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근동] 바빌론 제7왕조 엘람 왕조 : 기원전 980년 ~ 975년
1. 역사의 혼돈 속 등장 : 엘람 왕조의 배경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심장부, 바빌론은 기원전 11세기부터 10세기 초에 이르는 긴 혼란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이 시기는 기록이 극도로 부족하고 왕들의 통치 기간이 매우 짧아 '메소포타미아 암흑기'라 불리기도 한다. 기존의 강력했던 중앙 권력이 무너지고, 아람족(Arameans)과 수투족(Sutu) 같은 유목민 집단의 끊임없는 침입으로 바빌로니아 전역은 극심한 정치적, 사회적 불안정에 시달렸다. 이 시기에 바빌론을 통치했던 왕조들은 대개 단명했으며,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하기 어려웠다.
바빌론의 왕 목록에 따르면, 이신 제2왕조(Second Isin dynasty)가 엘람의 침략으로 쇠퇴한 후,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20여 년에 불과한 단명 왕조들이 연이어 바빌론의 왕좌를 차지했다. 시랜드 제2왕조(Second Sealand Dynasty)와 바지 왕조(Bazi Dynasty)가 그 예시다. 이 혼란의 흐름 속에서, 약 기원전 980년경, 바빌론에 또 하나의 짧은 왕조가 등장했으니, 바로 '엘람 왕조(Elamite Dynasty)'다. 이들은 바빌론 역사상 '일곱 번째 왕조(seventh Babylonian dynasty)'로 불린다.
이 왕조가 '엘람'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역사적으로 엘람은 바빌론 동쪽의 강대국으로, 수많은 침략과 교류를 통해 바빌론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한때 바빌론을 정복하고 약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엘람 왕조'는 엘람의 영토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바빌론을 통치했던 왕조였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는 당시 바빌로니아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과 외부 세력의 복잡한 영향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할 수 있다.
2. 마르-비티-아플라-우수르(Mar-biti-apla-usur) : 유일한 통치자
엘람 왕조는 불과 약 5년간(기원전 980년경 – 기원전 975년경) 바빌론을 통치했던 극히 짧은 왕조였다. 이 왕조의 역사는 사실상 유일한 통치자인 마르-비티-아플라-우수르(Mar-biti-apla-usur, 재위 기원전 980년경-975년경) 한 사람의 통치기와 같았다.
그의 이름인 마르-비티-아플라-우수르는 아카드어(Akkadian) 이름이었다. 이는 그가 비록 '엘람 왕조'의 유일한 왕으로 불리지만, 실제로 엘람인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해석을 낳는다. 일각에서는 그가 순수한 엘람 혈통의 후예라기보다는, 엘람인 조상을 둔 바빌론인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만약 그가 엘람인이었다면, 그의 이름은 엘람식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바빌론의 왕좌가 특정 민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혼란 속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인물이라면 누구든 왕이 될 수 있었던 시대상을 반영한다. 그는 이전의 불안정한 왕조들, 즉 시랜드 제2왕조와 바지 왕조를 이은 세 번째 단명 왕조의 수장으로서 바빌론의 왕위를 이었다.
마르-비티-아플라-우수르의 통치 기간 동안 바빌론은 아람족의 침입과 내부의 혼란 속에서 고군분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고학적 기록이나 문헌 자료가 극히 드물기 때문에 그의 구체적인 통치 방식이나 업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는 '정통성 있는 왕'으로서 인정받아 사르곤(Sargon)의 궁전에 묻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비록 그의 통치 기간이 짧았고, 그의 왕조가 금방 사라졌지만, 그가 당시 바빌로니아 사회에서 일정한 정통성을 확보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정통성 있는 왕으로서의 매장'이라는 기록은 그가 단순히 무력을 통해 왕좌를 찬탈한 것을 넘어, 바빌론의 전통과 질서를 존중하려 노력했음을 보여줄 수 있다.
3. 엘람과 바빌론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엘람과 바빌론은 고대부터 오랜 교류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이 두 문명은 서로 결혼 동맹을 맺기도 하고, 때로는 잔인한 전쟁을 벌이며 관계를 이어갔다. 특히 카사이트 왕조 시대에는 바빌론 왕실과 엘람 왕실 사이에 여러 차례 왕실 간 통혼이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카사이트 공주의 아들이었던 운타쉬-나피리샤(Untash-Napirisha, 생몰년 미상)는 바빌론 공주와 결혼했는데, 이 공주가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동상으로 유명한 나피르-아수(Napir-Asu, 생몰년 미상)일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엘람 왕조'라는 이름이 단순히 통치자의 출신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다.
엘람 왕조가 바빌론을 통치했던 시기는, 바빌론이 외부 세력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도 자신들의 문명적 정체성을 지켜내려 했던 시기였다. 엘람 왕조가 바빌론의 아카드어(Akkadian language)를 공식 언어로 사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바빌론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바빌로니아 문화와 행정 체계를 따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침입자들이 결국 피지배 문화에 동화되거나, 최소한 그 문화를 존중해야만 통치를 이어갈 수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4. 불안정 속의 소멸 : 왕조의 몰락
엘람 왕조가 어떻게 그리고 왜 몰락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부족하다. 하지만 남아있는 단편적인 정보들을 통해 추론할 수 있다. 왕조의 몰락에는 아람족의 잦은 침입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아람족은 메소포타미아 곳곳을 유린하며 기존의 정주 문명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있었다. 이러한 외부의 압력은 바빌론의 통치자들에게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아람족의 침입은 종교적 의례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아키투 축제(Akitu festival)와 같은 중요한 종교 축제가 중단되었을 수도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당시 바빌로니아 사회의 혼란과 불안정성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는 간접적인 증거가 된다. 종교 축제의 중단은 사회 질서의 붕괴를 의미하며, 이는 왕조의 정통성과 통치 기반을 약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결국 마르-비티-아플라-우수르의 죽음과 함께 엘람 왕조는 단 하나의 통치자만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죽음 이후 바빌론의 왕좌는 또 다른 짧은 왕조들에게로 이어지며 혼란스러운 시기는 계속되었다. 이는 당시 바빌론에 강력하고 안정적인 통치 체계가 확립되지 못했고, 끊임없는 권력 교체와 외부 침입에 시달렸음을 방증한다.
5. 암흑기 바빌론의 한 조각 : 엘람 왕조의 역사적 의미
엘람 왕조는 비록 바빌론의 역사에서 극히 짧은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존재는 여러 가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 혼돈의 상징 : 이 왕조는 메소포타미아 암흑기의 극심한 혼란과 왕권의 불안정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강력한 제국이 쇠락하고 새로운 질서가 확립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단명 왕조들이 존재했는지를 보여준다.
- 외래 문화의 영향 : '엘람 왕조'라는 이름은 바빌론이 주변 외래 세력의 영향을 얼마나 강하게 받았는지, 그리고 그 외래 세력이 바빌론 사회 내에서 어떤 형태로든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바빌론이 고립된 문명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변 지역과 상호작용하며 변화해 온 복합적인 사회였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 지속성의 증거 : 이 짧은 왕조들의 연쇄적 존재는 바빌론 문명이 완전히 붕괴하지 않고 명맥을 이어갔음을 증명한다. 비록 힘은 약해졌지만, 바빌론이라는 이름의 계승은 계속되었고, 이는 훗날 바빌론이 다시 강력한 제국으로 부활할 수 있는 문화적,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엘람 왕조는 이 거대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잠시 빛났다가 사라진 작은 별과 같았지만, 바빌론의 '생존'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는 중요한 한 조각이었다.
- 연구의 과제 : 정보가 부족하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역사가들에게 더 많은 탐구의 기회를 제공한다. 엘람 왕조와 같은 '잊혀진' 시대에 대한 추가적인 고고학적 발굴과 문헌 분석은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전반적인 사회, 경제, 정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엘람 왕조는 바빌론의 역사적 전환점에서 나타난 짧지만 의미 있는 왕조였다. 혼란과 불안정 속에서도 바빌론이라는 도시의 명맥을 잇는 데 기여했으며, 고대 근동의 복잡한 정치 지형 속에서 외래 문명의 영향이 어떻게 발현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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