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디아누스 1세(Gordian I, AD.c.158~238) : 로마 제국 제26대 황제(AD.238)
고르디아누스 1세, 22일의 황제와 ‘여섯 황제의 해’의 균열
고르디아누스 1세(Gordian I, 약 158~238)는 238년 봄, 라인 전선의 병영 권력이 로마의 합의 정치를 압도하던 격동 속에서 단 22일만 황좌에 머문 로마 황제이다.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의 지방 반란이 도화선이었고,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Gordian II, ?~238)와 공동으로 즉위했으나 누미디아의 역공 앞에서 곧 무너졌다. 전임자는 막시미누스 트락스(Maximinus Thrax, 약 173~238)였고, 그의 몰락 뒤 로마 정국은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의 공동 즉위, 그리고 손자 고르디아누스 3세(Gordian III, 225~244)로 이어지며 238년의 소용돌이를 마무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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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디아누스 1세(Gordian I, AD.c.158~238) : 로마 제국 제26대 황제(AD.238) |
출생과 가문, 이름이 말해주는 뿌리
그의 풀네임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고르디아누스 셈프로니아누스 로마누스이며, 프라이노멘과 노멘의 조합은 조상 대에 로마 시민권을 안토니우스 계열로부터 받았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고르디아누스’라는 코그노멘은 소아시아, 특히 갈라티아나 카파도키아 계통의 기원을 암시하며, 출생지는 소아시아 프리기아설이 유력하다. 원로원 명문과의 연관이 지목되지만, 혈연계보는 사료상 확정적이지 않다.
늦깎이 원로원 정치, 군·행정 현장에서 다져진 경력
그의 공직 경력은 비교적 늦게 본궤도에 올랐다. 원로원에 진입한 뒤 시리아 주둔 제4 스키티카 군단(Legio IV Scythica) 지휘를 맡았고, 216년에는 브리튼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엘라가발루스 치세에는 보결 집정관을 지냈으며, 브리튼에서 그의 이름이 새겨진 비문 일부가 지워진 흔적은 당시 황실과의 미묘한 불편을 암시한다. 화려한 원로원 연설가라기보다 현장 지휘와 속주 통치의 경험이 두터운 인물이었다.
문학과 공공오락, 정중동의 생활양식
젊은 시기부터 수사와 문학에 친숙했고, 시정(市政) 담당 치안관(aedile)으로 재직하며 장대한 경기와 연희를 열어 대중의 호감을 얻었다. 카라칼라(Caracalla, 188~217)를 기리는 서사시 ‘안토니니아스(Antoninias)’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필로스트라토스(Philostratus, ?~?)는 ‘소피스트 열전’을 그에게 혹은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에게 바친 것으로 전한다. 권모술수보다는 점잖은 품행으로 평판을 쌓은 점이 독특하다.
238년 3월, 아프리카에서 올라온 반전의 파도
막시미누스 트락스의 가혹한 과세와 병영 정치에 반발이 커지자, 아프리카 속주에서 고르디아누스 1세가 추대되었다. 그는 즉위 직후 고령을 이유로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를 공동 황제로 세워 정통성을 보강하였다. 카르타고 입성에서 시민과 지방 엘리트의 열띤 지지를 확인했고, 즉시 로마 원로원에 사절단을 보내 황제 인준을 요청하였다. 원로원은 새 정권을 승인했으며, 여러 속주가 발 빠르게 호응하였다.
로마로 향한 정면승부, 외교와 암살이 교차한 초단기 통치
그는 막시미누스 체제의 중추였던 프라이토리움 총관 푸블리우스 아이일리우스 비탈리아누스를 제거하려 첩자를 보냈고, 동시에 로마 정국을 움직일 교섭에 나섰다. 로마의 중견 귀족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후일의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특사로 내세운 선택은 원로원과 속주 엘리트를 포섭하려는 현실적 카드였다. 반란은 초기에는 성공적 기세를 보였으나, 결정타는 외부에서 날아들었다.
누미디아 총독 카펠리아누스의 역습과 카르타고 전투의 참패
이웃 속주 누미디아의 총독 카펠리아누스는 막시미누스에게 충성하며 즉각 반격에 나섰다. 그는 북아프리카 유일의 정규군단인 제3 아우구스타 군단(III Augusta)과 노련한 재편대를 이끌고 아프리카 속주로 진군하였다. 고르디아누스 2세는 급히 편성한 민병으로 맞섰으나 카르타고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아들의 전사 소식을 접한 고르디아누스 1세는 허리띠로 목을 맨 자결을 택하였고, 부자의 재위는 22일로 막을 내렸다.
최단 재위의 그림자, 그러나 정국은 그들의 이름으로 굴렀다
고르디아누스 1세의 재위는 제국 통사에서 최단 기록 중 하나로 꼽히며, 자결한 황제로는 69년 오토(Otho) 이후 처음이었다. 그러나 원로원이 이미 ‘고르디아누스의 대의’를 받아 든 이상, 반막시미누스 전선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곧 원로원은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해 정통성의 불씨를 살렸고, 연말 무렵에는 손자 고르디아누스 3세가 유일한 합의 황제로 인정되었다.
‘여섯 황제의 해’의 좌표
238년은 막시미누스 트락스, 고르디아누스 1ㆍ2세, 푸피에누스ㆍ발비누스, 고르디아누스 3세까지 여섯 명이 차례로 혹은 병립하여 황위를 주장한 해였다.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등장은 원로원과 속주 엘리트가 병영 권력에 맞서 마지막으로 집단 정치의 가능성을 시험한 장면이었고, 그 실패는 병영 정치가 중심축으로 이행하는 현실을 역설적으로 확인시켰다.
가계와 후손, 고르디아누스 왕조의 씨앗
그의 배우자는 확실치 않으며 ‘파비아 오레스틸라’ 설이 전하나 신빙성에는 논쟁이 있다. 자녀로는 공동 황제 고르디아누스 2세와 마이키아 파우스티나가 확인되며, 마이키아 파우스티나는 후일 황제 고르디아누스 3세의 외조모가 된다. 외가 측 계보에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혈통과 맞물린 설도 제기되나, 사료의 신빙성은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그의 가계가 238년의 혼란을 거쳐 손자의 즉위로 이어졌다는 흐름은 분명하다.
평판과 유산, 문학을 사랑한 노황제의 상징성
고르디아누스 1세는 문학과 학예를 사랑하고, 사사로운 계책을 멀리한 온화한 성품으로 기억된다. 그의 통치는 준비되지 않은 전쟁과 정규군의 압도적 우위에 무너졌지만, 원로원의 정치적 선택을 촉발하여 막시미누스 체제에 균열을 냈다. 로마의 집단 지성은 부자의 죽음 이후에도 그들의 이름으로 반기를 들었고, 이는 ‘정치적 상징’이 현실 권력을 움직이는 방식에 대한 흥미로운 사례로 남았다.
간단 연표
- 약 158년 : 소아시아(프리기아설 유력) 출생.
- 216년 : 브리튼 총독 재임.
- 엘라가발루스 치세 : 보결 집정관 역임.
- 238년 3~4월 : 아프리카에서 공동 즉위, 22일 재위 후 부자 동반 몰락.
- 238년 말 : 원로원 정국이 푸피에누스ㆍ발비누스 공동 즉위, 고르디아누스 3세로 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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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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