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에누스(Gallienus, AD.c.218~268) : 로마 제국 제34대 황제(AD.253~268)
갈리에누스(Gallienus, 약 218~268), 위기의 세기를 버틴 개혁 군주
갈리에누스는 253년부터 268년까지 로마 제국을 통치한 황제이다. 그는 즉위 직후 부친 발레리아누스(Valerian, 약 199~260)와 공동 통치를 시작하여 260년까지 동서 방면을 분담 운영하였고, 선임 황제는 에밀리아누스(Aemilianus, 약 207~253), 후임 황제는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Claudius Gothicus, 약 214~270)이다. 그의 치세는 외침과 반란, 역병이 반복된 3세기 위기의 한복판에서 군제 개편과 종교 관용 조치를 통해 질서 회복을 도모한 시기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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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에누스(Gallienus, AD.c.218~268) : 로마 제국 제34대 황제(AD.253~268) |
출생ㆍ가문과 즉위의 배경
갈리에누스의 본명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에그나티우스 칼리에누스이며, 출생은 대략 218년으로 전한다. 부친은 발레리아누스, 모친은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Egnatia Mariniana)로 기록된다. 그는 253년 9월 공동 황제로 즉위하여 부친과의 이중 통치 체제를 가동하였고, 이는 변방 압력과 내적 균열을 분담하여 관리하려는 현실적 선택이었다.
공동 통치의 운영과 권력 분담
갈리에누스는 253~260년에 발레리아누스와 공동 통치하였고, 260년 7월에는 아들 살로니누스(Saloninus)를 잠시 공동 황제로 세워 승계의 연속성을 시도하였다. 재위 배열은 에밀리아누스 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앞에 위치하며, 말년에는 이탈리아 메디오라눔에서 서거하였다. 이러한 연표는 군단 추대와 원로원 승인이라는 이중 합법성이 빠른 속도로 교차하던 시대적 맥락을 보여준다.
군제 개편과 ‘기동군’의 선례
갈리에누스는 제국 전역에 신속히 투입 가능한 기동 전력의 필요를 인식하고, 기병 중심의 코미타텐시스(comitatenses)를 상설화하는 방향으로 군제 개편을 추진하였다. 이는 후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가 확립한 이동군 체제의 선례로 평가되며, 국경선 방위와 중앙 기동군의 이중 구조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하였다.
원로원과 군 지휘의 재편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의 전승에 따르면, 그는 원로원이 야전 지휘관으로 나서는 관행을 제한하고 보다 신뢰할 수 있는 기사계급 지휘관을 중용하였다. 이 조치는 군의 전문성을 높여 통제력을 회복하려는 의도였고, 결과적으로 원로원 세력의 군사적 영향력은 축소되었다. 일부 연구는 이러한 흐름이 도미나투스 체제의 성립에 구조적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기독교에 대한 관용 조치
발레리아누스가 포로가 된 사건 이후 갈리에누스는 기독교인에게 예배당과 공동묘지를 반환하고 교회 재산을 인정하는 최초의 공식 관용 선언을 내렸다. 이 조치는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것은 아니었으나, 박해의 중단과 공동체의 법적 안정에 중요한 전기를 제공하였다. 종교ㆍ재산 질서의 복원은 전반적 사회 안정에도 기여하였다.
가계와 황후, 왕실 구성
배우자는 코르넬리아 살로니나(Cornelia Salonina)이며, 측실로 피파라(Pipara)가 전한다. 자녀로는 발레리아누스 2세(Valerian II), 살로니누스(Saloninus), 마리니아누스(Marinianus)가 기록된다. 이러한 왕실 구성은 허약한 정국 속에서 왕조적 연속성을 상징적으로 가시화하는 장치로 기능하였다.
말년과 승계, 그리고 치세의 의미
갈리에누스는 268년 9월 메디오라눔에서 사망하였고, 후임은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이었다. 그의 개혁은 ‘군의 기동력 강화’와 ‘지휘 체계의 전문화’라는 두 축에서 제국의 생존 역량을 끌어올렸고, 종교 관용은 사회적 갈등을 완화하는 완충 역할을 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3세기 위기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제국이 질서의 최소 기반을 지켜내는 데 기여하였다.
치세의 유산과 역사적 평가
군사 개혁과 원로원 군령권의 축소, 이동군의 제도화는 후대 구조 개편의 토대를 제공하였다. 남하ㆍ횡단하는 적에 대한 대응 속도를 높였고, 현장 판단력과 전문성을 갖춘 지휘관층을 부상시켰다. 동시에 상징ㆍ의전ㆍ법제의 복원을 병행하여 ‘정상성’의 이미지를 유지하려 한 점도 주목된다. 이러한 복합 개혁은 아우렐리아누스 등의 후속 군주가 제국을 수습하는 데 실질적 기반이 되었고, 갈리에누스를 도미나투스 형성에 기여한 군주로 자리매김하게 하였다.
연표로 보는 핵심 이정표
- 253년 9월 : 발레리아누스와 공동 황제로 즉위.
- 259/260년경 : 발레리아누스 생포 후 기독교 관용 조치를 단행하다.
- 260년 7월 : 살로니누스를 잠정 공동 황제로 세우다.
- 268년 9월 : 메디오라눔에서 사망하고,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승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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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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