물이 바로 콘스탄티누스 5(Constantine V, 718775)이다. 그는 부친 레오 3(Leo III the Isaurian, 685741)로부터 시작된 성상 파괴 운동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여 성상 파괴자이자 대변 이름 황제(Koprónymos, Koprônimos)’라는 모욕적인 별명을 얻었지만, 동시에 탁월한 군사적 능력으로 제국을 안정시키고 번영을 가져온 위대한 전사이자 개혁 군주로 평가된다. 그의 치세는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이고 복합적인 시기 중 하나로 기록된다.
 

1. 어린 시절과 제위 계승 : 성상 파괴자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는 서기 7187,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le)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사우리아 왕조(Isaurian dynasty)의 창시자이자 성상 파괴 정책을 시작했던 황제 레오 3세였고, 어머니는 황후 마리아(Maria)였다.
 
콘스탄티누스는 두 살 때인 720년 부활절에 아버지에 의해 공동 황제(co-emperor)로 대관식을 치렀다. 이는 레오 3세가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미리 정함으로써 제위 승계의 안정성을 확보하려 했던 의도였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게르마누스 1(Germanus I)에 의해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 어릴 때부터 황실 교육을 받으며 제국의 통치자가 될 준비를 했지만, 그의 운명은 아버지의 급진적인 종교 정책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게 된다.
 
일부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5세는 간질(epilepsy)이나 나병(leprosy)과 같은 만성적인 질병을 앓았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러한 질병은 그의 통치 초기, 그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세력들이 황제로서의 그의 적합성을 문제 삼는 데 이용되기도 했다.
 

2. 황위 등극과 아르타바스도스의 반란(741-743) : 권력의 시험대

 
741618, 아버지 레오 3세가 사망하자 콘스탄티누스 5세는 동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제위는 시작부터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그가 황위에 오른 직후인 741, 그의 매형이자 군 사령관(strategos)이었던 아르타바스도스(Artabasdos, ?743)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아르타바스도스는 옵시키온(Opsikion)과 아르메니아콘(Armeniac) 테마(thema)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으며, 그의 아들 니케포루스(Nikephoros) 또한 함께 반란에 참여했다.
 
아르타바스도스는 자신을 황제라 칭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악했다. 그는 콘스탄티누스 5세의 성상 파괴 정책에 반대하고 성상 숭배를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는 당시 제국 내 성상 숭배자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는 데 기여했다. 콘스탄티누스 5세는 자신의 아나톨리콘 테마(Anatolicon Theme) 군대를 이끌고 반격에 나섰다. 743, 콘스탄티누스 5세는 반란군을 격파하고 수도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아르타바스도스와 그의 아들들은 잔인하게 처형되거나 눈이 뽑혔으며, 그의 지지자들은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이 반란 진압은 콘스탄티누스 5세가 자신의 황권을 공고히 하고 강력한 통치를 펼칠 기반을 마련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 ‘대변 이름 황제’ : 성상 파괴 운동의 강력한 추진 (754-775)

 
콘스탄티누스 5세는 아버지 레오 3세의 성상 파괴 정책을 더욱 강력하고 과감하게 추진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성상 파괴(Iconoclasm)’는 제국 내 종교적, 사회적 갈등의 중심이 되었다.
 
  • 히에리아 공의회(754) : 그는 754년에 히에리아(Hieria) 공의회를 소집하여 성상 숭배를 공식적으로 우상 숭배이자 이단으로 규정하고, 성상 파괴가 정통 기독교 신앙에 부합한다는 교리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 공의회에는 동방 교회의 주교 338명이 참석했지만, 로마 교황과 주요 동방 총대주교(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들은 참석하지 않아 그 정통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 수도원에 대한 박해 : 콘스탄티누스 5세는 성상 숭배를 강력히 지지했던 수도원 세력을 가장 큰 적으로 여겼다. 그는 수도사들을 강제로 결혼시키거나 세속화시켰고, 성상 제작에 사용되던 유물들을 파괴하며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했다. 수도원 건물들은 병영이나 공공 건물로 전용되었으며, 수도사들은 고문당하거나 처형당하기도 했다.
  • 코프르니모스라는 별명 : 이러한 극단적인 성상 파괴 정책과 수도원 박해로 인해 콘스탄티누스 5세는 성상 숭배자들과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극심하게 비난받았다. 그는 대변 이름 황제’(Koprónymos 또는 Koprônimos)라는 모욕적인 별명을 얻었다. 이는 그가 유아세례를 받을 때 세례반에 배설했다는 루머에서 비롯되었으며, 이와 비슷한 소변 묻은 자’(Ouralýphios)말을 잘 타는 자’(Kaballinos) 등의 별명도 같은 맥락에서 파생되었다. 이러한 별명들은 그의 잔혹한 정책에 대한 성상 숭배자들의 증오와 경멸을 반영한다.
 
콘스탄티누스 5세의 성상 파괴 정책은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고, 이는 동서 교회의 분열과 동서 로마 제국의 문화적, 정치적 분화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4. 제국의 수호자 : 군사적 천재성 발휘

 
논란이 많았던 종교 정책과는 별개로, 콘스탄티누스 5세는 탁월한 군사적 지도자로서 제국의 안정과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재위 기간은 로마 제국의 군사력이 다시금 강성해진 시기였다.
 
  • 아랍과의 전쟁 : 그는 동방의 숙적 이슬람 우마이야 칼리파국(Umayyad Caliphate)과 아바스 왕조(Abbasid Caliphate)를 상대로 성공적인 방어와 반격 작전을 펼쳤다. 그는 시리아(Syria)와 아르메니아(Armenia) 지역으로 군사 원정을 감행하여 이슬람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이들을 로마 영토 밖으로 밀어냈다. 그의 지속적인 군사 압박은 칼리파국이 제국 영토를 침략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 불가르족과의 전쟁 : 발칸반도의 불가르족은 제국의 북부 국경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5세는 불가르족을 상대로 무려 9번의 군사 원정을 감행하며 강력한 군사적 압박을 가했다. 그는 763630일에 벌어진 안키알루스 전투(Battle of Anchialus)에서 불가르족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이는 제국 북부의 평화를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테마(Thema) 제도 강화 : 그는 테마 제도를 더욱 세분화하고 군사적 효율성을 높이는 개혁을 단행했다. 특히 아나톨리아(Anatolia)의 인구 감소를 해결하고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슬라브족을 포함한 이민족들을 소아시아로 이주시켜 군인으로 활용했다.
 
그의 치세 동안 동로마 제국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이슬람의 팽창으로 상실했던 영토를 일부 회복했으며, 국경을 안정시켜 제국 내의 안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군사적 성공은 그의 황제로서의 정통성을 강화하고 제국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데 크게 기여했다.
 

5. 재정 및 행정 개혁 : 제국의 번영을 위한 기반

 
콘스탄티누스 5세는 군사적 재능 외에도 뛰어난 행정가였다. 그는 제국의 재정 시스템을 개혁하고 효율적인 통치를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 재정 확보 : 그는 성상 파괴 정책을 통해 몰수한 수도원의 재산을 국고로 환수하고, 엄격한 세금 징수와 효율적인 재정 관리로 제국 재정을 건전하게 만들었다. 그의 치세 동안 제국의 재정은 상당한 안정과 번영을 누렸다.
  • 인구 증대 및 경제 활성화 : 전쟁 포로와 이민자들을 제국 영토, 특히 인구가 감소한 소아시아 지역으로 이주시킴으로써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경제를 활성화시켰다.
  • 도시 재건 : 전쟁으로 피폐해진 도시들을 재건하고 방어 시설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이는 제국의 기반 시설을 강화하고 시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다.
 

6. 죽음과 유산 : 로마 역사의 논쟁적인 황제

 
콘스탄티누스 5세는 775914, 불가르족과의 전쟁 원정 중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 사도 교회(Church of the Holy Apostles)에 안치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레오 4(Leo IV the Khazar, 741780)가 황제에 즉위했다.
 
콘스탄티누스 5세의 치세는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시기 중 하나로 기록된다.
  • 성상 파괴 정책의 상징 : 그는 성상 파괴 운동을 가장 강력하게 추진했던 황제였다. 이 정책은 후대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고, 그에 대한 긍정적/부정적 평가를 극명하게 갈리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성상 숭배자들에게는 대변 이름 황제라는 모욕적인 별명과 함께 폭군으로 기억되지만, 제국을 파멸에서 구한 능력 있는 황제로 평가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 제국의 번영과 안정 : 그의 치세 동안 제국은 군사적, 경제적, 행정적으로 큰 안정을 이루었으며, 이는 비잔티움 제국의 중흥을 위한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는 제국을 이슬람과 불가르족의 위협으로부터 효과적으로 방어했다.
  • 비잔티움 정체성의 확립 : 그의 시대는 로마 제국이 완전히 동방의 비잔티움 제국으로서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립해가는 중요한 전환기였다. 성상 파괴 논쟁은 종교적으로 서방과의 단절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5세는 강인한 의지와 뛰어난 통찰력을 지닌 황제였으며, 그의 통치는 제국의 명운을 건 시대의 요구에 응답하려 했던 한 인물의 드라마틱한 삶이었다. 그는 로마 역사의 거대한 논쟁 속에서 오늘날까지도 그 이름이 회자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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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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