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디아누스 2세(Gordian II, AD.c.192~238) : 로마 제국 제26대 공동황제(AD.238)
고르디아누스 2세, 아프리카에서 솟구친 ‘여섯 황제의 해’의 불꽃
고르디아누스 2세(Gordian II, 약 192~238)는 238년 봄 아프리카에서 부친 고르디아누스 1세(Gordian I, 약 158~238)와 함께 공동 황제에 오른 로마의 단명 군주이다. 그의 재위는 대략 3~4월 사이로 매우 짧았고, 카르타고 인근 전장에서 전사하며 막을 내렸다. 이 짧은 통치는 238년, 이른바 ‘여섯 황제의 해’라 불린 정국의 격변을 촉발하고 가속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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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디아누스 2세(Gordian II, AD.c.192~238) : 로마 제국 제26대 공동황제(AD.238) |
출생과 가문, 이름이 말해주는 배경
그의 본명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Marcus Antonius Gordianus)이며, 부친은 고르디아누스 1세이다. 3세기 초 로마 지배층의 복잡한 혈통 사회에서 ‘안토니우스’ 계열의 노멘을 지닌 이름 구성은 시민권과 가문의 전승을 암시한다. 사망은 238년 4월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의 카르타고에서 일어났고, 이 기록은 그의 생애가 아프리카 속주와 긴밀히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 .
공동 즉위의 순간, 238년 봄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일
막시미누스 트락스(Maximinus Thrax, 약 173~238)의 군영 중심 통치가 제국 곳곳에서 반발을 낳던 238년, 아프리카에서 부자(父子) 공동 즉위가 이루어졌다. 고르디아누스 2세는 즉위와 함께 황실 명칭을 갖춘 정식 군주명을 사용하며 합법성을 선전했고, 로마와 속주 엘리트의 지지를 끌어내려는 시도를 병행하였다. 그의 재위 기간은 “c. March–April 238”으로 정리되며, 선임자는 막시미누스 트락스, 후임은 원로원이 추대한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로 이어졌다.
카르타고의 패전과 최후, 짧았으나 진로를 바꾼 죽음
고르디아누스 2세는 카르타고 인근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전장 선택과 병참, 군단의 전투력 차이는 아프리카 현지의 세력 균형을 단숨에 바꾸었고, 부친 고르디아누스 1세의 자결로 부자 공동 정권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이 패전은 곧바로 정국의 반전으로 이어져, 로마에서는 공동 황제 체제와 새로운 합의 구도가 모색되었다는 점에서 정치적 파급력이 컸다.
전임ㆍ후임의 연쇄, ‘여섯 황제의 해’의 한 축
238년의 황위 계승선은 특이했다. 막시미누스 트락스를 전임으로, 고르디아누스 부자를 거쳐 푸피에누스(Pupienus)와 발비누스(Balbinus)의 공동 즉위, 그리고 고르디아누스 3세(Gordian III)로 이어지는 장면이 짧은 시간에 연출되었다. 이 연쇄는 3세기 위기 초입의 권력 작동 원리, 즉 병영과 원로원, 속주 엘리트가 서로 다른 합법성을 내세워 경쟁하던 구조를 응축하여 보여준다.
군주명과 칭호, ‘아프리카누스’가 새겨진 정치 언어
그의 정식 군주명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셈프로니아누스 로마누스 아프리카누스 아우구스투스”(mperator Caesar Marcus Antonius Gordianus Sempronianus Romanus Africanus Augustus)로 전한다. 이 칭호는 혈연ㆍ도시ㆍ속주 정체성을 결박하여 선전하는 3세기 황제 명명 관행을 잘 보여주며, 특히 ‘아프리카누스’ 표기는 권력 기반의 지리적 상징을 명시적으로 호출하는 장치로 해석된다.
명목과 현실의 간극, ‘속주 반란의 황제’가 던진 과제
고르디아누스 2세는 속주에서 솟구친 반권력의 상징이었고, 재위의 짧음은 곧 군사력·재정·병참을 갖춘 정규군의 압도적 우위를 재확인시켰다. 동시에 그의 즉위와 패전은 원로원과 도시 엘리트의 정치적 결집을 촉발했고, 로마 중심의 합의 정치를 복원하려는 시도를 불러왔다. 그가 실패한 자리에서 정치는 새로운 경로를 모색했고, 그 결과가 공동 황제 체제와 후일의 고르디아누스 3세였다.
‘여섯 황제의 해’의 지형도, 어디에 놓였는가
원수정 말기에서 군인 황제기의 초입으로 넘어가는 경계에서, 238년은 제도와 무력의 충돌이 표면화한 해였다. 고르디아누스 2세의 등장은 병영 권력 일변도의 체제에 균열을 내는 계기였고, 원로원파가 ‘정치적 상징’을 자산으로 재결집하는 서막이었다. 연표 속 이름들의 빠른 교체는 제국의 합법성이 더 이상 단일한 경로로 유지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사료가 남긴 핵심 사실의 정리
- 재위 시점은 238년 3~4월로 정리된다.
- 선임자는 막시미누스 트락스이며, 후임은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이다.
- 부친은 고르디아누스 1세이며, 사망지는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의 카르타고이다.
- 군주명에는 아프리카 정체성을 드러내는 요소가 포함된다. 위 항목은 비문ㆍ주화ㆍ전기류가 교차 확인하는 골자이다.
연표로 보는 고르디아누스 2세의 238년
- 238년 3월 전후 : 아프리카에서 부친과 공동 즉위.
- 238년 4월 : 카르타고 인근 전투에서 전사.
- 238년 이후 : 푸피에누스ㆍ발비누스 공동 즉위, 이어 고르디아누스 3세로 정국 수렴.
오늘의 역사로 읽는 의미, 짧음이 남긴 길이가 있다
아프리카에서의 부자(父子) 공동 즉위와 그의 전사가 원로원ㆍ속주 엘리트ㆍ병영 권력 사이의 힘의 균형을 흔들어, 그해 로마 정치가 단일한 병영 지지에서 다중의 경쟁ㆍ연합 구도로 급전환되는 출발점이 되었음을 가리킨다. 그는 속주 엘리트와 도시 시민이 병영 권력에 맞서 펼친 마지막 정치 실험의 얼굴이었고, 그 실패는 역설적으로 새로운 합의의 장치를 촉진하였다. 그의 이름은 패전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고, 로마가 무력과 제도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재구성할지 묻는 질문으로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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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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