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티니아누스 2세(Valentinian II, AD.371~392) : 로마 제국 제49대 황제(AD.375~392) 서방
- 발렌티니아우스 2세(Valentinian II, Valentinianus)
- 황제 칭호 : 임페라토르 카에사르 플라비우스 발렌티니아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Flavius Valentinianus Augustus)
- 출생 : 기원후 371년 / 트레베리(Treveri), 갈리아 벨기카(Gallia Belgica)
- 사망 : 기원후 392년 5월 15일 / 비엔(Vienne), 비엔넨시스(Viennensis) 속주
- 부친 : 발렌티니아누스 1세
- 모친 : 유스티나(Justina)
- 재위 : 기원후 375년 11월 22일 ~ 392년 5월 15일
- 공동통치 :
발렌스(Valens, 375–378) 동방
그라티아누스(Gratian, 375–383)
테도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379–392) 동방
아르카디우스(Arcadius, 383–392) 동방
마그누스 막시무스(Magnus Maximus, 383–388)
빅토르(Victor, 384–388)
발렌티니아누스 2세(Valentinian II, AD.371~392) : 로마 제국 제49대 황제(AD.375~392) 서방 |
로마 제국의 꼭두각시 황제와 비극적인 죽음
로마 제국의 4세기는 대외적으로는 게르만족의 침입과 사산 제국과의 긴장, 대내적으로는 기독교의 부상과 끊임없는 황위 다툼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이 격동의 시기에 제국 서방의 황제 자리에 올랐지만, 평생을 강력한 인물들의 그림자 아래에서 보내야 했던 비운의 황제가 있다. 바로 발렌티니아누스 2세(Valentinian II)이다. 그는 불과 네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올랐으며, 어머니, 이복형, 그리고 막강한 군사 지휘관의 통제 속에서 단 한 번도 진정한 황제로서의 권력을 누려보지 못했다. 이 글에서는 로마 제국 쇠퇴의 길목에서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짧은 생애와 그의 복잡했던 통치기를 자세히 살펴본다.
1. 어린 나이의 즉위와 불안정한 시작 (371-375)
플라비우스 발렌티니아누스(Flavius Valentinianus)는 371년 트리어(Treveri)에서 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1세(Valentinian I, 321~375)와 그의 두 번째 아내 유스티나(Justina)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복형은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첫째 아내 마리나 세베라(Marina Severa) 소생인 그라티아누스(Gratian, 359~383)였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375년 판노니아에서 콰디족과의 협상 도중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당시 제국 서방의 정식 황제이자 후계자는 그의 큰아들 그라티아누스였다. 그러나 군부의 일부 장군들은 어린 발렌티니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함으로써 그라티아누스의 권력 독점을 견제하려 했다. 군대의 추대에는 그라티아누스나 동방 황제 발렌스(Valens)의 승인 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율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오로지 군부의 입김으로 결정된 사건이었다. 이에 따라 불과 네 살의 어린 발렌티니아누스는 제위에 올랐고, 그는 이복형 그라티아누스와 함께 서방을 공동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어머니 유스티나에게 있었다.
2. 밀라노에서의 통치와 종교적 갈등 (375-387)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궁정은 이탈리아 밀라노에 자리 잡았다. 그의 어린 시절과 초기 통치는 어머니 유스티나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 유스티나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뒤를 이어 니케아 기독교를 지지했던 이복아들 그라티아누스와 달리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신봉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밀라노의 정교회 주교였던 암브로시우스(Ambrose, 339~397)와 끊임없는 갈등을 빚었다. 암브로시우스는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었고, 유스티나는 암브로시우스가 점유한 성당의 예배권을 아리우스파 기독교도들에게 양도할 것을 요구하며 대립했다. 암브로시우스는 이에 반대하며 교회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시위를 벌였으며, 결국 황제와 유스티나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아직 어린 황제의 이름으로 통치가 이루어졌지만, 실제 권력은 종교적 지도자와 어머니 사이의 힘겨루기에 놓여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 제국 서방에서는 그라티아누스와 발렌티니아누스 2세 외에도 또 다른 황제가 등장했다. 브리타니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마그누스 막시무스(Magnus Maximus, 335~388)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383년 그라티아누스를 죽이고 서방의 대부분을 장악하며 발렌티니아누스 2세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3.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찬탈과 망명 (387-388)
마그누스 막시무스는 그라티아누스를 죽인 후 이탈리아를 제외한 서방 전체를 통치하며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387년, 막시무스는 결국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이에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 어머니 유스티나는 로마 제국 동방의 황제이자 가장 강력한 인물인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347~395)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테살로니키(Thessalonica)로 피신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마그누스 막시무스를 물리치는 데 동의했고, 그 대가로 율리안 아들인 갈라 플라키디아(Galla Placidia)를 아내로 맞이했다. 388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군대를 이끌고 마그누스 막시무스를 격파하고 그를 처형하며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황제로 복위시켰다. 이로써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제위에 다시 오를 수 있었지만, 이는 전적으로 테오도시우스 1세의 힘 덕분이었다.
4. 비엔에서의 통치와 아르보가스트의 통제 (388-392)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복위된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갈리아 지방의 비엔(Vienne)으로 궁정을 옮겨 통치했다. 그러나 그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그늘 아래 놓여 있었으며, 실질적인 권력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자신의 측근들을 서방의 중요한 요직에 배치하며 발렌티니아누스 2세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 심지어 테오도시우스 1세의 화폐에도 발렌티니아누스는 아르카디우스(Arcadius)와 함께 ‘손아래 동료’로 묘사되었다. 현대 역사가들은 테오도시우스가 발렌티니아누스를 통치자로 허용할 의도가 없었으며, 자신의 아들들을 후계자로 삼을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본다.
이 시기에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실질적으로 통제한 인물은 군사 지휘관 아르보가스트(Arbogast)였다. 그는 프랑크족 출신의 마기스테르 밀리툼(magister militum)으로, 로마군을 장악하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모든 결정을 좌지우지했다. 유스티나 여제가 사망한 후,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암브로시우스 주교와 화해를 시도하고, 아리우스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며 니케아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5. 아르보가스트와의 갈등과 의문스러운 죽음 (392)
점차 성인이 된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아르보가스트의 통제에서 벗어나 진정한 황제로서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려 했다. 그는 아르보가스트에게 군사적 명령권을 양도하라는 직접적인 지시를 내렸으나, 아르보가스트는 이를 거부하며 “당신이 나에게 명령권을 주지 않았다면, 나 또한 당신에게 그것을 양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이 일은 황제의 명령이 군대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황제의 직접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르보가스트의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결국 아르보가스트의 세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재차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도움이 도착하기도 전인 392년 5월 15일,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갈리아 비엔의 자신의 저택에서 목이 매달린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의 죽음은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아있다. 당시 일부 사람들은 그가 자살했다고 믿었지만, 많은 이들은 아르보가스트가 배후에서 그를 살해했다고 의심했다. 아르보가스트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살아있는 한 자신이 진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현대 역사가들은 그의 죽음을 아르보가스트에 의한 살해로 보는 경향이 크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21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으며, 그의 죽음으로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남성 직계 후손은 단절되었다.
6. 역사적 의미와 비극적인 유산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황제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그는 평생을 다른 이들의 통제 아래에서 보내야 했으며, 진정한 권력을 행사할 기회를 거의 얻지 못했다. 그의 통치 기간은 4세기 로마 제국이 겪었던 권력의 공백과 군사적 지휘관들의 부상, 그리고 황제의 권위가 어떻게 약화되어갔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의 죽음은 로마 제국에 또 다른 내전의 불씨를 지폈다. 아르보가스트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 사후 에우게니우스(Eugenius)를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웠고, 이는 테오도시우스 1세와의 최종 대결인 프리기두스 강 전투(Battle of the Frigidus)로 이어진다. 이 전투에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승리하여 로마 제국 전체를 잠시나마 다시 통일했지만, 그의 죽음과 함께 제국은 다시 동서로 분할되어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이름뿐인 황제였지만, 그의 비극적인 삶은 로마 제국이 내부적으로 얼마나 불안정했으며, 강력한 군사적 힘을 가진 이들이 어떻게 황제의 운명까지 좌우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로 남아있다. 그는 로마 제국이 쇠퇴해 가던 시기에 통치자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던 비운의 젊은 황제로 역사에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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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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