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 티베리우스 (David Tiberius, AD.630~642) : 동로마 제국 제67대 공동 황제(AD.641)
- David [Greek : Δαυίδ]
- 출생 : 630년 11월 7일
- 사망 : 미상
- 재위 : 641년
- 부친 : Heraclius
- 모친 : Martina
- 재위 :
Caesar : 638년 7월 4일 ~ 641년 9/10월
Augustus : 641년 9/10월 ~ 11월
비극적인 황족 : 동로마 제국의 카이사르 다비드의 짧고 슬픈 삶
7세기 초, 동로마 제국은 사산조 페르시아(Sasanian Persia)와의 길고 힘든 전쟁을 막 끝내고 새로운 질서를 찾아가고 있었다. 제국을 위기에서 구해낸 위대한 황제 헤라클리우스(Heraclius, 575경 – 641)는 자신의 사후 제위 승계가 안정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의 복잡한 가족 관계와 권력 다툼은 오히려 예측할 수 없는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이러한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짧고 비참한 운명을 맞이한 황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아들이자 잠시 로마의 ‘카이사르(Caesar)’였던 다비드(David, 630–642)이다. 그의 삶은 로마 제국 황실의 잔혹한 권력 투쟁과 불안정한 승계 원칙을 여실히 보여준다.
1. 다비드의 탄생과 특별한 이름 (630년)
다비드는 서기 630년 11월 7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동로마 제국을 통치하던 황제 헤라클리우스였고, 어머니는 헤라클리우스의 두 번째 아내이자 그의 조카인 마르티나(Martina) 황후였다. 이들의 결혼은 당시 로마 사회와 교회로부터 근친혼이라는 비판과 반감을 샀다. 마르티나는 헤라클리우스와의 사이에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그중 대부분은 병약하거나 영아기에 사망했다. 다비드가 태어날 당시 제국은 페르시아와의 전쟁으로 혼란스러웠으며, 헤라클리우스와 마르티나 부부는 다비드가 태어나던 해 초 예루살렘에 있었다.
다비드의 이름은 황실 자녀에게 흔히 사용되는 이름이 아니었다. 다른 형제자매들이 전통적인 황실 이름을 받은 반면, ‘다비드’라는 이름은 고대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자 전사인 성경 속 다비드 왕과 황실을 연결하려는 상징적인 의도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흥미롭게도,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629년 또는 630년에 다비드 왕의 일생을 묘사한 은 접시 세트인 ‘다비드 접시(David Plates)’를 제작했는데, 이 접시들은 소년 다비드 왕의 모습을 담고 있어 어린 황자 다비드를 위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예술사학자들은 추정한다. 다비드는 로마식 이름으로 ‘티베리우스(Tiberius)’로도 불렸다.
2. 카이사르로의 승격 : 제위 승계 안정화 노력 (638년)
다비드의 아버지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제국의 미래를 걱정하며 제위 승계를 안정화시키려 노력했다. 638년 7월 4일,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다비드를 ‘카이사르(Caesar)’로 임명했다. 이는 ‘데스포테스(despotes)’라는 이전의 명예 칭호보다 높은 지위였다. 같은 날, 다비드의 형인 헤라클로나스(Heraclonas)는 ‘카이사르’에서 ‘공동 황제(co-emperor)’로 승격되었다 .
이러한 행사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궁 내 스테파노스 예배당(chapel of Saint Stephen)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당시 의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인 『의례의 서(De Ceremoniis)』에 따르면, 헤라클로나스의 황제관이 제거되고 같은 황제관이 다비드의 머리에 씌워지는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이어서 ‘다비드 카이사르, 승리하기를(David Caesar, tu vincas)’이라는 라틴어 구호가 울려 퍼졌는데, 이는 로마 제국의 유산을 상기시키는 중요한 의례였다.
역사가들은 이 의례가 황실 내부의 긴장을 완화하고, 헤라클리우스의 가족을 백성들에게 이상적인 모습으로 보여주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평가한다. 이로써 다비드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주요 승계 라인에 공식적으로 편입되었다. 이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볼 수 없었던 다수의 황자들이 동시에 황족 칭호를 받는 보기 드문 상황이었다.
3. 헤라클리우스의 죽음과 계승 투쟁 (641년)
641년 2월 11일,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사망하자 제국은 다시금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헤라클리우스는 유언으로 자신의 두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3세(Constantine III, 612–641)와 헤라클로나스가 공동으로 제국을 통치하고, 어머니 마르티나에게도 ‘황후이자 어머니’로서의 궁정 내 지위를 부여했다. 당시 다비드의 나이는 10세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즉시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고, 황실 내부에서는 치열한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마르티나 황후는 이전부터 헤라클리우스와의 근친혼과 야심적인 성향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들을 황제 자리에 확실히 앉히기 위해 헤라클리우스에게 압력을 가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공동 황제 콘스탄티누스 3세와 헤라클로나스, 그리고 조카 콘스탄스 2세(Constans II, 630–668) 사이의 힘겨루기 속에 마르티나가 실질적인 섭정 역할을 수행했다. 마르티나는 자신의 아들들, 즉 헤라클로나스와 다비드를 권력의 중심에 두려 했고, 이는 콘스탄티누스 3세의 지지자들과 충돌을 야기했다. 제국은 동쪽에서는 이슬람 제국의 침략(이집트 점령)에 시달리고 있었고, 내부에서는 기독론 논쟁(단성론)과 같은 종교적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다.
4. 짧은 공동 통치와 비극적인 몰락 (641년-642년)
결국 다비드(티베리우스)는 자신의 형 헤라클로나스와 조카 콘스탄스 2세와 함께 공동 황제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이는 아마도 복잡한 권력 균형 속에서 다비드의 지위를 인정하여 마르티나의 세력을 일부 수용하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공동 통치 또한 순탄하지 못했다.
641년 5월, 콘스탄티누스 3세가 사망하자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계모 마르티나에 의한 독살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의혹은 마르티나와 그녀의 아들들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극대화시켰다. 이사벨 디오니스오풀로(Isabel Dionysopoulou)는 마르티나의 통치 야욕이 대중에게 ‘위협적이고 금기시되는’ 것으로 여겨졌다고 썼다.
결국 642년 1월경,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은 마르티나의 통치에 반기를 들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으로 인해 마르티나는 권력에서 축출되었고, 그녀의 아들들인 헤라클로나스와 다비드(티베리우스) 또한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다.
마르티나와 그녀의 아들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마르티나는 혀가 잘리고, 그녀의 아들들(헤라클로나스와 다비드)은 코가 잘리는 잔혹한 신체 훼손을 당한 후 로도스(Rhodes) 섬으로 유배되었다. 이는 고대 로마에서 정치범에게 행해지던 ‘비잔티움식 정치적 절단(Byzantine political mutilation)’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후 다비드(티베리우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와 그의 가족이 로도스 섬에서 평화롭게 남은 생을 보냈을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이는 불확실한 부분이다.
5. 다비드의 비극적 운명이 남긴 의미
다비드의 삶은 헤라클리우스 왕조의 복잡한 권력 투쟁과 비극적인 말년을 상징한다. 그는 제국의 안정을 위해 황제에게 부여되었으나, 결국은 불안정한 권력 다툼의 희생양이 되었다.
- 권력의 무상함 :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이름과 황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황자가, 결국 정치적 암투 속에서 신체가 훼손당하고 기록 속에서 사라진 것은 권력의 무상함과 잔혹성을 보여준다.
- 제위 승계의 혼란 : 헤라클리우스가 제위 승계를 안정화하려던 노력이 오히려 더 큰 혼란을 야기한 것은 로마 제국의 고질적인 계승 문제를 드러낸다. 여러 황족에게 권력을 분산시킨 것이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켰다.
- 황실 내부의 어두운 그림자 : 근친혼으로 인한 대중의 반감, 계모와 이복형제 간의 치열한 암투, 그리고 황족에 대한 신체 훼손과 유배는 로마 황실 내부의 어두운 면모를 여실히 드러낸다.
- 시대적 전환의 상징 : 다비드의 치세는 로마 제국이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마치고, 이슬람 세력의 부상이라는 새로운 위협에 직면하는 과도기였다. 그의 비극적인 삶은 이러한 대변혁기 로마 제국의 불안정한 운명을 반영한다.
다비드는 비록 짧은 기간 제위에 머물렀고 직접적인 업적은 없었지만, 그의 삶과 죽음은 7세기 로마 제국의 혼란과 권력의 속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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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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