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피에누스(Pupienus, AD.c.164~238) : 로마 제국 제27대 공동황제(AD.238)
로마 공동 황제 푸피에누스, 99일 통치가 남긴 정치의 단면
푸피에누스(Pupienus, 약 164~238)는 238년 ‘여섯 황제의 해’ 한가운데에서 원로원이 지명한 공동 황제로 즉위하여 단 99일 만에 프라이토리아누스 근위대의 손에 최후를 맞은 인물이다. 즉위와 퇴장의 속도가 비정상적이었지만, 그의 경력과 말로는 원로원 정치, 병영 권력, 도시 민심이 충돌하던 위기의 작동 방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재위 시점은 238년 4~5월경부터 7~8월경까지로 정리되고, 곁에는 공동 황제 발비누스(Balbinus, 생몰년 미상)가 있었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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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피에누스(Pupienus, AD.c.164~238) : 로마 제국 제27대 공동황제(AD.238) |
출신과 가문, ‘소(小) 귀족’의 경로
푸피에누스는 에트루리아의 볼테라에서 나온 비교적 신흥의 귀족층 출신으로 전한다. 부친을 마르쿠스 푸피에누스 막시무스, 모친을 클로디아 풀크라로 비정하는 설이 있으나, 일련의 족보 전승과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진술은 교차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이 현대 연구의 태도이다. 특히 그가 ‘세 곳의 프라이토리아 속주 총독’을 지냈다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기술은 관례와 맞지 않으며, 다른 사료의 확인 없이 채택하기 어렵다는 회의가 지배적이다.
군ㆍ행정 경력, 국경과 도성이 남긴 발자국
보결 집정관직 이후의 이력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복원된다. 그는 게르마니아 방면의 황제 대리(legate)로 재임하며 사르마티아와 게르만 부족에 대한 승리를 거두었고, 임무를 마친 뒤에는 아시아 속주의 프로콘술(민정 총독)을 배정받았다. 234년에는 두 번째 집정관직을 수행함과 동시에 로마 도시 장관(프라이펙투스 우르비)에 올라 강경한 치안 유지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이 ‘엄격함’은 대중적 비호감으로 되돌아오며, 훗날 수도 민심의 미묘한 균열로 이어졌다.
238년 정국의 한복판, 공동 황제의 등장
238년의 황제 교체는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전개되었다. 막시미누스 트락스(Maximinus Thrax, 약 173~238)와 아프리카의 고르디아누스 부자(Gordian IㆍII)의 격돌 뒤, 원로원은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를 공동 황제로 세웠다. 그들의 통치 상대는 6월까지 군영 권력을 틀어쥐고 있던 막시미누스였고, 뒤이어 정국은 고르디아누스 3세(Gordian III, 225~244)로 수렴되었다. 푸피에누스의 즉위ㆍ대응ㆍ교체가 모두 같은 해에 벌어졌다는 사실은, 원로원과 병영 권력의 합법성 경쟁이 정면충돌 국면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궁정의 불화와 도시의 혼란, 그리고 비극적 최후
공동 통치의 내부는 처음부터 매끄럽지 않았다. 발비누스는 수도의 치안 유지에 실패했고, 두 황제는 서로를 경계해 궁정의 별도 공간에서 생활했다. 프라이토리아누스 근위대는 원로원 지명 황제 아래에서 복무하는 것을 못마땅해 했고, 결국 쿠데타를 모의했다. 푸피에누스는 위기를 감지하고 발비누스에게 게르만 보디가드를 불러들이자고 요청했지만, 발비누스는 이를 암살 음모로 의심하며 거절했다. 언쟁이 고조되는 사이 근위대가 들이닥쳐 두 황제를 사로잡았고, 프라이토리아누스 진영으로 끌고 가 목욕탕에서 고문 끝에 살해하였다. 두 황제의 통치는 99일로 끝났다.
‘엄격함’과 ‘불인기’의 교차, 평판의 양면
푸피에누스의 도시 장관 시절 평판은 ‘엄격함’과 ‘불인기’라는 상반된 얼굴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그는 수도의 질서를 강경하게 바로잡으려 했으나, 민중과의 거리는 좁히지 못했다. 공동 통치기에 대중의 신뢰와 근위대의 불신이 동시에 악화된 배경에는, 이처럼 ‘치안의 성공’이 ‘정치적 자산’으로 전환되지 못한 구조적 문제가 있었다. 원로원 지명 황제라는 정통성의 한계가, ‘도성 민심’과 ‘병영 충성’을 견인하지 못한 결과였다.
가계와 후손, ‘영향력’의 잔상
푸피에누스의 가문은 짧은 정권과 별개로 일정한 위신을 이어갔다. 장남 티투스 클로디우스 푸피에누스 풀케르 막시무스는 235년 보결 집정관을 지내고 티부르(티볼리)의 후견인으로 활동했으며, 막내 마르쿠스 푸피에누스 아프리카누스 막시무스는 236년에 막시미누스 트락스와 동반 정식 집정관으로 이름을 올렸다. 딸 푸피에나 섹스티아 파울리나 케테길라 역시 저명 가문과 혼인해 연결망을 넓혔다. 집정관직이 연이어 배출되었다는 사실은, 가문이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에서 막시미누스에 이르는 격동의 교체기에도 높은 호의를 유지했음을 시사한다.
정치적 의미, ‘원로원-병영-민심’ 삼각구도의 파열
푸피에누스의 생애가 던지는 핵심 메시지는 간명하다. 원로원이 지명하고 법제의 외피를 갖춘 통치라 하더라도, 병영의 충성과 도성의 신뢰를 함께 얻지 못하면 제정 로마의 권력은 지속되기 어렵다. 238년의 사건 한가운데에서 그는 병영 권력을 제어할 장치를 갖추지 못했고, 민심을 결집할 도시 경영의 자본도 축적하지 못했다. 그 결과 공동 통치는 프라이토리아누스의 돌발적 폭력에 취약한 구조로 남아 있었고, 이는 곧 파국으로 이어졌다.
핵심 연표
- 약 164년경 : 에트루리아 볼테라 출신의 소(小)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 207년경 이후 : 게르마니아 방면 황제 대리로 복무하고 사르마티아ㆍ게르만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 아시아 속주 프로콘술을 역임하였다.
- 234년 : 두 번째 집정관과 함께 로마 도시 장관에 임명되어 강경한 치안을 시행하였다.
- 238년 4~5월경 : 발비누스와 공동 황제로 즉위하여 막시미누스와 대치하였다.
- 238년 7~8월경 : 프라이토리아누스의 거병으로 발비누스와 함께 피살되며 99일 통치가 종결되었다.
맺음말
푸피에누스의 99일은 실패담이면서도 교본이다. 원로원ㆍ병영ㆍ민심이라는 세 개의 기둥 가운데 하나라도 설득하지 못하면, 로마의 권력은 시간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 그의 강경한 치안과 단정한 경력은 제도적 정통성을 보완했지만, 병영 권력의 물리력과 도성의 집단 심리를 견인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바로 그 지점에서 238년의 정치적 비극은 발생했고, 그가 남긴 기록은 위기 시대 통치의 한계를 또렷이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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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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