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 AD.c.250~306) : 로마 제국 제43대 공동황제(AD.293~306)
로마 제국의 서방 수호자,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황제
-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Flavius Valerius Constantius)
- 콘스탄티우스 1세(Constantius I)
- 출생 : AD. c.250년 3월 31일
- 사망 : AD. 306년 7월 25일
- 재위 :
Caesar : 기원후 293년 3월 1일 ~ 305년 5월 1일
Augustus : 기원후 305년 5월 1일 ~ 306년 7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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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 AD.c.250~306) : 로마 제국 제43대 공동황제(AD.293~306) |
1. 혼돈의 시대, 새로운 리더의 등장
기원후 3세기는 로마 제국에게 ‘3세기의 위기’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격동과 혼란의 시기였다. 끊임없는 내전과 빈번한 황제 교체, 그리고 제국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반란과 외적의 침입은 로마를 심각한 위기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제국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 황제는 사두정치(Tetrarchy)라는 혁신적인 통치 시스템을 고안했다. 이 체제 속에서 제국의 서방을 책임지고 강력한 군사적 기반을 다진 인물이 바로 플라비우스 콘스탄티우스(Flavius Constantius), 즉 콘스탄티우스 1세다. 그는 흔히 ‘클로루스(Chlorus)’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창백한’이라는 뜻의 그리스어로, 비잔틴 시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으며 정작 황제 본인의 생전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2. 미천한 출신에서 군사 리더로 성장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기원후 250년경 모에시아 수페리어(Moesia Superior) 지역의 비교적 미천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초기 생애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일리리아 출신 군인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군대 내에서 빠르게 승진했다. 아우렐리아누스(Aurelian) 황제 치하에서는 ‘프로텍토레스 아우구스티 노스트리(Protectores Augusti Nostri)’라는 황제의 근위대에서 복무했으며, 카루스(Carus) 황제 시대에는 군대 내 고위직인 ‘트리부누스(tribunus)’를 거쳐 달마티아(Dalmatia) 지방의 총독인 ‘프라에세스(praeses)’까지 올랐다.
그는 285년 7월 마르구스 전투(Battle of the Margus)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카루스의 아들 카리누스(Carinus)를 물리치고 황제에 오르기 직전,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지지하며 충성 맹세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286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막시미아누스(Maximian)를 서방의 공동 황제(아우구스투스)로 임명했을 때,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막시미아누스 휘하에서 서방 프라이토리아니 파견대장(Praetorian Prefect)으로 임명되며 제국 최고위층으로 진입했다. 막시미아누스와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그는 막시미아누스의 딸 테오도라(Theodora)와 결혼했다. 그는 287년부터 288년까지 라인 강과 다뉴브 강을 따라 게르만 부족인 알라마니족(Alamanni)과 맞서 싸우며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선보였다.
3. 카이사르로의 승격과 서방 제국의 수호
293년 3월 1일,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의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사두정치 체제를 공식적으로 출범시키며, 자신과 막시미아누스 아래 두 명의 카이사르(Caesar)를 임명했다.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막시미아누스의 부황제로서 서방의 카이사르로 지명되었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부황제로는 갈레리우스(Galerius)가 임명되었다. 이로써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갈리아(Gaul), 브리타니아(Britannia), 히스파니아(Hispania)를 포함하는 서방 영토의 군사 및 행정 책임자가 되었다. 그의 주된 역할은 브리타니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카라우시우스(Carausius)와 그의 후계자를 진압하고, 라인 강 국경을 안정화하는 것이었다.
4. 브리타니아 탈환과 군사적 업적
카이사르로 임명된 직후,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서방 제국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였던 브리타니아 반란 진압에 집중했다. 카라우시우스가 브리타니아와 북부 갈리아를 장악하고 독립을 선언한 상황이었다. 293년,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먼저 북부 갈리아의 거점인 불로니아(Bononia, 오늘날 불로뉴쉬르메르)를 포위하여 카라우시우스의 세력을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카라우시우스는 자신의 부하 알렉투스(Allectus)에게 살해당했으나, 반란은 알렉투스에 의해 계속되었다.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295년까지 프랑크족(Franks)과 알라마니족(Alamanni) 등 라인 강 유역의 위협을 제압하며 영국 해협을 건널 준비를 했다. 296년, 그는 두 개의 함대를 편성하여 브리타니아 침공을 시작했다. 프라이토리아니 파견대장 율리우스 아스클레피오도투스(Julius Asclepiodotus)가 이끄는 선발대는 와이트 섬(Isle of Wight) 근처에 상륙하여 알렉투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알렉투스를 전사시켰다.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본인이 이끄는 함대는 런디니움(Londinium, 오늘날 런던)을 점령하여 도시가 프랑크족 용병들에게 약탈당하는 것을 막아냈다.
브리타니아 탈환 후 콘스탄티우스는 몇 달간 브리타니아에 머무르며 행정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기존 브리타니아 속주를 네 개로 분할하고, 하드리아누스 방벽(Hadrian's Wall)과 그 요새들을 복구하여 북부 방어를 강화했다. 이러한 일련의 군사적, 행정적 조치들은 그의 탁월한 군사 지도력과 효율적인 통치 능력을 잘 보여준다.
5. 기독교 박해 속 그의 역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303년에 대규모 기독교 박해를 시작했을 때,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이 박해에 가담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영역인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서 비교적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교회 건물 파괴 명령은 내렸지만, 다른 지역처럼 기독교 신자들을 적극적으로 색출하거나 박해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훗날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에 우호적인 정책을 펴는 데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6. 아우구스투스로의 승격과 갑작스러운 최후
305년 5월 1일,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스스로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고 막시미아누스에게도 동반 퇴위를 강요하면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동방의 갈레리우스와 함께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승격했다. 그는 서방의 수석 황제가 되었고, 그의 영역은 브리타니아, 갈리아, 히스파니아를 넘어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의 일부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된 이후,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브리타니아 북부 지역을 위협하던 픽트족(Picts)에 대한 징벌적 원정을 이끌었다. 그는 안토니네 방벽(Antonine Wall) 너머까지 진격하여 픽트족을 성공적으로 제압했다. 그러나 306년 7월 25일, 원정 도중 에보라쿰(Eboracum, 오늘날 요크)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나이 약 56세였다.
7. 콘스탄티누스 1세의 탄생과 사두정치의 붕괴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죽음은 사두정치 체제의 큰 균열을 가져왔다. 그가 사망하자마자 그의 군대는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the Great, 272년경~337년)를 황제로 추대했다. 이는 사두정치의 핵심 원칙인 ‘양자 상속’이 아닌 ‘세습’을 통한 즉위였기에 로마 전역의 권력 구도를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의 황제 즉위를 인정하지 않고 그를 카이사르로만 승격시켰으나, 이는 결국 막센티우스(Maxentius)의 반란과 이어지는 일련의 내전의 시작점이 되었다. 결국 콘스탄티누스 1세는 로마 제국 전체를 자신의 통치 아래 통합하게 된다.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콘스탄티누스 왕조(Constantinian dynasty)’의 시조로서 로마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그에 대한 평가가 콘스탄티누스 1세의 선전(propaganda)에 의해 미화된 측면도 있지만, 그는 분명 능력 있는 군사 지도자이자 현명한 통치자였다. 브리타니아와 라인 강 국경을 안정화하고, 비교적 온건한 기독교 정책을 펼쳤으며, 사두정치 체제의 핵심으로서 제국의 안정에 기여했다. 그의 죽음은 로마 제국의 전환점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그의 아들이 역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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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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