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누스 율리아누스(Sabinus Julianus, AD.?~285) : 로마 제국 황제참칭자(AD.283~285)
동명이인의 그림자 속에서 떠오른 찬탈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비누스 율리아누스(Marcus Aurelius Sabinus Julianus)는 “판노니아의 율리아누스”로 알려져 있는데, 3세기 말 로마 제국의 찬탈자(usurper)로, 전승에 따르면 283~285년(또는 286년) 사이에 황제 카리누스(Carinus) 혹은 막시미아누스(Maximian)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주화와 약사들이 남긴 기록을 종합하면 이 이름으로 불린 인물이 한 사람만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최소 1명은 확실하게 주화(안토니니아누스ㆍ아우레우스)로 실재가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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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누스 율리아누스(Sabinus Julianus, AD.?~285) : 로마 제국 황제참칭자(AD.283~285) |
인물 정체와 ‘동명이인’ 가능성
문헌과 주화가 전하는 이름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비누스 율리아누스(Marcus Aurelius Sabinus Julianus)” 혹은 약기 “M. Aur. Iulianus”이며,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와 조시무스에 등장하는 ‘사비누스 율리아누스’가 동일 범주로 지목된다. 다만 10년 안팎의 기간에 최대 4명의 ‘율리아누스’가 차례로 혹은 지역별로 봉기했을 가능성이 제시되어, 연구사에서는 “한 인물설”과 “다중 인물설”이 병존한다. 적어도 1명의 율리아누스는 주화 증거로 실존이 확증된다.
283~285년, 카리누스에 맞선 찬탈
한 전승에 따르면 율리아누스는 283/284년에 이탈리아 북부의 코렉토르(corrector, 특별감사ㆍ조정관)로 재직 중, 황제 카루스의 사망(283) 또는 누메리아누스의 사망 소식(284년 11월)이 서방에 도달하자 판노니아에서 반기(찬탈)를 들었다. 그는 시스키아 조폐소를 장악하고 판노니아의 충성을 칭송하는 범례가 새겨진 주화를 발행함으로써 합법화의 외피를 갖추었다.
‘코렉토르’인가 ‘근위대 총관’인가, 직위 논쟁
일부 전승은 율리아누스를 프라이토리움 총관으로 기록하지만, 근거 문헌의 재검토는 그가 이탈리아의 코렉토르였음을 지지한다. 이 정정은 봉기의 행정 기반과 그의 동원 권한을 재구성하는 데 중요하다. 코렉토르는 속주와 이탈리아 일부에 대한 광범위한 조정 권한을 가진 특임관직으로, 반란의 행정적 발판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시스키아 주화와 ‘판노니아 찬가’ 범례
시스키아(Siscia)에서 발행된 그의 안토니니아누스ㆍ아우레우스에는 ‘판노니아 두 속주’를 찬양하는 범례와 도상이 확인된다. 판노니아 군단의 충성 확보는 로마 내전의 전형적 승부처였고, 주화는 그 정치 선전의 핵심 매체였다. 이 물질 증거는 율리아누스 찬탈의 실체를 뒷받침한다.
패전과 최후, 장소에 관한 상이한 전승
카리누스는 브리튼에서 출정해 반란 진압에 나섰고, 율리아누스를 285년 초 이탈리아(베로나설) 또는 일리리쿰에서 격파해 사살했다고 전한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와 조시무스의 기술이 다소 엇갈려, ‘베로나 인근 전사’와 ‘일리리쿰에서 패사’의 두 전승이 병존한다. 공통분모는 285년 초에 진압되었다는 시간 축이다.
“두 명의 율리아누스” 가설
일부 학자들은 실은 2명이 존재했다고 본다. 첫째, 카루스 사후 판노니아를 거점으로 봉기하여 일리리쿰에서 패한 “M. Aurelius Julianus(코렉토르)”. 둘째, 누메리아누스 사후 이탈리아에서 봉기했다가 베로나 근처에서 패한 “Sabinus Julianus(프라이토리움 총관)”. 이 구분은 서로 다른 전승과 주화ㆍ연대 차이를 설명하기 위한 조정안으로 제시된다.
아프리카의 ‘율리아누스’와 퀸케겐타니의 소요
문헌에는 카리누스에 대항하여 아프리카 속주에서도 ‘율리아누스’라는 이름의 인물이 퀸케겐타니(Quinquegentani) 부족의 지원을 받아 소요를 일으켰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인물이 판노니아의 율리아누스와 동일인인지, 또는 또 다른 지역적 찬탈자인지는 확정되지 않는다. 다만 동명이인의 난립이 280년대 로마 정치의 불안정성을 반영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286년경, 막시미아누스/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의 “세 번째 율리아누스”
막시미아누스가 286년 3월 1일 아우구스투스로 승격된 이후부터,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ㆍ갈레리우스가 카이사르로 임명된 293년 3월 1일 이전 사이에 이탈리아에서 또 다른 ‘율리아누스’의 봉기가 있었다는 전승이 존재한다. 이 반란은 공성 중 성벽이 뚫리자 율리아누스가 불길 속으로 몸을 던지며 종결되었다고 전한다. 이는 전자의 판노니아ㆍ이탈리아 율리아누스들과 구분되는 “세 번째 율리아누스”로 기술된다.
이름과 존재를 확인해 주는 사료,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이름 확인 : 주화 범례의 “M. Aur. Iulianus”와 문헌의 ‘Sabinus Julianus’가 핵심 단서이다.
- 연대ㆍ무대: 판노니아ㆍ시스키아, 이탈리아(베로나), 일리리쿰, 아프리카 등지에서 시차를 두고 나타나는 동명이인이 전승에 포착된다.
- 결론 : ‘단일 인물’로 모든 전승을 수렴하기보다는, 최소 한 명의 실존(주화로 확증) + 추가 동명이인 가능성을 인정하는 복수 가설이 가장 보수적이다.
간단 연표
- 283/284년 : 이탈리아의 코렉토르로 재직 ; 황제 사망 소식 도달 후 판노니아에서 봉기, 시스키아 주화 발행.
- 285년 초 : 카리누스가 서진하여 격파ㆍ사살(베로나 또는 일리리쿰 전승).
- 동시기/근접기 : 아프리카 속주에서 ‘율리아누스’의 소요(동일인 불확실).
- 286년~293년 사이 : 막시미아누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또 다른 ‘율리아누스’ 봉기ㆍ자결 전승.
맺음말 : 280년대 로마, ‘이름’과 ‘주화’ 사이에서 읽는 찬탈의 지도
판노니아의 율리아누스는 주화로 실존이 확인되는 한 명과, 문헌에 파편적으로 남은 여러 동명이인의 그림자가 겹쳐진다. 280년대의 불안정은 이름의 중첩과 전승의 혼선을 낳았고, 연구는 “주화ㆍ비문ㆍ요약 전기”라는 견고한 층위를 중심으로 최소 사실을 재구성한다. 그 결과 우리는 판노니아ㆍ시스키아ㆍ베로나ㆍ일리리쿰ㆍ아프리카를 잇는 찬탈의 지도를 읽게 되며, 테트라르키아 직전 ‘군단이 만든 정치’의 성격을 보다 선명히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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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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