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근동] 제1기 시랜드 왕조(기원전 약 1732년~기원전 1460년)
고대 메소포타미아 역사는 수많은 왕조의 흥망성쇠로 점철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제1기 시랜드 왕조(First Sealand dynasty, URU.KÙKI 또는 The 2nd Dynasty of Babylon)는 고대 바빌로니아 제국(Old Babylonian Empire)의 붕괴 이후,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습지대에서 홀연히 나타나 약 3세기 동안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미스터리한 왕조이다. 기원전 약 1732년부터 기원전 1460년까지(짧은 연대기 기준) 추정되는 그들의 역사는 주로 단편적인 왕 목록에만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어,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 불린다. 바빌론과 아모리인(Amorite)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했던 이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남쪽 경계에서 독특한 발자취를 남겼다.
1. 늪지에서 피어난 왕조 : 지리적 특성과 그 영향
제1기 시랜드 왕조는 당시 혼란에 빠져 붕괴해가던 고대 바빌로니아 제국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왔다. 그들의 주요 거점은 메소포타미아 최남단, 즉 티그리스(Tigris) 강과 유프라테스(Euphrates) 강 하구의 넓은 습지대였다. 이곳은 큰 정착촌이 거의 없는 늪지대로, 시간이 흐르면서 강물의 토사 퇴적 작용으로 점차 남쪽으로 확장되었다. 훗날 철기 시대에는 이곳이 '마트 칼디(mat Kaldi)', 즉 '칼데아(Chaldaea)'라고 불리게 되는 지역이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은 제1기 시랜드 왕조의 성격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거대한 제국들과의 직접적인 대립을 피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가졌고, 습지의 풍부한 자연자원을 활용하여 독자적인 생존 방식을 구축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길시(Girsu), 우루크(Uruk), 라가시(Lagash)와 같은 남부 지역에서만 해양 왕조 시대의 토기(pottery)가 발견되었고, 그 북쪽 지역에서는 발견되지 않아 그들의 활동 영역이 주로 남부에 국한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 수메르의 메아리와 아카드인의 삶 : 해양 왕조의 문화
제1기 시랜드 왕조의 문화는 과거 수메르 문명에 대한 향수와 당시 지배적이었던 아카드 문화가 혼재된 양상을 보였다. 흥미롭게도 이 왕조의 후대 왕들은 '수메르어풍'의 이름을 사용하며 과거 이신(Isin) 왕조의 영광을 되새기려는 경향을 보였다. 예를 들어, 이 왕조의 세 번째 왕은 이신 왕조의 마지막 왕인 다미크-일리슈(Damiq-ilishu)의 이름을 따르기도 했다. 이는 사라진 수메르 문화에 대한 계승 의식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왕실의 명칭 사용 경향과는 별개로, 실제 시랜드 왕조의 인구는 주로 아카드어 이름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아카드어를 사용하며 생활했다. 이는 당시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아카드어가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지배적이었음을 반영하는 현상이다. 결국 시랜드 왕조는 과거 수메르 문명의 흔적을 계승하려는 상징적인 노력과 당시 현실적인 아카드 문명과의 조화를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3. 미궁 속의 수도 : '바다의 땅' 중심지를 찾아서
제1기 시랜드 왕조의 역사를 더욱 미스터리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의 수도가 어디였는지 현대에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왕 목록의 한 단편에는 바빌론의 "왕권이 에우루쿠가(E'urukuga)로 넘어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에우루쿠가(uru.ku)가 해양 왕조의 수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몇 가지 추측이 존재한다.
- 라가시(Lagash) : 이 시기의 라가시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지만, 이곳이 시랜드 왕조의 수도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 니푸르(Nippur)와 텔 데하일라(Tell Deḥaila) : 이 두 지역도 시랜드 왕조의 수도 후보지로 고려되고 있다.
- 두르-엔릴(Dūr-Enlil) : 현대 학자들은 두르-엔릴(또는 두르-엔릴레)이라는 곳이 수도였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후대 신바빌로니아 시대와 신아시리아 시대에 존재했던 두르-엔릴과 이 시랜드 왕조의 수도가 동일한 장소인지는 분명하지 않아,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처럼 수도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는 점은 제1기 시랜드 왕조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와 이해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4. 베일에 싸인 역사 : 알려지지 않은 지배와 단편적인 기록
제1기 시랜드 왕조의 존재는 주요 왕 목록, 그리고 아시리아의 연대기 왕 목록 A.117과 같은 간략한 언급을 통해서만 확인된다. 이 기록들은 주로 왕위 계승의 순서를 나열하는 정도이며, 구체적인 사건이나 역사적 맥락에 대한 정보는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이러한 정보 부족은 시랜드 왕조 시대의 사회, 경제, 문화 등에 대한 상세한 그림을 그리기 어렵게 만든다.
비록 그들의 존재 기간이 짧고 명확한 기록이 부족하지만, 이들의 통치가 바빌론 자체까지 잠시 확장되었다는 간접적인 증거도 존재한다. 이는 시랜드 왕조가 단순히 습지의 작은 세력이 아니라, 한때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도시에도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후대 신바빌로니아 제국 시대에도 '시랜드 주(Sealand province)'가 존재했다는 기록은 이 지역의 중요성이 계속해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5. 제1기 시랜드 통치자 목록
왕명록 비교, 동시대 인물
6. 바빌로니아사의 이정표 : 시랜드 왕조의 짧지만 의미 있는 발자취
제1기 시랜드 왕조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역사에서 짧지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들은 바빌로니아 제1왕조가 쇠퇴하고 카시트(Kassite)인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전까지의 혼란기에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질서를 유지하며 하나의 독립적인 정치 단위로 기능했다. 비록 그들의 존재는 '불확실성'과 '미스터리'로 가득 차 있지만, 이들의 존재는 메소포타미아 역사 연구에서 여전히 흥미로운 탐구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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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트인에 의한 시랜드 정복. 20세기 재구성 |
7. 카시트인에 의한 시랜드 정복. 20세기 재구성
제1기 시랜드 왕조는 문헌 기록이 극히 드물고 고고학적 증거도 제한적이어서 마치 베일에 싸인 존재처럼 느껴지지만, 이는 또한 고대 근동의 역사가 얼마나 다채롭고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지를 보여준다. 고고학적 발굴과 문헌 해석을 통해 이 수수께끼 같은 왕조의 베일이 언젠가 완전히 벗겨질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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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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