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레리우스(Galerius, AD.c.258~311) : 로마 제국 제43대 공동황제(AD.293~311)
로마 제국의 동방 수호자, 갈레리우스 황제
- 갈레리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Galerius Valerius Maximianus)
- 그리스어 : Γαλέριος
- 출생 : 기원후 258년경
- 사망 : 기원후 311년 5월초
- 재위 :
Caesar : 기원후 293년 3월 1일 ~ 305년 5월 1일
Augustus : 기원후 305년 5월 1일 ~ 311년 5월초 - 공동통치 :
콘스탄티우스 1세(Constantius I, 305~306년) : 테트라르키아(4두정치 체제) 황제 중 한 명. 콘스탄틴 1세의 아버지.
세베루스 2세(Severus II, 306~307) : 콘스탄티우스 사후 서방에서 카이사르(부황제)로 지명됨.
콘스탄틴 1세(Constantine I, 306~311) : 나중에 ‘대제(Constantine the Great)’로 불림. 기독교 공인.
막센티우스(Maxentius, 306~311) : 로마에서 스스로 황제로 선포됨. 콘스탄틴과 대립.
막시미안(Maximian, 306~310) : 은퇴했던 전 황제 막시미아누스. 아들 막센티우스를 도우려다 다시 활동.
리키니우스(Licinius, 308~311) : 갈레리우스에 의해 황제로 임명됨. 이후 콘스탄틴과 협력 및 경쟁.
알렉산데르(Alexander, 308~311) : 아프리카에서 독자적으로 황제로 자칭함. 상대적으로 영향력 작음.
막시미누스 2세(Maximinus II, 310~311) : 동방의 황제. 갈레리우스 사후, 제국 동부에서 세력 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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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레리우스(Galerius, AD.c.258~311) : 로마 제국 제43대 공동황제(AD.293~311) |
1. 혼란 속 새로운 별, 갈레리우스 황제
기원후 3세기는 로마 제국에 끝없는 위기가 닥쳤던 시기다. 군인 황제들의 난립, 경제 혼란, 그리고 사방에서 밀려오는 이민족들의 침입은 제국을 심각한 불안정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로마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 황제가 사두정치 체제를 도입했고, 이 체제의 주요 기둥 중 한 명이 바로 갈레리우스(Galerius, 260년경~311년) 황제였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제국의 동방 국경을 수호했고, 로마 역사상 가장 가혹한 기독교 박해를 주도했으며, 동시에 죽음 직전에 종교적 관용을 선포한 복합적인 인물이다.
2. 군인의 삶, 황제의 길 : 초기 생애와 권력 장악
갈레리우스는 기원후 258년경 다뉴브 강 유역의 지역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지는 세르디카(Serdica) 근처이거나, 훗날 그가 어머니의 이름을 따 지은 팔릭스 로물리아나(Felix Romuliana, 오늘날 감지그라드)라는 궁전 근처일 수 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로물라(Romula)는 로마 제국의 다키아(Dacia) 지역 출신으로, 카르피족(Carpians)의 공격을 피해 다뉴브 강 남쪽의 신 다키아(Dacia Ripensis)에 정착했다. 그는 아버지의 직업을 따라 처음에는 목동 일을 했고, 이 때문에 ‘아르멘타리우스(Armentarius)’, 즉 목동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원래 그의 코그노멘(cognomen, 로마인의 성 중 하나)은 ‘막시미누스(Maximinus)’였으나, 카이사르(Caesar)가 된 후 ‘막시미아누스(Maximianus)’로 변경했다.
갈레리우스는 아우렐리아누스(Aurelian)와 프로부스(Probus) 황제 밑에서 군인으로 복무하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사두정치 체제를 수립했을 때, 그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와 함께 카이사르로 지명되었다. 이와 함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딸 발레리아(Valeria)와 결혼하며 황실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곧바로 일리리아(Illyria) 지방 통치권을 위임받았으며, 다뉴브 강을 따라 사르마티아족(Sarmatians)과 고트족(Goths)을 상대로 성공적인 군사 작전을 펼쳤다. 이후 이집트로 파견되어 반란 도시인 부시리스(Busiris)와 콥토스(Coptos)를 진압하기도 했다.
3. 동방의 수호자 : 페르시아와의 전쟁
갈레리우스는 제국의 동방 국경을 책임지며 사산 제국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참여했다. 296년경 페르시아와의 첫 전투에서는 로마군이 패배하며 그의 명성에 흠집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298년, 그는 심기일전하여 티그리스 강 상류에서 페르시아의 나르세(Narseh) 왕을 결정적으로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는 갈레리우스의 군사적 능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는 페르시아의 수도 크테시폰(Ctesiphon)을 약탈하고, 299년에 로마와 페르시아 사이에 ‘니시비스 조약(Treaty of Nisibis)’을 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조약으로 로마는 아르메니아(Armenia)와 이베리아(Iberia)에 대한 영향권을 확보하고 티그리스 강 건너편의 5개 사트라피(satrapies)를 획득했으며, 니시비스(Nisibis)가 유일한 교역소로 지정되는 등 로마에게 매우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냈다. 이 승리를 바탕으로 그는 성대한 개선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4. 사두정치 체제의 핵심 인물
사두정치 체제에서 갈레리우스의 위상은 점차 높아졌다. 그는 293년에 카이사르로 임명되어 동방 제국의 통치를 보조하다가,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퇴위하면서 동방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승격했다. 그는 동방의 군사, 행정 업무를 총괄하며 제국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통치 방식과 철학을 계승하여 제국의 권위를 신장시키려 노력했고, 사두정치 체제가 순조롭게 이행되도록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궁전인 감지그라드(Gamzigrad-Romuliana)는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웅장하고 중요한 건축물로 남아 있다.
5. 기독교 박해의 주동자
갈레리우스의 통치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기독교 박해였다. 그는 로마의 전통 종교를 굳게 믿었으며, 기독교를 제국의 단결과 안정을 해치는 위협적인 요소로 간주했다. 이러한 생각은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큰 영향을 미쳐 303년에 로마 역사상 가장 대규모적이고 조직적인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박해는 ‘대박해(Great Persecution)’로 불리며, 기독교인에 대한 가혹한 고문과 처형, 교회 파괴, 성경 소각 등이 전국적으로 자행되었다. 갈레리우스는 이 박해의 주요 주동자였으며, 그의 지독한 반기독교적 성향이 이 모든 탄압의 원동력이 되었다.
6. 권력 투쟁과 통치 후반기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스스로 퇴위하고 막시미아누스(Maximian)에게도 동반 퇴위를 강요하면서 갈레리우스는 동방의 새로운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통치는 순탄치 않았다. 서방에서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Maxentius)가 반란을 일으켜 황제를 자처했고, 갈레리우스는 이탈리아를 침공했지만 막센티우스의 능숙한 방어와 전직 황제 막시미아누스의 개입으로 큰 성과 없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308년 11월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카르눈툼(Carnuntum)에서 중요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갈레리우스는 리키니우스(Licinius)를 서방의 아우구스투스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를 그의 카이사르로 인정하는 결정을 이끌어냈다. 동방에서는 그가 아우구스투스를 유지하고 막시미누스 다이아(Maximinus Daia)를 카이사르로 두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곧 틀어졌다. 리키니우스의 승진에 불만을 품은 막시미누스 다이아도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요구했고, 막시미아누스 역시 콘스탄티누스에 대항하여 황제를 자처하는 등 여러 인물이 황제 자리를 주장하면서 제국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갈레리우스는 결국 다른 황제들의 영토를 침범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말년에는 펠소 호수(Lake Pelso, 오늘날 벌러톤 호수)의 대규모 벌목 및 배수 작업과 같은 공공 사업에 집중하며 시간을 보냈다.
7. 에디크툼 관용과 죽음, 그리고 유산
갈레리우스는 로마 역사에서 ‘대박해’를 주도한 인물로 기억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죽음 직전인 311년에 기독교에 대한 관용 칙령(Edict of Toleration)을 발표했다. 이는 혹독한 질병으로 고통받던 그가 기독교인들의 기도에 응답하기 위해 혹은 정치적 현실을 인정한 결과로 해석된다. 이 칙령은 기독교 박해를 공식적으로 종식시켰고, 2년 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발표하는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의 전조가 되었다.
갈레리우스는 311년 5월에 고통스러운 질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사두정치 체제의 균형을 무너뜨렸고, 이후 막시미누스 다이아, 리키니우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1세 간의 치열한 권력 다툼으로 이어졌다. 갈레리우스는 로마의 위기 시기에 군사적 역량으로 제국 안정에 크게 기여했지만, 그의 가혹한 기독교 박해와 복잡한 권력 투쟁은 그의 통치를 논쟁의 대상으로 남겨두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과 업적은 로마 제국이 4세기 이후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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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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