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라클로나스(Heraclonas, AD.626~642) : 동로마 제국 제67대 공동 황제(AD.641)
- Heraclius [Ancient Greek : Ἡράκλειος / romanized : Hērákleios]
- Heraclonas/Heracleonas [Greek : Ἡρακλ[ε]ωνᾶς / romanized : Hērákl[ei]onas]
- Heraclius II
- 출생 : 626년 / 라지카(Lazica)
- 사망 : 642년 / 로도스(Rhodes)
- 부친 : Heraclius
- 모친 : Martina
- 재위 : 641년
Caesar : 632년 1월 1일 ~ 638년 7월 4일
대관식 : 638년 7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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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로나스(Heraclonas, AD.626~642) : 동로마 제국 제67대 공동 황제(AD.641) |
찰나의 황제 : 로마의 카이사르 헤라클로나스의 비극적인 삶 (641)
7세기 중반의 동로마 제국은 격동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헤라클리우스(Heraclius, 575경 – 641) 황제가 사산조 페르시아(Sasanian Persia)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며 제국을 구했지만, 곧이어 이슬람 세력의 거대한 물결이 중동 지역을 휩쓸기 시작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과도기에 등장하여 불과 몇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황제로 재위했던 비운의 인물이 바로 헤라클로나스(Heraclonas, 626 – 642)이다. 그의 삶은 로마 제국의 불안정한 황위 계승과 궁정 내 암투의 잔혹한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1. 헤라클로나스의 탄생과 기이한 가족 관계
헤라클로나스는 626년에 로마 제국의 외곽 지역, 즉 소피아나이(Sophianae)의 교외 궁전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아버지와 같은 헤라클리우스(Heraclius)였다. ‘헤라클로나스’ 또는 ‘헤라클레오나스’는 애칭이었고, 간혹 ‘헤라클리우스 2세’라고도 불렸다 .
그의 부모는 로마 역사상 가장 특이한 황실 부부 중 하나였다. 아버지는 위대한 황제 헤라클리우스였고, 어머니는 헤라클리우스의 조카이자 두 번째 아내인 마르티나(Martina)였다. 이들의 결혼은 근친혼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교회와 대중의 강력한 반감을 샀다. 헤라클로나스는 헤라클리우스가 페르시아 원정 중이던 시기에 태어났는데, 이는 그의 어린 시절부터 제국의 혼란스러운 상황과 함께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황족으로서 장차 제국의 중요한 역할을 맡을 인물로 성장했다.
2. 공동 황제로서의 대관식 : 불안정한 동거 시작 (641년 2월)
아버지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자신의 사후 제위 계승 문제로 인한 혼란을 막기 위해 유언을 남겼다. 그는 자신의 두 아들, 즉 첫 번째 부인에게서 얻은 아들 콘스탄티누스 3세(Constantine III, 612–641)와 두 번째 부인 마르티나에게서 얻은 아들 헤라클로나스가 공동으로 제국을 통치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이 유언은 마르티나에게도 ‘어머니이자 황후’로서 궁정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641년 2월, 헤라클리우스가 사망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콘스탄티누스 3세와 헤라클로나스는 모두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 당시 헤라클로나스의 나이는 15세였다. 이 즉위식은 마르티나가 실질적인 국정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지만, 두 황제의 즉위 자체는 큰 충돌 없이 이루어졌다. 헤라클로나스는 638년 7월 4일에 ‘카이사르(Caesar)’로 대관식을 치렀고, 이때 이미 639년의 집정관(Roman Consul)이 되었다. 이는 그가 이미 공식적인 후계자로서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처럼 한 명은 전 황제의 장남이고, 다른 한 명은 전 황후의 아들이자 어린 황제였기에, 명목상 공동 통치였지만 두 황제 사이, 그리고 마르티나 황후와의 관계는 처음부터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3. 단독 황제로서의 짧은 치세 : 마르티나의 섭정 아래 (641년 5월-10월)
두 황제의 불안정한 동거는 오래가지 못했다. 공동 황제로 즉위한 지 불과 3개월 만인 641년 5월, 콘스탄티누스 3세가 사망했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그의 사인은 폐결핵(tuberculosis)이었다. 그러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둘러싸고 계모 마르티나에 의한 ‘독살설’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마르티나가 자신의 아들 헤라클로나스를 유일한 황제로 만들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 3세의 죽음으로 헤라클로나스는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어린 나이였기에, 그의 어머니 마르티나가 섭정으로서 제국의 실권을 쥐게 되었다. 마르티나는 자신의 아들 데이비드(David, 또는 티베리우스 Tiberius)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는 등 권력의 공고화를 시도했다.
마르티나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국정을 이끌었지만, 그녀에 대한 대중의 반감은 극에 달했다. 그녀가 근친혼을 통해 황후가 되었다는 점,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3세의 죽음에 대한 독살 의혹이 제기되면서 그녀에 대한 불신과 증오가 커져갔다.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시민들과 원로원은 마르티나의 통치에 대해 격렬한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4. 제논의 복귀와 바실리스쿠스의 비극적 최후 (476)
641년은 로마 역사상 ‘네 명의 황제의 해(Year of the Four Emperors)’로 불릴 만큼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헤라클로나스가 단독 황제가 되었지만, 그의 통치는 반년도 채 지속되지 못했다. 혼란을 틈타 콘스탄티누스 3세의 충신이자 장군이었던 발렌티누스(Valentinus)가 반란을 일으켰다. 발렌티누스는 콘스탄티누스 3세의 아들인 콘스탄스 2세(Constans II, 630–668)를 지지하며 마르티나와 헤라클로나스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시민들과 원로원은 마르티나와 헤라클로나스에게 등을 돌리고 발렌티누스와 콘스탄스 2세에게 지지를 보냈다. 결국 641년 10월 또는 11월, 헤라클로나스는 발렌티누스의 군대에 의해 폐위당하고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비극적인 운명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로마 황족들 사이에서 벌어지던 권력 다툼의 잔혹한 관례처럼, 헤라클로나스는 신체를 훼손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그의 코가 잘렸으며, 강제로 제국에서 추방되어 로도스(Rhodes) 섬으로 유배되었다. 로도스로 유배된 그는 이듬해인 642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15세 또는 16세였다. 그의 짧고 비참한 삶은 로마 제국 황실 내부의 권력 투쟁이 얼마나 무자비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5. 헤라클로나스의 비극이 남긴 역사적 의미
헤라클로나스는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가장 짧은 기간 황제로 재위했던 인물 중 한 명이자, 가장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황족 중 하나이다. 그의 통치는 제국의 안정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지만, 7세기 로마 제국의 복잡하고 격동적인 시대를 상징하는 중요한 인물로 남아 있다.
- 헤라클리우스 왕조의 혼란 : 헤라클리우스가 사산조 페르시아로부터 제국을 구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후 황위 계승 문제로 인한 극심한 혼란은 왕조의 불안정한 기반을 드러냈다.
- 권력 암투의 희생양 : 헤라클로나스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벌어진 권력 암투의 희생양이었다. 그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 마르티나의 야망과 당시 궁정 실력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의 운명이 좌우되었다.
- 제국의 취약성 : 그의 치세는 제국이 내부 권력 다툼과 외부의 새로운 위협(이슬람 세력의 부상)이라는 이중고 속에서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보여준다.
- 잔혹한 궁정 문화 : 황족에 대한 신체 훼손은 당시 동로마 제국 황실의 잔혹한 정치 문화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이다. 이는 황위의 불안정성과 함께 황실 내부의 생존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증명한다.
헤라클로나스의 짧은 삶과 비극적인 죽음은 로마 제국이 겪었던 격동의 시기를 생생하게 증언하며, 권력의 달콤함 뒤에 숨겨진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이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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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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