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8일 월요일

바실리우스 2세(Basil II, AD.958~1025) : 동로마 제국 제96대 황제(AD.976~1025)

바실리우스 2(Basil II, AD.958~1025) : 동로마 제국 제96대 황제(AD.976~1025)

 
  • 바실리우스 2(Basil II Porphyrogenitus)
  • [Greek : Βασίλειος Πορφυρογέννητος / romanized : Basíleios Porphyrogénnētos]
  • the Bulgar Slayer [Greek : ὁ Βουλγαροκτόνος, ho Boulgaroktónos]
  • 출생 : 958
  • 사망 : 10251215
  • 부친 : 로마노스 2(Romanos II)
  • 모친 : 테오파노(Theophano)
  • 재위 : 976110~ 10251215
  • 대관식(공동황제) : 960422
 
국립역사박물관 소장 『메노로기온』에 실린 바실리오스 2세의 복원된 초상화
국립역사박물관 소장 메노로기온에 실린 바실리오스 2세의 복원된 초상화
 

1. 바실리우스 2세 황제 : ‘불가리아인의 학살자’, 제국을 최전성기로 이끌다

 
바실리우스 2(Basil II, 95810251215)976년부터 1025년까지 비잔틴 제국을 통치했던 황제였다. 50년에 가까운 그의 긴 재위 기간은 비잔틴 제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시기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는 강력한 군사적 리더십으로 제국 내부의 반란을 진압하고, 대외적으로는 특히 불가리아를 완전히 정복하여 불가리아인의 학살자(Βουλγαροκτόνος, Boulgaroktónos)’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비잔틴 제국은 군사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2. 불안정한 어린 시절과 황위 계승

 
바실리우스 2세는 958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황제 로마노스 2(Romanos II, 938963)와 황후 테오파노(Theophano, 생몰년 미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이미 960422일 공동 황제로 즉위했지만, 당시 2살에 불과했다. 그의 아버지가 963년 의문사한 후, 어머니 테오파노가 섭정을 맡았고, 유능한 장군 나이키포로스 2세 포카스(Nikephoros II Phokas, 912년경969)가 황제에 올라 그의 양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나 나이키포로스 2세 역시 969년 암살당했고,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John I Tzimiskes, 925년경976)가 황제가 되어 다시 바실리우스의 양아버지가 되었다.
 
두 명의 강력한 군인 황제 아래서 어린 시절을 보낸 바실리우스는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와 그의 동생 콘스탄티노스(Constantine VIII, 9601028)는 상징적인 공동 황제였을 뿐이었다.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가 976년 사망하자, 바실리우스는 드디어 단독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즉위 초부터 강력한 귀족 가문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3. 내부 반란 진압 : 바르다스 스클레로스와 바르다스 포카스

 
황위에 오른 바실리우스 2세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제국의 유력 귀족 가문들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특히 두 차례에 걸친 바르다스(Bardas)의 반란은 그의 통치를 위협했다.
 
  • 바르다스 스클레로스(Bardas Skleros, 920년대991)의 반란 : 976년부터 979년까지 이어진 이 반란은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의 치세에 동방 군대의 총사령관이었던 바르다스 스클레로스가 일으켰다. 스클레로스는 탁월한 군사적 재능으로 정부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고 콘스탄티노플 근처까지 진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실리우스 2세는 숙적인 바르다스 포카스(Bardas Phokas the Younger, 940년경989)를 불러들여 스클레로스에 맞서게 했고, 결국 스클레로스는 패배하여 아랍으로 망명해야 했다.
  • 바르다스 포카스(Bardas Phokas the Younger, 940년경989)의 반란 : 스클레로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일조했던 바르다스 포카스는 987년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포카스 가문은 비잔틴 제국 내에서도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가문이었고, 포카스 또한 유능한 장군이었다. 그는 반란 초기에 성공을 거두었으나, 989년에 오론테스 강 전투(Battle of the Orontes)에서 바실리우스 2세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사망했다. 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바실리우스 2세는 키예프 루스(Kievan Rus')의 대공 블라디미르 1(Vladimir the Great, 9581015)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그 대가로 여동생 안나(Anna Porphyrogenneta, 9633131011)를 블라디미르에게 시집보내야 했다. 블라디미르는 이를 통해 기독교(동방 정교회)로 개종하고 러시아 지역의 정교회 전파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두 차례의 대규모 반란을 직접 지휘하며 진압함으로써, 바실리우스 2세는 제국 내부의 강력한 귀족 세력들을 약화시키고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를 확고히 구축할 수 있었다. 이 경험은 그에게 귀족에 대한 깊은 불신을 심어주었으며, 평생 결혼하지 않고 후계자를 두지 않게 만들었다.
 

4. ‘불가리아인의 학살자’ : 불가리아 정복 전쟁

 
내부의 적들을 제압한 바실리우스 2세는 이제 비잔틴 제국의 오랜 숙적이었던 불가리아 제1제국(First Bulgarian Empire)과의 전쟁에 집중했다. 그의 오랜 불가리아 원정은 거의 30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해 그는 불가리아인의 학살자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을 얻게 되었다.
 
불가리아의 황제 사무엘(Samuel of Bulgaria, 생몰년 미상)은 한때 발칸반도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며 비잔틴 제국에 큰 위협이 되었다. 바실리우스 2세는 사무엘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 매년 불가리아 원정을 감행하며 불가리아군을 지치게 만들었다.
 
결정적인 전투는 1014년 클레이디온 전투(Battle of Kleidion)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바실리우스 2세는 불가리아군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겼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포로로 잡은 불가리아 병사들 15,000명 중 100명당 한 명만 남겨두고 나머지의 눈을 멀게 했다. 단 한 명에게만 한쪽 눈을 남겨두어 동료들을 이끌고 돌아가게 했다는 이야기는 불가리아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사무엘 황제는 이 광경을 보고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 잔혹한 승리 이후, 바실리우스 2세는 불가리아인의 학살자로 불리게 되었다. 1018, 그는 마침내 불가리아를 완전히 정복하고 비잔틴 제국의 주로 편입시켰다. 이로써 발칸반도에서의 비잔틴 제국의 패권은 확고해졌다.
 

5. 내치와 재정 정책

 
바실리우스 2세는 탁월한 군사적 재능 외에도 현명한 내치로 제국을 안정시켰다. 그는 특히 소농민들을 보호하는 정책을 펼쳤다. 귀족들이 토지를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강력한 법률을 제정하고, 소농민들의 세금 부담을 줄여주었다. 이러한 정책은 제국의 기반이 되는 소농민층의 삶을 안정시키고, 그들이 군대의 주요 병력을 제공하는 원천이 되도록 유지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끊임없는 전쟁에도 불구하고, 소농민들에게는 상대적인 번영의 시기였다. 그는 또한 토지를 측량하고 재정 지도를 만드는 등 효율적인 세금 징수 시스템을 구축하여 제국의 재정 기반을 강화했다.
 

6. 대외 관계와 제국의 확장

 
바실리우스 2세는 불가리아 외에도 제국의 다양한 국경에서 활발한 군사 활동을 펼쳤다.
 
  • 동부 전선 : 파티마 왕조(Fatimid Caliphate)의 시리아 침공에 대응하여 동방으로 진군하여 제국의 영토를 방어하고 확장했다. 특히 999년에는 중요한 도시들을 탈환하고 시리아 북부에서의 비잔틴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 캅카스 지역 : 이베리아(Iberia)와 아르메니아(Armenia) 지역에서도 활발한 군사 활동을 벌였다. 조지아(Georgia)의 국왕 바그라트 4(Bagrat IV, 10181072)를 비잔틴의 봉신으로 삼아 캅카스 지역에 대한 제국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 남부 이탈리아 : 비잔틴의 전통적인 영토였던 남부 이탈리아에서도 이슬람 세력과 롬바르드(Lombards) 세력을 견제하며 제국의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제국의 전례 없는 군사적 위업을 달성하여 바실리우스 제국(Basil's Empire)’으로 불릴 만한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다.
 
AD. 1025년, 바실리우스 2세 죽음 당시 비잔틴 제국
AD. 1025바실리우스 2세 죽음 당시 비잔틴 제국
 

7. 개인적인 삶과 죽음

 
바실리우스 2세는 독신으로 살며 후계자를 두지 않았다. 그는 거의 모든 시간을 군사 원정에서 보냈으며, 간소한 생활을 했다. 그의 평생의 목표는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의 모습은 현대 시대에 황제로서 보다는 노회하고 강력한 야전 사령관의 모습으로 인식될 정도이다.
 
바실리우스 2세는 10251215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 이후, 그의 동생 콘스탄티노스 8세가 단독 황제가 되었다. 바실리우스는 본래 자신의 이름을 딴 궁정 내 교회의 세부 건축물에 매장될 예정이었으나, 결국 자신의 주요 군사적 업적이자 비잔틴 제국의 동부 방벽을 상징하는 헤브루스 강(Hebros River) 근처의 교회에 안장되었다. 그는 정복자로서의 자신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불가리아인의 학살자 바실리우스라는 별명을 명확히 기재해달라고 요구했다고 전해진다.
 

8. 유산과 역사적 평가

 
바실리우스 2세는 비잔틴 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그의 통치 기간은 비잔틴 제국의 황금기로 불릴 만큼 군사적, 정치적 안정과 번영을 이루었다. 그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뛰어난 전략적 통찰력으로 제국을 통합하고 확장했다. 비록 그의 잔혹한 불가리아 정복 방식 때문에 불가리아인의 학살자라는 논쟁적인 별명을 얻었지만, 이는 동시에 그의 강력한 지도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의 죽음 이후 비잔틴 제국은 한동안 그의 업적에 힘입어 전성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오늘날에도 강인한 의지와 흔들림 없는 리더십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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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바실리우스 2세의 초상화 :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AD.1025년 비잔틴 제국 지도 : Wikimedia Commons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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