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20일 수요일

요한네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John V Palaiologos, AD.1332~1391) : 동로마 제국 제124대 황제(1341~1391)

요한네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John V Palaiologos, AD.1332~1391) : 동로마 제국 제124대 황제(1341~1391)

 
요한네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 몰락하는 제국을 지키려 했던 비운의 황제 (1341-1391)
  • John V Palaiologos / Palaeologus
  • [Greek : Ἰωάννης Παλαιολόγος / romanized : Iōánnēs Palaiológos]
  • 출생 : 1332618
  • 사망 : 1391216
  • 부친 : Andronikos III Palaiologos
  • 모친 : Anna of Savoy
  • 배우자 : Helena Kantakouzene
  • 자녀 : Andronikos IV Palaiologos, Irene Palaiologina, Manuel II Palaiologos, Theodore I Palaiologos, Michael Palaiologos, Maria Palaiologina, Four daughters(names unknown), Zampia Palaiologina
  • 재위 :
    1차 재위 : 13411119~ 1376812
    2차 재위 : 137971~ 1390414
    3차 재위 : 1390917~ 1391216
 
성 소피아 대성당 동쪽 아치에 있는 요안네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의 복원된 모자이크화.
성 소피아 대성당 동쪽 아치에 있는 요안네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의 복원된 모자이크화.
 

1. 서론 : 제국의 벼랑 끝에서 맞이한 길고 비극적인 통치

 
14세기 중반,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비잔틴 제국은 이미 쇠락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상태였다. 내부의 오랜 내전과 재정난, 그리고 동방에서 거대한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이라는 새로운 위협이 발흥하면서 제국의 명운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시기, 비잔틴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여 가장 길고 비극적인 통치를 기록한 인물이 바로 요한네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John V Palaiologos, 1332-1391)이다. 그는 1341년부터 1391년까지 무려 50년 동안 비잔틴 제국을 이끌었으나, 그의 재위 기간은 끊임없는 내전과 오스만의 맹렬한 공세, 그리고 서방 세계로부터의 외면 속에서 제국이 해체되어 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요한네스 5세는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올라 재위 기간 내내 끝없는 내부 권력 투쟁과 외부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제국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심지어 개인적인 희생까지 감수하며 서유럽의 도움을 구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되돌릴 수 없었고, 결국 비잔틴 제국은 그의 통치 말기에 오스만의 봉신국으로 전락하는 치욕을 맛보게 된다. 이 글에서는 요한네스 5세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제국이 직면했던 국내외적 도전, 그가 추구했던 정책의 내용과 결과, 그리고 그의 비극적인 최후와 함께 쇠락하는 비잔틴 제국의 운명에 드리운 그림자에 대해 심층적으로 다룰 것이다.
 

2. 시대적 배경 : 내전의 씨앗을 뿌린 황제의 죽음

 
요한네스 5세가 즉위하기 직전의 비잔틴 제국은 그의 할아버지 안드로니코스 2세 팔라이올로고스(Andronikos II Palaiologos, 1259-1332)의 장기 통치와 아버지 안드로니코스 3세 팔라이올로고스(Andronikos III Palaiologos, 1297-1341)의 짧은 재위 동안 심각한 약화를 겪고 있었다. 특히 안드로니코스 3세는 비잔틴 제국에 잠시나마 활력을 불어넣고 군사적 노력을 통해 일부 영토를 회복하려 했지만, 134144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제국에 치명적인 권력 공백을 야기했다.
 
안드로니코스 3세의 죽음은 곧이어 ‘1341-1347년의 파괴적인 비잔틴 내전으로 이어지는 씨앗이 되었다. 요한네스 5세는 겨우 아홉 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섭정’(regency)이 불가피했고, 이는 곧 강력한 권력을 두고 치열한 암투가 벌어질 것임을 예고했다.
 

3. 초기 생애와 첫 번째 내전: 섭정기와 권력 다툼(1332-1347)

 

1) 어린 황제의 즉위와 섭정 논쟁

 
요한네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는 1332618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안드로니코스 3세 팔라이올로고스였고, 어머니는 사보이의 안나(Anna of Savoy, 1306-1365)였다. 1341년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그는 불과 아홉 살의 나이로 비잔틴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어린 황제를 대신할 섭정의 자리를 두고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요한네스 3세 칸타쿠제노스(John Kantakouzenos, 1292-1383)는 안드로니코스 3세의 가장 신뢰하는 친구이자 유능한 최고 대신이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죽기 전 칸타쿠제노스에게 자신의 어린 아들의 후견인 역할을 맡겼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황후 안나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요한 14세 칼레카스(John XIV Kalekas, ?-1347), 그리고 강력한 재상 알렉시오스 아포카우코스(Alexios Apokaukos, ?-1345)는 칸타쿠제노스를 견제하며 섭정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 간의 갈등은 결국 제2차 팔라이올로고스 내전(Second Palaiologan Civil War)으로 비화되었다.
 

2) 2차 팔라이올로고스 내전(1341-1347)


이 내전은 비잔틴 제국의 남은 자원을 모두 소모시켰다’. 칸타쿠제노스는 자신의 지지 기반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 군사적으로 반대파를 압박했고, 결국 134110, 자신을 황제 요한네스 6세 칸타쿠제노스(John VI Kantakouzenos)로 선포했다. 내전 기간 동안 어린 요한네스 5세는 명목상의 황제이자 섭정 위원회의 상징적인 존재로 이용되었다. 그는 사실상 왕실의 인질신세로, 요한네스 칸타쿠제노스가 쫓아왔을 때 테네도스로 납치되어’ ‘포로로 잡혀갔다.’
 
내전은 세르비아(Serbia)와 오스만 투르크 등 외세의 개입을 불러왔다. 칸타쿠제노스는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오스만 투르크의 오르한 가지(Orhan Gazi, 1281-1362)와 동맹을 맺고 오스만 병력을 비잔틴 영토에 끌어들였다. 이들은 비잔틴 영토를 약탈하고 주민들을 살해하며 제국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내전으로 인한 황폐화는 비잔틴 제국을 유지 불가능한지경으로 만들었다.
 

4. 칸타쿠제노스와의 공동 통치 : 딜레마와 타협(1347-1354)

 
결국 1347, 요한네스 6세 칸타쿠제노스가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면서 내전은 종결되었다. 그는 어린 요한네스 5세와의 타협을 통해 공식적으로 공동 황제로 인정받았다. 이들은 이후 7년간 공동 황제로서 제국을 다스렸다.
 
이 기간 동안 요한네스 6세 칸타쿠제노스는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오스만 투르크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노력했고, 젠투(Genoa) 및 베네치아(Venice)와 같은 이탈리아 해상 세력과의 관계를 관리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오스만 투르크 의존 정책은 제국 내부에 큰 불만을 초래했다. 오스만 투르크는 비잔틴 영토에서 자신들의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했고, 1354년에는 갈리폴리’(Gallipoli)를 점령하면서 유럽 대륙에 교두보를 마련했다. 이는 비잔틴 제국에 치명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오스만 투르크와의 동맹에 대한 불만은 요한네스 5세를 중심으로 다시 한번 권력 투쟁을 촉발시켰다. 젊은 요한네스 5세는 자신이 진정한 황제이며, 칸타쿠제노스의 통치는 합법성이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결국 13541121, 요한네스 5세는 제노아와 베네치아의 지원을 받아 콘스탄티노플로 진입하여 요한네스 6세 칸타쿠제노스를 폐위시키는 데 성공했다. 요한네스 6세는 수도사로 은퇴하여 수도원에서 남은 여생을 보냈다. 이로써 요한네스 5세는 비잔틴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었다.
 

5. 단독 통치 시대 : 끝없는 위기와 절망적인 노력(1354-1391)

 
요한네스 5세는 단독 황제가 되었지만, 그가 물려받은 것은 내전과 외부의 침략으로 철저히 파괴되고 약화된 제국이었다. 그의 재위 37년간은 끊임없는 위기와 절망적인 노력의 연속이었다.
 

1) 오스만 위협의 증대

 
요한네스 5세 통치기 동안 오스만 제국은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영토를 집어삼키며 급격히 팽창했다. 오스만은 갈리폴리를 교두보로 삼아 발칸 반도로 진출했고, ‘필리폴리스’(Philippopolis), ‘아드리아노폴리스’(Adrianople)와 같은 비잔틴의 중요한 도시들을 연이어 점령했다. 1365년에는 오스만이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수도로 삼으면서 비잔틴 제국은 사실상 오스만에 포위되는 형세에 놓였다.
 
요한네스 5세는 이 거대한 위협에 맞설 군사력이 없었다. 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투르크에 맞서 싸우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2) 서방 원조를 위한 절망적인 노력 : 황제의 순례

 
오스만의 맹렬한 공세 앞에서 요한네스 5세는 서유럽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재통합을 대가로 서방의 도움을 구하려 했다.
 
  • 로마 방문과 가톨릭 개종(1369) : 1369, 요한네스 5세는 직접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 우르바노 5(Pope Urban V, 1310-1370)를 만났다. 그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며 개인적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이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정교회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전례 없는 행위였다. 그는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고 서유럽 교회가 정교회의 이단적 교리를 비판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인 개종은 비잔틴 정교회 신자들의 광범위한 반발을 샀고, 제국 내부에 더 큰 종교적 분열만 초래했다. 로마 교황은 그를 따뜻하게 맞았으나, 실질적인 군사적 지원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유럽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관심이 없거나, 자신들의 내부 문제로 바빴다.
  • 베네치아 억류(1370) : 로마 방문 이후, 요한네스 5세는 베네치아로 향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이 과거 베네치아에 진 빚을 갚지 못하자, 그는 베네치아에서 억류당하는 치욕을 겪었다. 그의 아들 마누일 2세 팔라이올로고스(Manuel II Palaiologos, 1350-1425)가 베네치아로 건너와 아버지의 빚을 갚아주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서방으로부터의 지원이 얼마나 절실했고, 동시에 비잔틴 제국의 위신이 얼마나 추락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3) 내부 불안정 : 아들 안드로니코스 4세의 반란

 
외부의 위협뿐만 아니라 내부의 불안정은 요한네스 5세를 더욱 힘들게 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무려 네 번의 내전이 발생했다.
 
  • 안드로니코스 4세의 반란(1373) : 1373, 요한네스 5세의 맏아들이자 공동 황제였던 안드로니코스 4세 팔라이올로고스(Andronikos IV Palaiologos, 1348-1385)가 아버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놀랍게도 안드로니코스 4세는 오스만 술탄 무라트 1(Murad I, 1326-1389)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고, 무라트 1세는 요한네스 5세와 자신의 아들 사부치 베이(Savcı Bey)의 눈을 멀게 할 것을 요구했다. 요한네스 5세는 자신의 아들의 눈을 멀게 하는 대신, 안드로니코스 4세의 눈에는 가벼운 마취액만 사용하고 손자의 눈을 멀게 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 투르크의 봉신이 되다(1379/1381) : 1379년 또는 1381, 요한네스 5세는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결국 오스만 술탄 무라트 1세의 봉신’(vassal)이 되는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 따라 그는 무라트 1세에게 정기적인 조공을 바치고, 필요할 경우 오스만 군대에 군사적 지원을 제공해야 했다. 또한 오스만 술탄이 콘스탄티노플 내에서 그의 건축 활동을 막을 정도로 그의 주권은 심각하게 침해되었다. 1389년 코소보 전투(Battle of Kosovo) 이후 무라트 1세가 죽자, 요한네스 5세는 오스만 제국을 위해 투르크에 맞서 싸웠다.
  • 아드리아노폴리스 점령(1365) : 이 사건은 비잔틴 제국의 몰락을 가속화시킨 주요 사건 중 하나였다. 오스만 투르크가 발칸 반도를 장악하면서 비잔틴은 오스만의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4) 황금문 방어선 건설 시도와 오스만 술탄의 강압

 
요한네스 5세는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에게 완전히 포위당하자, 도시의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1380년대 후반, 그는 고대 로마 시대의 방어선이었던 황금문(Golden Gate) 인근에 새로운 요새를 건설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오스만 술탄 바예지트 1(Bayezid I, 1360-1403)의 분노를 샀다. 바예지트 1세는 요한네스 5세에게 요새 건설을 중단하고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만약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요한네스 5세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자신이 세우려던 요새를 스스로 파괴하도록 명령해야 하는 굴욕을 겪었다. 이 사건은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대해 거의 주권을 상실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기록된다.
 

6. 사망(1391)

 
요한네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는 1391216, 콘스탄티노플에서 사망했다. 그의 길고 파란만장했던 통치는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 제국의 그림자 아래로 완전히 들어서는 시기를 마감했다. 그는 비잔틴 제국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지만, 결국 그의 노력은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의 죽음 이후, 그의 아들 마누일 2세 팔라이올로고스가 비잔틴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7. 주요 등장인물

 
  • 요한네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John V Palaiologos, 1332-1391) : 본 글의 주인공. 비잔틴 제국의 황제.
  • 안드로니코스 3세 팔라이올로고스(Andronikos III Palaiologos, 1297-1341) : 요한네스 5세의 아버지.
  • 안나 팔라이올로기나(Anna Palaiologina, 1306-1365) : 요한네스 5세의 어머니.
  • 요한네스 6세 칸타쿠제노스(John VI Kantakouzenos, 1292-1383) : 요한네스 5세의 재위 초 공동 황제이자 강력한 라이벌.
  • 안드로니코스 4세 팔라이올로고스(Andronikos IV Palaiologos, 1348-1385) : 요한네스 5세의 맏아들이자 반란을 일으켰던 황태자.
  • 마누일 2세 팔라이올로고스(Manuel II Palaiologos, 1350-1425) : 요한네스 5세의 둘째 아들이자 후계자.
 

8. 역사적 의미와 평가 : 몰락의 한가운데서 고뇌했던 황제

 
요한네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의 통치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복합적이지만, 대체로 비극적인 황제로 기억된다. 그는 비잔틴 제국이 최종적인 몰락으로 나아가는 과도기를 상징한다.
 
  • 끝없는 내전의 희생자이자 원인 제공자 :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발생한 네 번의 내전은 제국의 남은 자원마저 모두 소진시켰고, 군사력을 약화시켰으며, 오스만 투르크와 같은 외부 세력이 비잔틴 영토를 잠식해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는 내전의 희생자였지만, 동시에 자신의 아들을 감싸고 권력 다툼을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함으로써 내전의 씨앗을 제공하기도 했다.
  • 절망적인 외교와 주권 상실 : 그는 오스만 투르크의 맹렬한 공세 앞에서 서유럽으로부터의 지원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지만, 실질적인 도움은 거의 받지 못했다. 심지어 개인적인 가톨릭 개종이라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감행했으나, 이는 국내의 종교적 분열만 심화시켰다. 결국 오스만의 봉신이 되는 굴욕을 겪으며 제국의 주권을 상실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비잔틴 제국이 더 이상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없는 상태였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동이었다.
  • 오스만 위협의 가속화 : 그의 재위 기간은 오스만 투르크가 발칸 반도를 장악하고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는 결정적인 시기였다. 그는 오스만의 위협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약해진 제국의 힘과 서방의 무관심 속에서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의 통치 말기, 비잔틴 제국은 사실상 콘스탄티노플 주변의 작은 영토만을 간신히 유지하는 미약한 존재로 전락했다.
 
요한네스 5세는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팔라이올로고스 황제들 중 가장 길게 재위했지만, 그의 통치는 제국의 힘이 거의 사라지고 오스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였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온화하고 유약한 성격이었으며, 십자군과의 연대, 재정 개혁 시도 등 제국을 구원하기 위한 여러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미 역사의 흐름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의 삶은 비잔틴 제국의 멸망이라는 거대한 비극의 서곡이었다.
 

9. 오늘의 상황에서 : 리더십의 한계와 시대의 무게

 
요한네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리더십의 한계와 시대의 무게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공한다. 그의 삶은 한 개인이 아무리 분투해도 역사의 거대한 흐름과 구조적인 문제를 혼자서 바꾸기는 어렵다는 냉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 첫째, ‘내부 분열이 가져오는 치명적인 결과이다. 요한네스 5세는 재위 기간 내내 끝없는 내전으로 인해 제국의 힘을 소진시켰다. 이는 오늘날에도 국가든 조직이든 내부 갈등과 권력 다툼이 해결되지 않으면 외부의 위협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음을 경고한다. 
  • 둘째, ‘절박한 외교의 딜레마이다. 서방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종교적, 주권적 양보까지 감수했지만, 실질적인 지원은 미미했다. 이는 국제 관계에서 자국의 힘이 약할 때 외세 의존이 가져올 수 있는 한계와 굴욕을 보여준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냉정한 현실 인식과 함께 자강 노력이 필수적임을 시사한다. 
  • 셋째, ‘황금문 요새바예지트의 명령일화는 리더의 자주성이 침해될 때 국가의 위신과 자율성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상징한다. 외부의 압력 앞에서 자국민에게 스스로의 방어 시설을 파괴하도록 명령해야 하는 리더의 심정은 그야말로 비극의 극치였다.
 
요한네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는 비록 비잔틴 제국을 구원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고뇌와 분투는 멸망의 운명 앞에서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던 한 인간의 드라마를 보여준다. 그의 통치는 비잔틴 제국이라는 거대한 문명이 어떻게 마지막 숨을 내쉬었는지를 보여주는 뼈아픈 역사의 한 장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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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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